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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41화 (668/857)

외전 441화

적기사의 검은 피스톨 소드(Pistol Sword)였다. 화기와 칼이 일체화된 형태의 무기로, 근거리와 중거리에서의 공격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만능 병기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실용성이 다분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죄다 놓치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피스톨 소드, 혹은 건블레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이 무기가 그랬다.

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베고 찌르는 능력이 크게 하향됐고, 화약과 기계 부품을 담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게는 늘어났다. 구조가 복잡해진 만큼 내구도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 총기류적인 역할은 충실히 수행했나? 그 점도 애매했다.

극단적인 자들은 피스톨 소드를 총검보다 실용성이 떨어지는 형태라고 비난했다. 혹 그게 아니라도 차라리 칼과 총을 따로 지니고 다니는 게 훨씬 나을 거란 의견이 많았다.

─적기사의 무기는 달랐다.

상기된 평가를 모두 뒤엎을 수 있는 포텐셜이 있었다.

“쿨럭……!”

레시듀가 흙먼지와 함께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이런 미친년이……!’

내가 저 여자를 어떻게 판단했더라?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보이지만, 이성적인 구석이 있다?

아니! 전혀 아니었다!

저 여자는 단순한 정신병자였다! 레시듀는 이제부터 그 사실을 확고부동한 대전제로 여길 것을 맹세했다.

‘진짜로 이 몸을 죽일 생각이었나?’

적기사의 검에서 나온 화력은, 쇠사슬에 전신이 구속된 레시듀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설령 레시듀의 몸뚱이가 완전히 멀쩡했어도 위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죽음벌레.”

“…….”

십이허주 죽음벌레.

그 남자가 몰아치는 화염의 폭풍으로부터 레시듀를 지켰다.

정확히는, 방벽이 되어 주었다.

여태껏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레시듀는 물론이고 4기사마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기척을 죽인 채 숨어 있었던 것이다.

레시듀에겐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아예 대응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화력이 맞닿기 직전 레시듀가 떠올린 수단은 그 자신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쇠사슬 때문에 힘이 제한된 상태라 위험 부담도 최소 3배는 컸을 테고.

…다시 죽음벌레를 보았다.

방금의 어마어마한 화력을 직격으로 맞았으니, 놈의 생명에 여유가 얼마나 있든 막대한 피해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벌레를 보충해 온 건가?’

죽음벌레는 거의 반쯤 타다 만 꼴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두 눈으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새까맣게 탄 살결은 오래 방치되어 썩어 문드러진 시체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고, 비교적 화력에 직격당하지 않은 부위도 화상을 입지 않을 수는 없어 누런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나 그런 끔찍한 모습도 잠시뿐,

곧 죽음벌레의 형상은 자연스레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괜찮은가?”

차마 고맙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그렇게 물었다.

“…멋지군.”

“뭐?”

그제야 이 녀석이 등장 이후 한 번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넋 놓은 채 페일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완전히 홀딱 빠진 얼굴이었다.

저딴 여자의 어느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고.

아니, 강함을 배우자의 소양 중 하나로 여기면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정도란 게 있지 않나.

“후우…….”

레시듀는 다소 흥분된 머리를 차게 식혔다.

이제는 인정한다.

자신에겐 감정이란 게 제대로 생겼고, 그것은 필멸자 못지않게 격렬히 변화한다.

그러니 학습해야겠지. 감정을 통제하는 법에 대해서.

약한 주제에 감정에 휘둘리는 놈들의 결말을 알고 있다. 하나같이 개죽음이었다. 레시듀의 자긍심으로선 납득할 수 없는 최후 중 하나다.

‘…그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최후란 뭐지?’

또 쓸데없는 상념이 이어지기 전, 레시듀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의 방향을 현재로 바꾸었다.

우선 가장 큰 의문 하나.

‘청기사는 이 동정 놈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을 텐데?’

그야말로 간이고 쓸개고 모조리 빼내 주고 싶은 것처럼 살랑거리는 걸 보았지 않나?

그런데 뭐냐, 방금 전 공격은.

두 명의 기사는 물론이고, 묶여 있던 루카스마저 쓸릴 뻔했다.

적기사에게서 훔친 무기라서, 이만한 화력이 방출될 지 예상하지 못한 건가?

“우와~ 이거 죽이네!”

