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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51화 (678/857)

외전 451화

드래곤은 가장 높이 뜬 구름의 위를 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택을 부수고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 레시듀의 낙하 장면은 무척이나 극적으로 비춰졌다. 달빛이 있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출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어둑한 하늘이 보인다.

창공에 뚫린 싱크홀과 그곳을 배회하는 유성우, 유성우는─

“…….”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그건 멸망의 수가 줄어들었음을 의미했다.

레시듀는 죽은 눈으로 유성우의 수를 세어 나가며 생각했다. 반왕은 정말로 성공한 것인가? 홀로 막아 내는 것에.

예상했지만 씁쓸한 현실이었다.

역시 레시듀에게 허락된 역할은 없다.

구름을 가르며,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레시듀는 가장 높은 곳에서 쭉 추락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개념적인 의미에서의 격락이 현실에 구현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낙하의 순간은 아주 길었지만 어느 덧 끝은 다가왔다.

지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 높이에서의 추락이다.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전신의 긴장을 푼다면, 어쩌면 전신이 산산조각 나서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면과 맞닿기 직전 레시듀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꽈앙!

그리고 투박한 착지를 마쳤다. 여전히 충격은 남아 있지만, 육체에 타격은 없었다. 충돌 직전 바람으로 된 쿠션을 전신에 둘렀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대응이었다.

왜지?

루카스의 몸뚱이가 육편이 되어 흩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나?

아니면 아직까지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인가.

“…후우.”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

“……!”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으나 귀찮다.

레시듀는 지독한 권태로움에 휩싸여 눈을 감고 말았다.

* * *

[…때문에 현 …황에서 멸망 대책 본부는 …립 목적에 …걸맞은 …약을 하고 있지 못한 채…….]

치직, 직.

노이즈 섞인 목소리가 거슬려서 레시듀는 눈을 떴다.

균열이 간 천장이 보였다.

“…….”

최근 이런 식으로 눈을 뜬 적이 많았기 때문에 레시듀는 우선 팔을 흔들어 보았다. 잘 움직여졌고, 그다음엔 주변을 둘러본다.

황량한 방이다.

아니. 방이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운 곳이었다. 10평 남짓한 장소엔 오래된 먼지와 꺼슬꺼슬한 모래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벽지는 벗겨져 있었다.

제대로 된 가구랄 것도 없었다. 부서진 탁자와 의자에 한쪽 부분이 뜯겨져 나간 침대……. 발코니, 아니, 베란다로 보이는 곳까지 문 없이 뻥 뚫려 있어서 우중충한 하늘과 시가지의 정경이 그대로 보였다.

현관문은 아예 부서져 있었는데, 상태를 보니 박살 나고 방치된 지 제법 오래 지난 것 같았다.

구속당한 것도, 감금당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레시듀는 이런 곳에 착륙한 기억이 없었다. 즉, 누군가가 그를 이 자리에 옮겼다는 것인데. …눈을 감기 전 보았던 그 인영인가?

[…또한 본부는… ‘하이드(Hyde)’의 색별 방안에 대해선 …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고 …표했으며, 사태 대처를 위한 …선의 …을 다할 것이라 선언했으나… 시민들의… 는…….]

노이즈 섞인 목소리는 탁자 위에 있는 라디오(Radio)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부러진 안테나로 잘도 지껄이는군.

레시듀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디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음. 나라면 안 만질 걸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랄 것도 없었다.

레시듀는 눈을 떴을 때부터 그 존재를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관문 앞에 왜소한 체구의 계집이 서 있었다. 빵모자를 푹 눌러쓰고, 손에는 자신의 상반신만큼 커다란 봉투를 안다시피 들고 있었다.

“그거 주파수 잡는 데만 이틀이 걸렸어요.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다시 골동품이 된다 이 말입니다.”

“…….”

레시듀는 힐끗 소녀를 쳐다봤다가 다시 라디오를 봤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안테나를 툭 건드린다.

“앗, 뭐 하는…….”

소녀가 당황한 순간 치직, 손끝에 희미한 전류가 튀었다.

[─아울러 허주虛主들은 여전히 협력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16-15 지역에서 벌어진 멸망의 출현해도 여전히 반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오오.”

