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39화
“…잘 모르겠군. 지금 시점에서 이름을 말해 주는 게 중요한 일인가?”
“글쎄요. 다만 ‘멸망의 사도’라고 계속 부르시는 것보단 이야기 진행이 수월하지 않을까 해서.”
“흠. 타당하다.”
반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왕성엔 무슨 볼일로 왔는가?”
“당신의 신하가 말한 대로입니다.”
“경고를 하기 위해서?”
“예.”
반왕이 턱을 쓰다듬었다.
“자네는 스스로를 멸망의 사도라고 밝혔지. 그렇다면 경고란 항복을 권하기 전의 사전작업인가? ‘…반항하면 더욱 고통스러워질 뿐이니,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여라!’ 같은.”
반왕이 연극이라도 하는 듯, 극적인 톤으로 외친 뒤 표정을 바꾸며 싱글싱글 웃었다.
반면 프레이의 태도는 여전히 사무적이었다.
“무언가 잘못 이해하고 있군요. 저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이드(Guide)라고 할 수 있겠죠.”
“가이드? 뭘 안내해 주겠다는 것인가.”
“멸망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요. 충실히 따르신다면 확률이 10배 정도는 오르겠죠.”
그 말이야말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추방자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 되었으나, 어전이라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반왕은 더욱 흥미로운 기색이 되어 말했다.
“자네는 멸망의 사도라고 하지 않았나? 즉 ‘바깥’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적도 아닌 데다, 도움까지 주겠다……. 너무 형편이 좋은 이야기군.”
반왕의 미소가 사나워졌다.
“과인을 얕보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저는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좀 신기하군요. 강자들에 대한 데이터는 이 머릿속에 다 입력되어 있는데…….”
프레이는 약간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제 예상대로라면 이곳에 있는 건 비기닝 위저드였어야 했습니다. 혹시 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과연. 아까 주변을 둘러본 이유는 그를 찾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반왕이 픽 웃었다.
“만나지 못할 거야.”
“당신이 그를 처리했습니까?”
“처리라……. 좀 거칠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군.”
“…….”
잠시 반왕을 바라보던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에고가 느껴지는군요. 당신은 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리 말했잖나?”
“동시에 불완전함도 느껴집니다.”
반왕의 표정이 바뀌었다.
“당신에겐 여러 결함이 보입니다만, 그것에서 애써 눈을 돌리고 있군요. 위험한 상태입니다.”
“…흐음. 무슨 뜻이지?”
“불완전한데도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로 착각하고 있으니, 한 번의 실패조차 견딜 수 없겠죠. 멸망과의 싸움은 패배와 절망의 연속, 당신은 그것에 적합한 인재가 아닙니다.”
프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인재를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저의 가이드가 통용될 만한 인재를.”
“하하. 재밌는 해석, 잘 들었다. 그런데… 과인이 자네를 보내 줄 거라 생각하나?”
반왕의 미소에 살기가 섞였다.
“멸망의 끄나풀인 자네를?”
“제게 해를 끼치는 건 비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안 그래도 희박한 확률이 더욱 사라질 테니까.”
“그렇다면 의도를 분명히 밝히는 게 어떤가? 멸망 출신의 자네가, 왜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거지?”
“간단합니다. 모든 멸망을 조절하고 있는 존재가 그걸 원하니까.”
“멸망을 조절하는 존재라?”
반왕의 시선이 추방자를 향했다.
‘바깥’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추방자였다. 하지만 그런 추방자도 고개를 저었다.
멸망을 조절하는 존재라니?
추방자가 목격했던 멸망은 다섯 개였고, 그것들 간에 명백한 우열은 없었다.
“밖을 경험하고 온 과인의 신하는 그런 것에 대해 모르는 듯한데.”
“그렇겠죠. 그가 목격한 것은 무척이나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니까.”
“저 친구는 과인이 아는 것만 억 번 이상 바깥에 나갔다 왔는데?”