얼빠진 목소리를 들으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페일은 자신이 낳은 참상을 흐뭇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태도를 목격하니, 자연스레 레시듀의 추측도 가장 최악의 결론을 향해 치달았다.

‘페일이, 이 몸의 정체를 알고 있다?’

애초에 묶여 있는 자신 또한 ‘적’으로 여긴 것이라면, 그렇다면 아귀가 맞는다.

무엇보다 저 여자는, 루카스의 내부에 뇌존의 잔념이 있단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지 않나?

‘하나 확대 해석이다.’

페일에겐 이쪽의 정체를 추리할 만한 근거가 턱없이 부족했다.

나타나서 멀찍이서 한번 쳐다보고, 반갑다는 듯 손을 흐느적댄 게 전부다.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는데 레시듀의 정체를 어떻게 알겠나?

게다가 시선이 마주했을 때는 제대로 ‘루카스’라고 불러 주지 않았나.

꽈앙!

그때 흙먼지와 아직까지도 가라앉지 않은 화염을 뚫고 두 명의 기사가 나타났다. 전신에 아지랑이를 두른 채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페일도 이제 미소를 지웠다.

그녀는 엘의 검을 다시금 허리춤에 꽂고, 자신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교전.

사방에 검기가 난무한다.

부서진 지면의 파편과 불길이 튀었다.

검들이 한번 마주칠 때마다 천둥소리가 울렸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축이 떨렸다.

이대로 있다간 저 미친놈들의 싸움에 휘말린다.

잠시 고민하던 레시듀가 말했다.

“너, 이 쇠사슬 어떻게 잘라 낼 수 없겠나?”

“…….”

“이봐, 날 봐. 이쪽을 보라고, 이 얼빠진 놈아.”

그 말에 죽음벌레의 시선이 겨우 이쪽을 향했다.

“넋 놓고 있는 수컷은 인기 없어. 정신 똑바로 차려라.”

“하……?”

여전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지만, 잠시라도 주의가 이쪽에 집중됐을 때 빠르게 말한다.

“지금이 찬스다. 네가 매력적인 남자란 걸 어필할 절호의 기회.”

“어떻게…….”

“간단하지. 네가 강하단 걸 보여 주면 된다. 나를 묶고 있는 이 쇠사슬이 보이나?”

“…그래. 보인다.”

이제 비교적 침착해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죽음벌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청기사 날린 어마어마한 일격조차 버텨 낸 쇠사슬이다. 범상치 않은 재질과 특수한 제련법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지.”

거의 부서지기는 했지만, 일단 버텨 냈다는 게 중요하다.

“이걸 네가 끊으면 그녀가 널 다시 볼걸.”

“정말인가?”

“그럼. 이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하겠나.”

레시듀는 대충 형편 좋은 대로 지껄였다.

“자고로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존재에게 호감을 느끼는 법이다. 즉 지금 상황은 하늘이 내려 준 특대 기회라고 할 수 있지. 자. 죽음벌레, 너는 직접 찾아와 문까지 두드리는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는 얼간이인가?”

“아니.”

죽음벌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는 얼간이가 아니야!”

성큼성큼 걸어온 죽음벌레가 주먹을 꽉 쥐더니, 쇠사슬을 내려쳤다.

까앙!

“…….”

그러나 놀랄 만큼 효과가 없었다.

이번엔 쇠사슬을 양손으로 잡고 끊으려 발버둥 쳤다. 이 또한 효과가 없었다. 방금 전 공격으로 제법 내구도가 떨어진 것 같은데 아직까지 이토록 단단할 줄이야. 레시듀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잠시 고민하던 죽음벌레가 말했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쩔 수 없군.”

그그극-

그리 말하며 검지를 쇠사슬에 갖다 댄 순간, 손가락 끝에 작은 구멍이 움푹 파였다. 그곳에서 벌레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수가 많았고, 그것들은 곧 쇠사슬을 뒤덮어 저들의 색으로 물들였다.

사각사각사각사각-

그리고 갉아 먹기 시작한다.

역겨운 광경이었으나, 레시듀의 안색은 그대로였다.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느릿하지만 쇠사슬이 조금씩 갉아 먹혀 사라지고 있었다.

“으음……? 음……! 음…….”

“뭔데?”

