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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47화 (674/857)

외전 447화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저택으로 돌아오니, 입구에 세디가 서 있었다.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짓고 팔짱을 낀 채였는데, 물에 홀딱 젖은 레시듀의 꼴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산책할 날씨는 아니지 않아?”

“…음.”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 말이 너무 변명처럼 들려서 너털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때 나풀나풀 무언가가 날아왔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받아 보니, 보송보송한 수건이었다.

어디서 이런 걸.

“욕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대답이 들려왔다.

이쪽의 표정이 읽힌 건가? 좋지 않은 징조인데.

“이번엔 나랑 얘기 좀 하자. 이쪽에서 묻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

바로 제2의 심문 타임이라. 정말 숨 돌릴 시간도 없군.

그나마 세디는 이 저택에 도사리고 있는 심문인들 중에서 수월한 축일 테지만, 그 사실이 위로가 될 순 없다.

“일단 좀 씻겠다.”

푹 젖은 꼬락서니를 핑계 삼아 시간을 번다. 세디는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2층에서 오른쪽.”

욕실의 위치겠지.

레시듀는 2층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향했다. 욕실이라고 불릴 만큼 단출한 곳이 아니다. 내부는 넓었고, 후끈한 열기가 몽실몽실 피어나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탕이 있었다.

그것도 제법 크다.

물론 느긋하게 몸을 담글 여유까지는 없어서, 대충 몸에 묻은 물기만 털어내기로 했다.

쏴아아-

레시듀는 온수를 받아내며 두 눈을 감았다.

용이 했던 말이 다시금 머리를 스친다.

십이허주 중 최소 셋 이상이 멸망이다.

‘그렇다면 0번째 악마, 세디 트로우맨이 멸망일 확률도 있다.’

루카스 트로우맨의 수양딸? 그건 안전망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허의 세계와 삼천세계에 모두 연결점을 갖고 있는 세디는, 만약 멸망의 끄나풀로 삼을 수만 있다면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레시듀는 이 추측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용이 갖고 있던 목걸이. 하루에 한 번 쓸 수 있다고 했다.’

이 저택은 아마도 용의 이동식 거점이며, 되도록 숨겨야 할 아지트일 것이다.

그런 장소에 페일, 그리고 세디를 들였다는 건 적어도 그들의 결백은 증명됐단 거겠지.

‘그렇다면, 그녀들은 아군인가?’

최소한, 멸망에 맞설 카드로 이용할 수 있을까?

그것만큼은 레시듀의 재량에 달렸다.

이 셋은 루카스 트로우맨의 절대적 우군이었다. 그러니 레시듀가 루카스를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다면… 그녀들의 힘을 빌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레시듀는 문득 든 생각에 멈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뭐?

그다음에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거냐?

설마 이제 와서 루카스를 연기하는 데에 부담감이라도 느끼게 됐나? 아니면 타인을 기만하고 있단 사실에 죄책감이 엄습하기라도 하나.

아니지, 아니야.

그딴 인간적인 감상은 레시듀를 뒤흔들 수 없다.

지금 그가 느끼는 망설임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

‘정말로 이 방법이 옳은가?’

루카스 트로우맨을 흉내 내는 것.

놈이 쌓았던 힘, 경험, 기억, 인연…….

그 모든 걸 모방하는 게 멸망 공략에 임하는,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네가 가장 완벽했으니까.’

루카스는 레시듀에게 있어 정답이었다.

실수하고, 헤매고, 발버둥 치고, 추하게 망가지고,

그러나 결국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남자였다.

하지만 방금 전, 멸망의 존재를 단편적으로 확인하게 되자 그러한 생각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

방금 레시듀는 들어선 안 될 확신을 가지고 말았다.

─‘루카스 트로우맨’을 연기하는 것만으로는, 멸망(루카스 트로우맨)을 이겨낼 수 없다.

쏴아아…….