“개미굴에 대해 아십니까?”
뜬금없는 말이었다.
반왕이 의도가 짐작이 가지 않아 고개를 기우뚱했다.
“굴에서 나온 개미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굴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 지극히 한정된 구역만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죠.”
“…지금 그 말을 하는 이유는?”
“억 번, 그 이상 바깥에 나갔다고 해도 저자가 갈 수 있는 구역은 항상 동일한 곳이었다는 겁니다. 그가 발을 들인 곳은 대해大海에서도 접시 물에 불과한 범위였죠. 고작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
밝혀진 진실에 추방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말문이 턱 막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반면 반왕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말이 모두 사실이라도, 자네를 쉽게 보내 줄 수는 없겠는걸. 과인은 모든 걸 혼자 끝내야 해.”
“이해합니다. 당신의 힘은 개인 대 개인의 싸움에 특화된 종류, 누군가가 손을 건든다면 오히려 방해만 되겠죠.”
한순간에 이쪽의 본질 중 하나가 파악당했다.
반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확신했다. 자네는 위험하군.”
“그건 잘못된 판단─”
“아니. 잘못되지 않았어. …어쩔 수 없군. 프레이, 라고 했나?”
반왕이 손을 뻗었다.
“당분간은 얌전히 있어 줘야겠다.”
* * *
짐승의 대리인, 조련사. 그녀의 정체가 베니앙 아르젠토였다.
쉽게 예상할 수 없는 결과였으나, 찬찬히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런 연관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곱 이빨의 용은 짐승과 싸웠으니까. 그것도 상당히 처절하게.
그러니까 문제는… 이 여자가 보내고 있는 서늘한 시선이다.
“…….”
지금의 그녀는 베니앙 아르젠토인가, 일곱 이빨의 용인가.
그 두 존재가 섞인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주체는 베니앙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 시선의 이유는 무엇인가.
루카스의 기억 속 베니앙은 성숙하지 못한 여인이었다. 소심하고, 어설프고, 실수가 잦았던 소녀 같은 여인.
지금은 어떤가.
깊게 침체된 눈동자, 흐트러짐 없는 기도, 그리고 경계심.
어설펐던 소녀가 완연하게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루카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벅차오르는 기쁨과 한 줄기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레시듀에겐 그런 감상을 품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힘들어 보이는군요, 비기닝 위저드.”
[…역시 스승님이셨군요.]
때문에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을 때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하나는 육성肉聲이었고, 하나는 머릿속에서 울렸다.
둘 모두 베니앙의 것이었다.
레시듀는 상대의 의도가 완전히 짐작이 가지 않았고, 목소리를 전할 수단도 딱히 없어서 침묵했다.
…베니앙은 나의 정체를 눈치챈 게 아닌가? 아니면 단순히 이쪽의 반응을 보기 위해 넘겨짚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여자의 속내만큼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대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쇠사슬은 과거의 허왕이 남긴 유물遺物 중 하나, 불완전하지만 구속한 이의 힘을 어느 정도 봉인할 수 있습니다.]
허왕이 남긴 유물이라.
묘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문이었나.
[오늘은 짧게 상태를 보러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
침묵하던 레시듀는, 슬슬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우선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입을 열었다.
“조련사, 내겐 무슨 볼일이지.”
“당신의 부하들이 걱정을 하더군요.”
나의 부하… 아.
알타타와 하이크 말이군. 그러고 보니 그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제가 대신 상태를 보러 왔죠.”
“…왜 네가?”
“그들에겐 면회할 권한이 없거든요.”
[20시간 뒤에.]
베니앙은 그리 말하며 다시 가면으로 얼굴을 덮었다.
[왕성에서 소란이 일어날 겁니다. 반왕은 아마 본격적으로 멸망을 막으러 성을 비운 상태일 테니, 아마 기사 중 한 명이 나서야겠죠. 무기가 없는 적기사 대신 흑기사가 출동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때 제가 사람을 보낼 테니 적기사를 제압하고 탈출해 주세요.]
