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37화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허의 세계엔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 현상이었다. 바람은 시원하다기보다 기분 나쁜 느낌을 줬으나, 반왕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그것을 느꼈다.
바람이 멎을 때쯤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천세계의 절반이 사라지며 생긴 업.”
레시듀가 자신의 가면을 툭툭 건드렸다.
“이 가면과 같이 ‘바깥’에서만 접할 수 있는 미지의 물질, 거기에 허의 세계에서 얻은 재료들과 강자들의 데이터를 더했다……. 그것들을 토대로 탄생하게 된 거지. 최종, 최대, 최강의 병기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듯한 말투였으나, 반왕은 흐릿하게 웃었다.
“정말 잘 알고 있군. 비기닝 위저드에게만큼은 과인에 대한 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방금 꺼낸 말들은 자네가 추측한 것인가?”
물론 그렇다.
단순한 추측에 진실에 근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약 스스로가 ‘제조자’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반왕을 만들었을지 손에 잡힐 듯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고.
과거 레시듀는 이 안건에 대해 누구보다 깊고 오래 고민했다. 그때는 결국 소재와 인재의 부족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쉬운 일이다. 레시듀 또한 현재와 같은 시점에서 이 계획을 떠올렸다면 반왕 정도의, 어쩌면 그 이상의 병기를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반왕이란 존재……. 그래. 어쩌면 너라면, 하나의 멸망이라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은 레시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 표현이었으나, 반왕의 표정엔 딱히 기꺼운 기색이 없었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당연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거다.
“하지만 사정은 달라졌다. 멸망은 약체화됐고, 철저히 분리된 채 동시다발적 출현을 보여 줄 것이다. 적의 위협거리가 질이 아닌 양이 됐단 거지. 아무리 네가 대단해도 혼자서 모두 막아 내는 건 불가능해.”
“한 손으로 열 손을 당해낼 수는 없단 건가?”
“너를 덮칠 손은 고작 열 개가 아닐 거다.”
“그래서? 자네의 말대로 삼파전이라도 펼치잔 건가? 후후! 그거야말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지.”
반왕이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멀찍이 펼쳐진 사막을 눈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대화란 좋군. 상대의 관념을 이토록 뚜렷하게 느낄 수 있으니.”
“나에 대해 파악했다는 거냐.”
“자네의 시야는 너무나 고고해.”
좋은 의미가 아니란 것쯤은 얼간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우주의 명운이 걸린 일이니,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자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스스로 살 구멍쯤은 직접 마련해라’, ‘끝없이 투쟁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만 비로소 맞설 권리가 허락될 것이다…….’”
투명한 눈빛이 레시듀를 향했다.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너무 가혹해. 무지한 자들은 소멸이나 멸망의 참된 뜻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부나방에게 불길의 뜨거움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아.”
“…….”
“자네는 정말 다른 십이허주보다 훨씬 강할 수도 있겠군.”
“싸우지도 않았으면서 그걸 알 수 있나.”
“식견만 들어도 대강 감이 오지. 강한 자일수록 뒷일을 오래 생각하는 법이니까. 알고 있는가? 약자일수록 보다 현재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 그들의 가장 큰 시련은 죽음이나 소멸 같은 게 아닌, 당장의 끼니 걱정이지.”
레시듀가 침묵했다.
“자네가 일으키려는 대전장의 피해자들은 그런 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할 테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허의 세계와 삼천세계엔 분명 약자들이 존재했다.
아니, 약자들의 존재가 훨씬,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다. 언제나 세상은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들에게 지옥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공포를 멸망보다 훨씬 두려워하고 있겠지. 그리고 과인의 눈앞엔, 그 전쟁을 더욱 부추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악의 화신이 있군.”
마지막 목소리엔 웃음기가 조금 섞여 있었다.
레시듀는 입 끝을 차갑게 말아 올렸다.
“무지無智한 자들이 대다수니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아하하. 그럴 리가. 과인은 다만 상황을 정리한 것뿐이야.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말이지.”
레시듀는 객관적이란 말을 싫어했다. 인간이 입에 담는 이상 성립할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왕이 레시듀와의 대화에서 그의 관념을 느낀 것처럼,
레시듀도 반왕과의 대화에서 그녀의 관념을 깨달았다.
“알겠다. 네가 바라는 바를. 우리에게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겠어.”
중얼거리듯 내뱉고 등을 돌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러. 너의 말을 빌리면, 전쟁 조장이 되겠군.”
“하하. 보내 줄 것 같은가?”
“보내 주지 않으면?”