한동안 넋을 놓은 채 온수를 받아냈다.

신뢰하던 이정표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을 땐 어떻게 해야 되지?

아니, 그것보다.

루카스 트로우맨을 흉내 내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의 나에겐 무엇이 있는가.

루카스 트로우맨이 없는 나란 무엇인가.

─네놈은 더 이상 군림자가 아니다. 떨거지, 주제를 알아라.

뇌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건 스스로 극복하고, 완치했다고 여겼던 상처였다. 그러나 문득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순간, 그 자상은 오히려 끔찍하게 악화된 채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덧난 걸까.

아니.

루카스란 진통제가 있었기 때문에 잠시 잊을 수 있었던 거겠지.

누군가의 모조품이었고, 지금 다시 다른 누군가의 모조품이 되려 한다.

거울을 바라보자 물에 젖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너는 누구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누구지?”

물음을 던지는 게 아니라 답을 구한다.

레시듀는 이게 혼잣말이 아니길 바랐다.

거울 속에 있는 남자, 레시듀의 유일한 정답이었던 남자가 어떤 대답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쏴아아아-

“…….”

레시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홀로 답을 냈다.

루카스 트로우맨도, 천둥우레의 뇌존도 아닌 찌꺼기(Residue).

처음부터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아주 먼 옛날 같군.’

뇌존이었을 때의 기억이 희미하다.

이제는 자신감이 무엇인지도 잘 알 수가 없어졌다.

* * *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레시듀는 감상에 잠기는 걸 그만두고 욕실을 나서기로 했다.

자신이 전에 없을 만큼 불안정하고 흔들리고 있단 건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오만함만은 아직 남아 있다. 이제는 그 헐뜯긴 자존심만이, 레시듀의 자아를 지탱하는 가장 견고한 버팀목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욕실을 나선 순간.

“…….”

과장 좀 보태서 심장이 멎을 뻔했다.

탈의실엔 페일이 서 있었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던 것처럼 담담한 태도다.

여긴 왜,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설마하니, 이 몸의 정체를.

“꼼꼼히 씻었어요?”

불쑥 나온 페일의 목소리가 레시듀의 정신을 깨웠다.

그녀는 ‘루카스’의 알몸을 보고도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당황한 기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에 이쪽이 움츠러들 지경이었다.

“…아, 그래.”

“그거 다행이네요!”

페일이 유쾌한 태도로 킥킥 웃었다.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던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레시듀가 나오자마자 떠나려는 것처럼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말 페일을 나섰다.

“아. 그러고 보니.”

…고 생각한 순간, 문 너머로 빼꼼 고개만을 내민다.

“깜빡했던 물건이요. 거기 다시 넣어 뒀어요.”

눈동자가 반월처럼 휘어졌다.

그럼 진짜로 이만, 페일은 그 말을 남긴 채 이번에야말로 떠났다.

레시듀는 쉽게 움직일 수 없어 그 자리에 굳어 있다, 조금 뒤 옷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충 벗어 재낀 옷 위에, 비기닝 위저드의 가면이 놓여 있었다.

* * *

“좀 씻으니까 낫네.”

세디가 있는 방으로 돌아간 순간 들린 목소리였다.

레시듀는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를 뒤로 확 넘기고 싶다는 욕구를 참으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나.”

“별로.”

세디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언젠가 잊힌 과거 속의 루카스가 세디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던 광경이 떠올랐다.

레시듀가 그 옆에 앉으려하니, 세디가 자리를 만들어 줬다.

“그 페일이란 여자와는 무슨 관계야?”

역시 세디의 의문은 그거였나.

“참고로 정체 같은 걸 물은 게 아냐. 그 여자가 왕성의 4기사 중 하나인 ‘기근의 청기사’란 것 정도는 나도 알아.”

일단은 십이허주가 됐으니까.

세디가 짤막하게 덧붙인 다음, 다시 말했다.