“…….”
[자세한 사정은 다시 만날 때 설명드릴게요. 스승님, 부디 그때까지 몸조리하시길.]
“보아하니 목숨엔 지장이 없는 듯하군요. 상태는 잘 봤으니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베니앙은 그리 말하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두 명의 기사는 여전히 스산한 시선만을 보낸 채 서 있을 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베니앙이 완전히 떠나고, 홀로 남은 레시듀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일단 속여 넘긴 건가?’
아니. 상황이 가진 특수성 때문에 어영부영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다른 순간에 베니앙의 정체를 알게 됐으면 위험할 뻔했다. 그때도 분명 당황했을 테고, 그건 동요로, 이윽고 미흡한 대처로 이어졌을 테지.
용이 가진 관찰안을 알고 있다. 용이 가진 관찰안을 알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군림자가 가진 관찰안을.
비교적 경험이 부족한 4기사와는 다르다.
놈들이라면, 지금의 레시듀를 관찰하는 것만으로 위화감과 익숙함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언동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텐데…….
‘흠.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갇혀 있을 수는 없지.’
20시간 뒤라.
그때 왕성에 어떤 소란이 일어난다는 거지?
멸망의 2차 습격이라도 벌어지는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멸망의 습격 시기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베니앙이 아무리 대단한 두뇌와 선견적 안목을 갖췄어도 그 시간을 정확히 유추해 내는 건 불가능하다.
의문 또 하나.
베니앙이 보낸다는 사람은 누구일까?
“…….”
진짜 생각할 것투성이인 인생이군. 레시듀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제 보니 루카스의 신중한 언사와 꼼꼼한 재고再考는 선천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야 이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면 누구라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겠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레시듀는 눈을 감았다.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체력 비축이다.
* * *
다시 한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이번엔 의도적으로 수면을 취한 것이라, 의식의 한 부분만큼은 여전히 깨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10시간 눈을 붙였나.’
몸 상태가 조금 호전된 것 같다.
베니앙이 언급한 사건 발생 전까지 이제 10시간. 그때까지 꾸준히 휴식을 취하면, 데미갓의 권능을 쓸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될 것 같다.
그런데도 쭉 눈을 붙이지 않고 정신을 차린 이유는 간단하다.
또 다른 면회자가 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누군가 앞에 서 있다. 레시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사실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얼굴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대하는 것처럼 툭 건드리기만 할 뿐, 그 이상의 접촉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아버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디 트로우맨인가.
레시듀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목소리는 내뱉는 일은 그 이상 없었다. 쭉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으니, 얼마 안 가 세디가 떠났다.
자의는 아니었고 기사들이 무형의 압박을 주었기 때문이다.
레시듀는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여러 이들이 리스크를 감수하며 찾아온다.
가면 속 너머의 존재가 루카스인 게 확실한 것도 아닌데, 다만 그일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녀석이 가졌던 인망이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정말로 이게 네 최선이었나, 루카스?’
내게 모든 걸 맡기는 것이.
‘…….’
현시점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레시듀는 다시 회복을 위해 잠에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
[…….]
두 명의 기사가 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베니앙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보다 훨씬 더 공격적인 기세가 방출됐다.
입구 너머의 새카만 동굴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척이 느껴졌다.
터벅터벅, 새카만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안녕들 하세요!”
소름 끼치는 기척과 상반되는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레시듀 또한 전신을 긴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단언컨대 가장 위험하고, 피해야 할 존재였다.
최근까지 루카스와 함께했었고, 그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짐승 이상의 예리한 감각과, 괴물 같은 강함을 갖춘 존재.
반왕보다 훨씬 까다로울 게 분명한 여자.
“여기 있었네.”
청기사 페일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