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45화
“일단 청기사를 보냈다는 건, 세디 트로우맨이 처해 있던 특수한 상황에 대해선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건데─”
“그래. 내가 세디에 대해 가장 궁금한 건 하나야.”
이 이상 닥치고 있는 것도 어색해 보일 것 같아서, 레시듀는 선수를 칠 겸해서 용의 말을 끊었다.
다행히 용은 딱히 불쾌한 기색 없이, 오히려 하던 말을 멈춘 채 이쪽의 얘기를 들을 태도를 갖췄다.
“검은 가시의 마왕은 어떻게 됐나. 여전히 세디는 놈의 꼭두각시인가.”
“그건 아니야.”
이 건에 대해선 스스로 대답해야 된다고 생각한 듯, 세디가 말했다.
“그자는 더 이상 나를 속박할 수 없어. 생사여탈권도 되찾았고 의지도 자유롭지. 아버지가 염려할 만한 일은 이제 없어.”
듣던 중 다행인 발언이다.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럼 그 힘은?”
지하 동굴에서 보여 줬던 힘은 ‘꼭두각시’로서 다룰 수 있는 힘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세디를 ‘검은 가시의 마왕’으로 오해할 정도다.
세디의 얼굴에 설핏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마왕은 생각을 바꿨어. 나의 지배자가 아닌, 후원자가 되기로.”
“뭐?”
“이해관계가 일치한 거야. 아. 물론 전에도 그랬었지만… 좀 더 내 쪽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재협상했다고 할까. 그러니까 내 말은, 어…….”
세디가 묘하게 횡설수설하는 얼굴이 되어 떠들어댔다. 실속 없는 말들이 두둥실 흘러나와 레시듀의 혼란을 부추겼다.
조금 뒤늦게, 세디가 이 일에 대해 깊게 말하고 싶은 기색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그러나 레시듀로선, 아니.
‘루카스’로선 결코 쉽게 넘어가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세디.”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하자, 세디가 찔끔한 기색이 됐다.
“난 이 일을 어설프게 넘길 생각이 없어. 그러니 확실히 말해다오.”
“…윽. 그게.”
그런데도 여전히 우물쭈물한 기색이다.
더 닦달할까. 아니면 잠자코 기다려 줘야 할까.
레시듀가 고민할 때,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세디가 직접 말했어요.”
제법 오래 침묵을 지켰던 페일이었다.
그녀는 깍지 낀 손가락 위에 턱을 얹은 채 싱글대고 있었다.
“엘한테 어떻게든 검을 빌려서, 그걸로 마왕의 힘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는데요. 그때 마왕한테 제안을 받았대요. 힘을 빌려줄 테니까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선에서만큼은 협력하자고.”
“협, 력?”
단어를 끝맺는 것조차 힘겨웠다. 레시듀는 순간적으로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앉아 있는 게 다행이었다. 비틀거리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검은 가시의 마왕이, 군림자가 협력을 제안했다?
세상에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또 있을까.
“여러 가지 요소가 겹쳐진 끝에 내린 최종 결론일 거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야.”
용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의 대비일 뿐, 최소한 우리에게 피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그 말을 믿으란 거냐.”
“믿어라. 군림자였던 내가 하는 말이니까.”
그 말이 방아쇠였다. 울컥하고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레시듀는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용을 노려보고 말았다.
“네가…….”
─이 몸보다, 그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거냐?
목 끝까지 차오른 목소리를 억지로 삼켰다. 으스러질 듯 움켜쥔 주먹을 탁자로 가렸다.
“…아버지?”
세디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레시듀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한 가지 더 말해 주자면, 내가 그와 독대해서 얘기를 좀 나눴다. 설득이 목표였는데 반쯤은 달성했지. 이후 마왕은 무슨 생각에선지 뇌존과 거인을 불러 모종의 대화를 했고, 이후 그의 가치관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거라 추측하고 있다.”
어떻게 그리 변화를 쉽게 담을 수 있나.
레시듀는 이번에도 그 말을 삼켰다.
“…그렇군. 납득이 간다.”
전혀, 손톱만큼도 납득하지 못한 주제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표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제약이었다.
“세디 트로우맨에 대한 핵심적인 정보는 그게 전부다. 가장 큰 의문이 풀린 듯하니, 이제 나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야겠군.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나?”
“…짐승의 조련사를 자처하게 된 이유는?”
“음? 초롱이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초롱이라는 건 베니앙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라면 저 웃기지도 않은 호칭에 코웃음이라도 쳤을 테지만, 지금의 레시듀에겐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무슨 말이지?”
“회담에서 한 말 그대로다. 오직 나만이 ‘짐승’과 의사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대리인의 위치로 참석한 거고.”