“내가 말한 건, 그 여자와 아버지가 무슨 관계냐는 거지.”

“가장 궁금한 게 그건가?”

“…달리 묻고 싶은 것들도 있지. 내 상태를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금하고. 또…….”

다음 말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듯했다.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은 거겠지. 레시듀는 정말로 싫었지만, 또다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주변에 보는 이가 없어서일까, 세디의 태도는 아까보다 훨씬 온순했다. 경계심이 사라진 고양이를 보는 것 같다.

“페일이 네게 뭐라고 했지?”

“…엄마라 부르라느니, 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아버지, 설마 그 여자랑─”

“아무 일 없었어.”

세디가 우려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만약 페일이 떠나지 않고 쭉 루카스의 곁을 지켰다면 모르지만. 그녀의 공세는 만만찮았다. 여심에 대한 지식이 먼지만큼도 없는 루카스 트로우맨마저 뒤흔들 수 있을 만큼.

“아, 역시.”

페일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아니, 뭐. 당연히 헛소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여자 태도가 워낙 당당해야지.”

“…….”

투덜대는 세디의 옆얼굴을 눈치채지 못하게 바라본다. 불쾌한 듯 이마를 구기고 있지만, 페일을 원색적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세디는 상대의 직설적인 태도나 솔직함, 혹은 일방적인 애정공세에 묘하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페일의 존재는 그녀의 천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 왠지 갑자기 피곤해졌어.”

세디가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완전히 무방비한 모습이다. 이 또한 레시듀를 루카스로 여기기에 가능한 행동이겠지.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음. 0번째 악마가 된 이후엔 피로 같은 게 잘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대융합의 여파겠지. 잠깐 눈 좀 붙여 둬.”

“그럴까…….”

노곤해진 목소리로 세디가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심문이 싱겁게 끝났다. 잠들기 전에 방을 나서는 게 좋을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거기 있어?”

“그래.”

레시듀는 멈칫하며, 반쯤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붙였다.

“그래…….”

“…….”

“다시 만나니까… 좋다…….”

마지막 말이었다.

규칙적인 숨소리, 풀어진 인상.

세디는 완전히 잠에 들었다.

확실히 수척한 얼굴이라고, 조금 뒤늦게 그런 감상을 가진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베니앙도 그랬다. 그녀들 모두, 기사 두 명에게 감금당해 있던 ‘루카스 트로우맨’을 구하려고 한계를 진작 넘어서 있었다.

레시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곧바로 거뒀다. 그리고 스스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방을 나섰다.

방금 몸을 말렸는데, 또다시 사나운 폭우로 몸뚱이를 몰아넣고 싶은 기분이다.

느낀 적 없는 답답함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그 이상으로 스스로가 낯설었다. 정말로 이 한심한 존재가 나란 말인가?

불안한 걸음걸이로 저택을 거닐었다.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청기사 페─

빠악.

배가 움푹 파이는 감촉, 뒤이어 속이 진탕 뒤집히는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고통에 필요 이상으로 놀라거나 두려움을 느끼진 않았지만, 대응하지 못했단 사실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 표정.”

고드름이 고막을 찌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루카스라면 날 태연하게 볼 수 없었을 거야. 아무렴. ‘그런 짓’을 하고 헤어진 직후인데.”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도 전에 이격, 삼격이 날아왔다.

무릎을 발로 차이고 목젖을 가격당한다.

“컥.”

무릎뼈는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졌고 목젖은 망가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컥컥대며 주저앉은 순간, 머리채를 쥐어 잡혀 고개가 억지로 들렸다.

“처음엔 상황이 상황이니까, 경황이 없는 걸로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 이후로도 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실수하더군. 스스로 깨닫기는 했나? 아닐 거야. 응. 필시 그럴 테지.”

뒤집힌 그믐달처럼 불길한 눈동자가 레시듀를 직시했다.

“두 가지만 물을게요.”

페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루카스는 어디 있고, 넌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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