“아니. 이 쇠사슬, 확실히 범상치 않은 물건이군. 흡수해서, 해석하면, 쓸 수 있을지도…….”

“…….”

그리고 혼자 드문드문 이상한 소리를 내며 식사(?)에 몰입한다.

레시듀는 잠시 한심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상황에서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아군에게 보낼 시선은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죽음벌레의 쇠사슬 공략은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시간만 있다면 확실히 레시듀를 해방시켜 줄 수 있겠지.

그래, 시간만 있다면.

“…….”

그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다시 한번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투보단 전쟁으로 불러야 될 광경은 점점 절정으로 이르고 있었다. 몸을 거칠게 움직이니 점점 달아오르는 것일까.

철컹!

그 순간 페일의 얼굴을 투구가 감쌌다.

싸움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청기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세 기사의 실체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극소 시간대에 진입했다.’

레시듀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약간의 간격 후에.

───!

굉음轟音, 폭음爆音.

어떤 수식어로도 부족할 만큼 거대한 소리가 지천을 울렸다.

한없이 응축되어 있던 수억 개의 폭발이 쭉 침묵하다, 합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기지개를 켤 때나 들릴 법한 소리였다.

동시에 빛이 사방을 뒤덮었고, 그 속에서 세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명의 기사 모두 성한 꼴은 아니었다. 후두둑, 웬만한 충격엔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갑옷이 오래된 도자기 조각처럼 떨어졌다.

가장 상처가 심한 건 페일이었다. 그녀의 투구는 반쯤 부서져 있었는데, 깨진 투구 안쪽에서 흐르는 핏물이 보였다.

“후우우…….”

페일이 깊게 숨을 토해 내며 아예 투구를 벗었다. 핏물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투구, 실제로 못 쓰게 된 건 아니다.

4기사에게 있어 검과 갑옷은 그 의식의 집합체다. 그들의 육체와 정신이 다시 온전해진다면, 저 무구들 또한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금 나타날 것이다.

“역시 기사 둘은 좀 힘든가. 으음.”

사실 그런 식으로 엄살 부릴 여유가 있는 것도 상대하는 두 명의 기사가 완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기가 없는 적기사와,

아직껏 4기사의 힘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흑기사.

물론 페일도 그 사실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전면전을 택한 걸지도 모르지만.

“슬슬 배고픈데…….”

페일이 배를 툭툭 건드리는 모습을 보고 엘이 말했다.

[조심해라, 이제부터.]

[조심?]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루시드가 반문했다.

페일은 분명 강했다.

그리고 그 강함은, 과거 루시드가 추구했던 종류의 강함과 정반대의 선상에 위치해 있었다.

휘둘러지는 칼날엔 아무런 기교가 없었다. 모든 게 즉흥적이었고 충동적이었다. 다시 말해 예측하기 대단히 까다로웠는데, 보통 정돈되지 않은 검의 강점이란 그 정도였다.

청기사는 달랐다.

저 검은 수련을 통해 만들어진 게 아니었고, 신념조차 담겨 있지 않았는데도 루시드가 겪었던 과거 어떤 검술보다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교전에서 우위를 차지한 건 이쪽이다.

페일의 강함은 두 기사를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엘은 방금 전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처 입은 짐승보다 위험한 게 굶주린 짐승이다.]

[…….]

[이제부터다. 청기사가 귀찮아지는 건.]

시선이 마주하는 것만으로 긴장감이 고조됐다.

열기는 차츰차츰 쌓여 가며 압박감을 증식시켰고, 그것이 절정에 이른 순간 다시 한번 전투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 순간.

절그럭!

“끝났다.”

죽음벌레의 작업이 끝났고, 레시듀가 해방됐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내가 해냈어.”

“그래. 정말 대단하구만.”

“한데 그녀는 나의 이 멋진 모습을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비기닝 위저드.”

“…아. 지금 너한테 오고 싶어서 기사 두 명과 싸우고 있지 않나? 드디어 너의 진가를 깨달은 거다. 어쩌면 그녀 쪽에서 먼저 구애할지도 모르겠는데.”

“아. 그렇군.”

“멋지게 선 채로 맞이해 주라고.”

“조언 고맙다, 친구여.”

레시듀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제 난 어떻게 할까?

떠올린 즉시 해답이 나왔다.

‘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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