“…….”
“설마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나?”
조련사의 정체가 베니앙이란 걸 알게 된 시점에선 당연히 그랬지.
이건 또 반전 아닌 반전이었다.
베니앙은 모종의 목적이 있어서 회담에 잠입한 게 아니었다. 참된 의미로 대리인을 자처할 수 있었고, 그 자격으로 회담에 정식으로 참석할 권리 또한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말이 사실이라면 또 다른 의문이 피어난다.
“짐승과는 어떻게 의사를 교환할 수 있게 된 거지?”
“대화만을 목적으로 십여 일간 싸우니, 그럭저럭 인정해 주더군.”
“…….”
마지막 순간에 짐승과 싸웠던 게 그 때문이었나.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용과 짐승이 싸운 걸 알게 됐을 때부터 느낀 의문,
십이허주는 분명 강하지만, 그 강함은 군림자를 쓰러뜨릴 수준은 되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 군림자와 동등한 강함을 가진 건 네 명의 기사뿐이다.
그러니까.
“짐승은 네게 패배를 안겨 줄 수 없어.”
“…….”
“줄곧 궁금했었지. 일곱 이빨의 용. 너는 누구에게 패배해서 격락한 것인가?”
“짐승과 조우했을 때 난 이미 약해져 있었다. 알다시피 과거 허의 세계는 우리들이 존재할 수 없는 장소였지만, 난 페널티를 감수하고 이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얼마 안 가 한계에 봉착하게 됐고, 짐승과 싸우게 된 것도 그쯤의 일이지.”
냉소를 이끌어낼 목적이었다면 성공했다.
레시듀는 차갑게 입가를 비틀었다.
“핑계치곤 어설퍼. 그걸로 나를 납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아니면 그 모든 상황을 의도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
“…나는 삼천세계의 모든 것 중 가장 먼저 허의 세계에 주목했었다. 언젠가 이 세계가 위협이 될 것이라 여겼지. 당시에 지금의 사태까지 예측한 건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패배를 겪을 이유는 충분─”
“패배를 경험하고 싶다, 모순된 욕망이지.”
용이 침묵했다.
“본심은 훨씬 단순해. 그저 스릴을 원하는 거다. 건조한 삶이 재밌어질 만큼의 적당한 자극, 오만한 바람이지. 패배를 바라면서도 마음 한쪽엔 결코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
“그런 존재가 정말로 패배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제 레시듀의 미소는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치장하게 된다. 실은 의도한 것이었다고 허장성세를 부리는 거지. 그러니 부탁이니, 이제 고상한 척은 관둬 주지 않겠나?”
쿠르릉…….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세디는 둘의 대화에 압도되어 있다가, 문득 창문 바깥을 바라봤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타닥, 탁.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는 거슬릴 만큼 또렷했다. 탑승감은 완벽했지만, 방음은 그 수준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당신은.”
이윽고 용이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머리카락은 보다 어두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군림자에 대해 잘 알고 있군요. 마왕 이상으로.”
바뀐 말투로 입을 연다.
“잠깐 얘기할까요.”
“지금 하고 있잖아.”
“둘이서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레시듀는 갑자기 냉정해져서 힐끗 세디를 바라봤다.
기색을 살피기 위한 흘김이었으나, 그녀는 허락을 구하기 위한 행동으로 받아들였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럼 페일은?
“…….”
그녀는 레시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입 끝만 올리고 있었는데,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가려져 눈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간혹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킥킥 숨죽여 웃었다.
…기분 나쁜 여자다.
레시듀는 그 태도에 소름이 돋았단 사실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럴까.”
용을 따라 방에서 나섰다.
그녀가 간 곳은 거실에 마련된 다른 방이 아니었다. 저택 입구를 열고 바깥으로 나간 것이다.
쏴아아아-
자연스레 그들은 몰아치는 폭풍우를 직시하게 됐다.
그리고 용은 레시듀가 제지하기도 전에 저택을 나섰다. 자연스레 가냘픈 몸뚱이가 폭풍우에 노출됐다.
이 정도 비바람 앞에서라면 그녀보다 두세 배 체격이 큰 거한이라도 딱정벌레처럼 나무에 달라붙어 있어야겠지만, 용은 옷자락이 조금 펄럭일 뿐 여전히 사근사근한 걸음걸이로 드래곤의 등 위를 거닐었다.
“…….”
레시듀는 어쩔 수 없이 그 위태로워 보이는 산보에 동행했다.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드래곤의 등은 상당히 넓었다. 대저택에 딸려 있는 정원쯤 되는 크기여서, 느긋하게 한 바퀴 돌려면 한 시간쯤은 걸릴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에게 그 정도 여유 시간은 없었다.