레시듀가 다시 반왕을 바라봤다.
“힘으로라도 막을 생각이냐?”
“음. 그러지.”
목소리가 완전히 끝마치기 직전, 레시듀는 뒤를 향해 다섯 발자국 물러났다. 후웅!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레시듀가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무엇으로 공격한 거지?
방금 스치고 지나간 공격의 원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십이허주에겐 손대지 않는 게 아니었나?”
“그런 귀찮은 제약은 과인에게 없어.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왕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크큭. 스스로 선택이라.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냐. 가련하기 짝이 없는 왕님이시군.”
레시듀가 양손을 펼쳤다.
파지직, 뇌전이 손가락 끝에 맺혔다.
“신하는 아니지만, 꼴이 좀 우스우니 찬물을 좀 뿌려 줘야겠어.”
* * *
거대한 운석에 치인 것 같다.
꽈앙!
물론 실제로 운석에 치여도 이렇게 맥없이 몸뚱이가 날아가지는 않겠지만.
그러니 저 주먹에 담긴 파괴력은 운석을 한없이 초월하는 수준으로 봐야 한다.
꽈과광, 공격이 노도처럼 이어졌다. 레시듀의 몸은 태풍을 맞이한 허수아비처럼 흔들렸다.
“왜 그러나? 듣기로 자네는 일대일에 있어선 무적에 가까운 존재라고 하던데, 과인이 전달받은 정보가 왜곡된 건가?”
반격을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다.
다만 모든 공격을 출수하기도 전에 읽혀서 제지당했다.
애초에 이 초생물의 제조목적의 근간은 전투에 있었다.
가장 막강한 개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또 하나의 개인.
설령 일대일이란 조건하에선 무적에 가까운 힘을 가진 마크 트로우맨이라도, 반왕을 상대로 승기를 가져올 순 없을 것이다.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텐가. 탐색전이라면 애초에 끝났다. 이 이상의 유효타는 위험할 텐데.”
“…….”
“왕성을 보거라, 비기닝 위저드.”
왕성?
그런가. 어느 사이 그들의 전장은 왕성의 지붕이 아닌 사막으로 바뀌어 있었다. 반왕의 공격을 몇 번 허용하자 몸이 포탄처럼 날아갔기 때문이다.
“허주들과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지만, 저들의 역할은 구경꾼이야. 이 싸움에 끼어들 자격은 없다.”
“…….”
“마지막 기회다. 전력을 다하도록.”
평온한 목소리와 함께 공격이 이어졌다.
몸뚱이에 상처가 늘어났다.
피를 쏟는다. 내장이 꼬인다. 부서진 이빨 조각을 뱉는다.
…그 무엇 하나 나의 것이 아닌 것들.
압도적인 폭력은 몇 분이고 이어졌다.
레시듀의, 아니.
루카스의 몸이 철저히 파괴당한다.
그제야 반왕이 가진 힘의 실체가 조금 보이는 것 같다.
체급이 다르다. 이 경우엔 수준이 다르다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일까.
범인의 관점에선 무량대수에 가까운 가능성이 함축된 존재가 바로 반왕이다.
레시듀는 알고 있다.
존재를 압축시켰을 때 가지게 되는 포텐셜에 대해 알고 있다.
다름 아닌 루카스가 보여 주지 않았나? 폐기장에서, 수많은 ‘루카스’를 먹으며.
하지만 반왕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완전히 개별적인 존재들,
종족도, 특징도, 습성도, 성격도, 근간도 다른 것들을 한데 섞었다.
아마 제조 과정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폭발이 일어났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그리하여 완성된 육체.
그것에 담긴 힘은 원초적일 만큼 단순하다.
‘강하고, 빠르며, 똑똑하다.’
하지만 싸움에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나?
반왕과 레시듀 사이에 놓인 간극은 마음이 꺾일 만큼 넓었다.
“…….”
공격이 멈췄다.
레시듀가 무릎을 꿇은 시점이었다.
반왕이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다 내뱉었다.
“그렇군. 반격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단순히 못 하는 거였나.”
“…….”
“자네는 과인의 공격을 제대로 포착하지도 못했다. 그야 반항 못 하는 게 당연하겠지. …솔직히 실망스럽군. 비기닝 위저드의 힘이 이토록 형편없을 줄이야.”
정확하다.
“이제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은 하나다. 자네는 이기지 못할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싸운 거지?”
“싸움은 네가 걸지 않았나.”
“도화선은 과인이 붙였지. 하지만 이 상황을 의도한 건 자네였어.”