소녀가 후다닥 달려와서 라디오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엄청… 선명해졌네요? 어떻게 했어요? 형 혹시 정비사, 뭐 그런 건가.”

형이라.

다시 보니, 이 소녀는 스스로가 소년으로 보이길 희망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아직 나이가 어렸고, 펑퍼짐한 옷을 입은 데다 모자까지 푹 눌러쓴 상태라 웬만큼 안목이 날카로운 자도 그 진면목을 눈치채기는 힘들 것이다.

레시듀는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움츠리는 소녀에게서 뺏다시피 봉투를 가로챘다.

“어어…….”

소녀가 당황하는 사이, 봉투 안에서 수통을 하나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갈증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거 귀한 건데…….”

소녀는 울상이 되어서 소극적인 태도로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레시듀는 무시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누워 있었던, 한쪽이 뜯겨 나간 침대에 다시금 몸을 실었다.

“꺼져라.”

짤막하게 말한 다음 다시 눈을 감았다.

수면은 나쁘지 않은 활동이었다. 잠시라도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있으니까.

아직 묵은 피로가 완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정신이 개운할 때까지 자고 싶어서 레시듀는 의식 상태를 헐겁게 풀었다.

* * *

…약 한 달.

드래곤은 약 한 달 동안 빠른 속도로 창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비를 피하기 위해서나 혹은 얘기할 곳이 필요해서 마련된 장소였다. 그러나 목적이 끝난 뒤에도 베니앙은 드래곤의 비행을 멈추지 않았다.

레시듀는 그러한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다가 어떤 생각에 미쳤다.

일곱 이빨의 용은 융합된 세상을 파악하고 있던 게 아닐까?

실제로 그녀는 마지막 날을 제외하면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다른 집중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럼… 지금은 어떤 상황일까.

용과 베니앙은 레시듀를 지키기 위해 페일과 대적했다. 그녀들의 싸움이 어디까지 번질지가 궁금했다.

또한 세디는? 그녀 또한 레시듀의 탈출을 탐탁잖게 생각할 인물 중 하나였다.

그렇겠지.

루카스의 몸뚱이를 간호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영지마저 내팽개친 채 떠난 여자다. 어느 덧 그녀의 삶에서 루카스 트로우맨은 일부 혹은 전체라고 할 만큼 커지게 되었다.

‘괜한 짓을 했다. 용.’

레시듀는 짙은 피로와 무기력증에 잠겨 있었다.

목적지 없는 돛단배에 몸을 실은 표류자 같다. 바닷물에 뛰어들 의욕조차 없어 그저 수류에 모든 걸 맡긴 채 떠내려갈 뿐인.

만약 페일이 어떻게든 다시 찾아와서 자신의 목숨을 뺏으려 든다고 해도.

그건 나쁜 결말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눈을 떴을 때, 레시듀는 자면서도 상념이 멈추지 않았단 사실에 실망했다.

젠장. 꿈까지 꾸다니. 정말 필멸자 나부랭이 다 됐군.

한숨을 내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잠자기 전 마지막 남긴 말이 이뤄지지 않았단 사실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서 소녀는 여전히 방에 있었다.

“…….”

손님인 레시듀에게 침대를 내주고, 그녀 자신은 다리 없는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린 채 잠에 들어 있었다.

기온은 제법 으슬으슬한 편이다. 하늘에서 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 행성이라면, 이런 연약한 생물체가 살아갈 환경이 조성되진 않았겠지만.

레시듀는 침대에 잠시 걸터앉아 있다가 문득 로브 안쪽에서 무게감을 느꼈다. 품을 뒤적거리자 얼마 없는 소지품이 나왔다.

하나는 비기닝 위저드의 가면.

그리고 다른 하나는.

“…….”

목걸이였다. 본 적 있는 것이다.

베니앙이 갖고 있던 목걸이.

‘멸망’을 판별할 수 있다고 말했던, ‘신의 눈동자’로 만든 그 목걸이.

‘언제 넣은 거지?’

쇠사슬을 풀기 위해 접촉했을 때, 그때인가.

그런데 이걸 왜 나에게. 레시듀는 복잡한 눈으로 목걸이를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대충 품에 쑤셔 넣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나가 보았다.

도시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레시듀가 머물고 있는 방이 고층 건물의 중상층 정도란 것도 알 수 있었다.