용의 발걸음이 멈춘 건 드래곤의 꼬리 근처였다.
침체된 눈동자가 지상을 향했다.
드래곤은 상공 수천 미터 위를 비행하고 있었으나, 용의 시선은 어렵지 않게 지상까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풍경까지 닿았다.
“왕성에서의 일설, 잘 들었소.”
그사이 머리카락 색깔이 또 바뀌었다.
이번엔 노을빛이다. 몰아치는 비바람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색이다.
레시듀는 천천히, 여태껏 모습을 드러냈던 용들의 인격을 떠올렸다.
일곱 이빨의 용의 주主 인격은 그들 중 있을 것인가, 혹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일설?”
“삼파전三巴戰 말이오.”
“…….”
“공포, 상실. 사람을 단기적으로 성장시키기에 가장 효과적인 요소요. 그것들을 부추기는 데엔 혼란만 한 게 없고.”
“슬슬 본론에 대해 듣고 싶다.”
“과거의 그대에겐 좀 더 예의가 느껴졌었는데.”
그랬었지.
분명 위대한 필드에서, 루카스는 일곱 이빨의 용을 존중했다. 분명 존칭도 썼을 것이다. 비록 격락한 꼴이라고 할지라도, 경의를 갖췄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이후 루카스 트로우맨은 무슨 일을 겪었나. 얼마나 변했는가.
“허례라도 괜찮다면 구색은 맞춰 주지.”
“아니, 됐소. 본인은 그저 그대의 변화가 안타까울 뿐이오.”
“…….”
“그대는 필시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경험했을 터, 하지만 결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건 아니오.”
“확언하는군.”
“당연한 것 아니겠소? 만약 그랬다면 삼파전 같은 건 제안하지 않았으니까.”
레시듀가 그 말에 담긴 저의를 파악하려 했으나, 용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본인에게 있어 십이허주 회담에 참가하는 건 상당한 위험부담을 짊어진 선택이었소.”
알고 있다.
용은 스스로를 숨기는 데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움직이기에 왕성은 너무나도 위험한 장소였다.
십이허주는 물론, 기사들마저 절반이 출석하지 않았던가.
“하나 그 정도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이유가 있었지. ─모든 이가 입을 모아 말하고 있소. 멸망의 습격은 이제 시작됐다고.”
용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아마도 먹구름 너머의 광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새카만 구멍과, 그 주위를 수호하듯 둘러싼 유성우를, 멸망의 광경을.
“그 말은 틀렸소.”
“무슨 뜻이지?”
“모두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단 거요. 그대도 아마 알고 있겠지? 설원에서 이뤄졌던 ‘적기사’와 ‘태양거인’의 공동전선을.”
용이 씁쓸하게 웃었다.
“멸망이 아직까지 들이닥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막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 것 같소? 대체 무엇이길래 기사와 군림자가 손을 잡아야만 했을까.”
레시듀가 멈칫했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 잊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그들이 막고 있던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첫 번째 멸망’이라고, 적기사가 말하던 걸 ‘샘’을 통해서 보았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막고 있던 게 정말로 멸망이라면 모순점이 생긴다. 그 시점에서 루카스는 아직 ‘바깥’으로 진출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멸망이 벌써 들이닥친 거지?
“왕성의 지붕을 뚫고 출현한 괴물, 그게 멸망의 첫 등장이라고 대부분의 이들이 여기겠지. 설원에서 멸망을 틀어막고 있던 적기사, 태양거인마저 그럴 것이오. 그들은 자신들의 봉쇄가 성공했다고 착각하고 있을 테니까.”
설마.
문득 든 생각에 레시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게 아니라면? 훨씬 전부터 멸망의 출현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거라면? 허의 세계에 속한 존재들이 알 수 없을 만큼, 은밀하게…….”
용의 시선이 다시 지상을 향했다.
그 눈동자에 펼쳐진 광경에, 레시듀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건 역사상 가장 추악한 변태變態였을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죽일 듯 싸우고 있던 자들의 몸뚱이 일부가 변형되기 시작했다.
얼굴이 갈라지거나, 가슴이 갈라지거나, 등뼈가 갈라지거나 했고 그 역겨운 단면 속에서 피막이 솟구쳤다. 피막은 곧 제 몸뚱이를 꽁꽁 감쌌는데, 그러한 모습은 육편으로 만든 고치 같았다.
푸화악!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흐른 후, 그것들은 태어났다.
피막을 손으로 찢은 채 완전히 변한 모습을 드러냈다.
멸망.
용의 말이 옳았다.
모두가 잘못 짚고 있었다. 하늘을 수놓은 유성우에 필요 이상으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재앙은 하늘로부터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삼파전.
레시듀가 바랐던 성장의 장場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형태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