레시듀는 스스로를 내려다봤다.
당당하게 싸움을 걸고서, 한 대의 유효타도 입히지 못한 채 쉴 새 없이 얻어터진 남자의 꼴사나운 모습을 내려다봤다.
“…강하군.”
“…….”
“나에 대해서 모든 게 미지수였을 터. 그런데도 아무런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싸웠다. 확실히 최종병기란 이름이 아깝지 않은 활약이었어.”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과인 혼자서 모든 걸 끝낼 수 있다고.”
“큭큭큭. 그래… 혼자…….”
레시듀가 피를 흘리며 웃었다.
“하지만 너를 개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뭐?”
“추방자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 정도 멸망에 대해서 알아챈 것 같군. 너 같은 존재를 양산하지 않고, 단 1체만을 만들 생각을 했으니까.”
“…….”
“하지만 넌 개인이 아니야. 그렇게 불릴 수도 없어.”
“…과인이 짊어진 업의 개수가 문제 될 거라 생각하나? 여러 인물의 희망을 등에 업고 싸우는 자들은 흔하지 않나.”
“영웅이란 말로 부릴 수 있는 무보수노동가들 말이군. 아쉽지만 접근이 틀렸어.”
“그럼 과인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방대한 재료가 문제가 되나? 혹은 추방자가 음습하게 훔쳐낸 십이허주의 전투 데이터가 걱정되는가. 그것들로 인해 과인의 인격에 분열이라도 생길 거라 생각하나?”
전혀 다르다.
한참이나 잘못 집고 있다.
눈앞의 여인은 똑똑하지만 현명하지는 않다. 경험의 부족함이란 전수받은 지식이나 정보로는 얻을 수 없겠지.
“내가 말하는 건, 쿨럭. 의도다.”
“의… 도……?”
반왕이 두 눈을 깜박였다.
마치 그 단어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뜻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다.
“…개인이란 단순히 숫자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개념적인 차원의 이야기인가?”
후우우…….
레시듀가 깊게 숨을 내뱉었다. 흐르는 피를 대충 닦고 일어났다.
“비슷하지만 다르니, 부디 경청하시기를, 전하.”
이 비아냥거림은 아무리 반왕이라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의 이마가 슬쩍 찌푸려졌다.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군.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확실히 말하도록 해라.”
“네겐 주체의식이 없다. 섞인 타의의 집합체, 불순물 덩어리라고 할 수 있지. ─즉 순수성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다.”
“뭐?”
“근본도 없고 역사도 없다. 넌 분명 강하지만 그게 전부지.”
“근거가 빈약하다. 과인에게 있어 강한 게 전부란 말은 오히려 칭찬이야.”
“…지금부터 네가 싸워야 할 멸망들. 그걸 통제하고, 지휘하는 존재는 철저함의 화신 같은 자다. 나조차 파악할 수 있는 너의 약점 같은 건, 놈 입장에선 손바닥 위에 펼쳐진 것처럼 훤히 들여다보이겠지.”
“익살스런 말을 해주는군. 허나 과인에겐 약점이 없다.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네가 스스로의 강함을 주장하는 방식은 그것뿐인가? ‘강하게 만들어졌으니까, 나는 강하다?’, 큭큭큭. 코흘리개 꼬맹이의 주장도 그보단 설득력 있겠군.”
반왕의 얼굴이 다시 바뀌었다.
찌푸렸던 이마를 펴고,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말한다.
“자네의 목적은 과인을 화나게 만드는 것인가?”
“내가 너를 보았을 때 무엇을 느꼈을 것 같나? 기사를 복종시키고, 허주를 압도하고, 멸망을 죽인 순간 말이다.”
“…….”
“기대와 안심, 그리고 환멸을 동시에 느꼈다. 이자라면 정말 모든 멸망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로부터 오는 안심. 달콤한 독 같더군. 이 몸이 한 일생일대의 결심조차 무뎌지게 만들었으니까.”
반왕은, 존재만으로 주변인들의 발전을 저해한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토록 강한 반왕이라도 혼자선 밀려오는 멸망을 막아 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면 어쩔 텐가.”
“싸워야지. 그게 유일한 방법이니.”
“이기지 못할 텐데.”
“아니. 넌 이 싸움에서 패배감을 느끼게 될걸.”
반왕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자네를 납득시키는 건 힘든 일인 것 같군. 시간도 없으니, 제압에 성공하면 감금이라도 시켜 둬야겠어.”
대화는 끝났다.
레시듀는 서서히 다가오는 반왕을 보며 예감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처참하게 패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