허물어진 빌딩과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지붕이 벗겨진 가택들, 블록마다 연기가 피어올랐고 도로엔 부서진 탑승물들이 찌그러진 깡통처럼 굴러다니고 있다.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의 움직임에선 음습함이 느껴졌다.

어두운 도시의 정경에선 어느 정도 발전된 문명의 흔적이 보였다.

레시듀는 곧 흥미가 식은 얼굴로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의자에 앉아 있던 소녀는 눈을 또랑또랑하게 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척을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제법 조용히 움직였는데.

아마도 제법 예민한 기감을 가진 것 같다.

“정신이 들었어요?”

동시에 귀찮을 만큼 뻔뻔했다.

“먹을 걸 좀 가져왔는데 드실래요?”

그 말에 레시듀는 잊고 있었던 공복을 느꼈다.

하루만 굶어도 위장이 아우성을 치니 확실히 육체란 불편하다.

그리고 굶주림은 레시듀에게 있어 불쾌한 여자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그는 탁자 위에 얹어진 봉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전에 잽싸게 일어난 소녀가 봉지를 먼저 가져갔다.

“크흠. 주는 건 좋은데, 우리 얘기나 좀 하죠?”

“…….”

“…아니, 형. 원래 이렇게 말이 없어요?”

소녀는 이제 아예 질린 기색으로 되물었다.

‘말이 없다’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는데.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는 취미는 없다.”

레시듀는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대충 대꾸했다.

그러나 그러한 반응에도 뭐가 그리 기쁜지 소녀가 킬킬 웃었다.

“이번엔 필요한 말 아닐까요? 저랑 얘기 안 하면 빵 없으니까.”

이 소녀는 알고 있는 걸까?

힘이 없는 자는 결코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레시듀가 손가락 움직이는 것보다 쉽고 가볍게 그녀의 영혼마저 지울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토끼를 상대로 으르렁대는 포식자만큼 추한 꼴도 없어서, 레시듀는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봤다.

비로소 대화할 준비가 갖춰졌다고 여긴 건지 소녀가 밝게 웃었다.

“저는 루카라고 해요. 형은요?”

루카.

레시듀는 잠깐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어두운 금발에 시선을 줬다. 정말 거슬리는 우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없다.”

“네? 뭐가요?”

“이름 없다고.”

‘레시듀(Residue)’란 이름을 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루카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고개를 홀로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대충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랬군요. 그럼─”

“왜 나를 구했나.”

레시듀는 정신을 잃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하늘에서의 낙하가 끝나고, 그는 이 폐허보다 조금 양호한 도시 어딘가에 떨어졌다. 그 꼴을 발견한 게 이 계집, 루카였고 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방으로 옮기기까지 했겠지.

누군지도 모르는 초면인 사람에게 베풀기엔 과할 정도의 친절이다.

그러나 루카는 레시듀의 질문에 오히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요?”

위선자인가. 저 어린 나이에. 가여운 일이다.

레시듀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린 빵을 조금 뜯어 먹었다.

더럽게 맛없었다. 곰팡이가 핀 것 같기도 한데.

“앗, 내 빵, 언제…….”

“이 몸에게 관여하지 마라.”

레시듀가 짤막하게 말했다.

“왜요?”

“넌 이 몸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니까.”

“얼마나 위험한데요?”

이토록 직설적으로 물어 오니, 레시듀조차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빵을 우물우물 씹다가 곧 대응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럼 꼬마야. 네 녀석이 생각하는 가장 나쁜 놈은 누구냐?”

“어… 타노스?”

“그놈이 뭘 했지?”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죽였어요.”

“…….”

좀 강적인데.

저만한 존재라면 이름을 들어 봤을 법도 한데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이 몸이 더 위험하다.”

“자신감 넘치시네. 사람이라도 죽였어요?”

“비슷하지.”

“얼마나요?”

“셀 수 없을 만큼.”

그러자 루카가 빙긋 웃었다.

“그럼 형도 저랑 같은데요.”

─우리는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루카의 얼굴에 베니앙의 얼굴이 겹쳐졌다.

기분 나쁜 경험이라서 레시듀는 인상을 구겼다.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나머지 빵을 입 안에 털어 넣은 다음 씹어 삼키고,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네네, 하고. 다소 불성실한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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