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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32화 (659/857)

외전 432화

강자란 제조製造할 수 있는 것인가?

단언컨대 그 화두에 대해 레시듀보다 오래, 그리고 깊게 고민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노력이라는 단어와 무관계한 삶을 살아왔으나 단 한 가지에서만큼은 아니었다.

실패를 경험하기 위한 노력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결국엔 성공할 것이라도, 어떠한 일에 도전하기에 앞서 실낱같은 두려움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자의 공포를 이해하고 싶었다. 불안감이 무엇인지, 한 번이라도 좋으니 실감했으면 했다.

그러한 감정의 단락이라도 느끼게 해줬던 존재들.

어쩌면 레시듀에게 유일하게 실패를 경험케 해줄 수 있는, 자신과 동격의 존재가 몇 있었으나 도무지 그들을 적으로 여길 수는 없었다.

그건 녀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겠다.

애초에 근본이 같았고, 본질이 동일했다. 군림자들은 모두 신의 무기였다.

형제나 자매라는 말로도 부족한, 원래가 하나였던 존재란 뜻이다. 그야 투쟁심 같은 게 피어날 리가 없겠지.

…군림자란 존재가 탄생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무료함을 채워 나갔다.

태양거인은 자신의 내면과 싸웠고,

마왕은 보다 완벽히 군림하는 것에 집착했으며,

용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우주의 미지未知에 깊이 몰두했다.

그리고 천둥우레의 뇌존은─ 여전히, 싸울 상대를 바랐다.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싸울 존재가 없다면,

내 손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 * *

[너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더냐?]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가라앉는 자’라는, 다소 난해한 이명을 가진 존재.

직접 출석하지 않고 스스로의 사념과 같은 영체만을 보낸 자.

그것이 내는 소리는 음성보단 울림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듣기 좋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삼파전이라면 세 개의 세력이 서로 싸운다는 뜻이렷다. 지금 같은 상황에 적합한 표현인지 의문이다.]

가라앉는 자의 말투는 의외로 가볍고, 경박했다.

레시듀는 그의 희끄무레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픽 웃으며 말했다.

“적합하고말고. 이미 지금 두 개의 세력이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나.”

차갑게 들릴 수도 있는 말에 다시 세디가 끼어들었다.

“전쟁을 막을 생각은 없어 보이네. …아니.”

새빨간 눈동자가 좁혀졌다.

“오히려 부추기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목소리에 희미하게 섞인 의심.

전쟁행위를 방조傍助하는 것, 루카스라면 결코 저지를 리 없는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상했던 바고, 또한 틀리지 않은 판단이다.

분명 루카스라면 이러한 참상을 외면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사람은 변화한다. 그리고 변화란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일어나진 않는다.

고향 우주에서, 삼천세계에서, 허의 세계에서─

루카스가 살아가며 겪었던 변화들은, 레시듀조차 모두 정확히 알지 못할 정도다.

그러니 세디 또한 당연히 모를 것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위대한 필드에서 헤어지고 난 이후, 녀석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그로 인해 생긴 가치관의 변화와─ 끝내 바뀌지 않았던 것도.

루카스는 변했다. 그러니 레시듀도 모든 언행에 연기로 임할 필요는 없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건 하나다.

꺾이고, 부서지고, 주저앉고, 절망하고.

그럼에도 바뀌지 않았던, 루카스란 존재를 구성했던 가장 중요한 핵심적 요소.

“부족하다.”

“뭐?”

“4기사, 십이허주, 군림자, 절대자들…….”

“…….”

“그 밖에 존재하는, 나조차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자들 모두를 감안해도 턱없이 부족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강자强者가 부족하다는 거다.”

이건 세디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레시듀는 허의 세계에 있는 열한 명의 군주를 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곧 들이닥칠 멸망들. 나는 그것과 대적하기 위한 강함의 최소 조건을 허주로 측정하고 있다. 너희 정도는 되어야 그것을 상대로 버티기라도 할 수 있단 거지.”

오만한 말에 허주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레시듀는 말을 잇기에 앞서 약간의 간격을 뒀다. 이 발언에 어떤 형태로든 개성 있는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다면, 그 태도를 관찰하고 싶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헛된 기대였다. 허주들은 안색만 바꿀 뿐, 섣불리 입을 떼는 녀석은 없었다.

겁쟁이들. 아니, 과할 정도로 신중한 건가? 사실 차이점을 모르겠지만.

레시듀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확실히 말해서, 곧 있을 싸움에 허주보다 약한 존재는 그 수가 만萬이든, 억億이든 하등 쓸모가 없어.”

“…….”

“…….”

레시듀는 결론까지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이곳에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 이해했겠지. 전쟁을 방조, 혹은 방임하는 이유에 대해서.

우주의 역사를 거슬러도 가장 끔찍하고, 거대한 규모의 전쟁. 다시 말해서─ 전무후무한 시련.

이 전란의 업화 속에서, 허주에 버금가는 존재들이 연이어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생명이 사라질 거야.”

세디가 낮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녀 또한 생명들의 무분별한 죽음에 애틋함을 가질 만큼 따뜻한 성정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형식적인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그게 전부. 수십만, 수백만의 생명의 소멸은 그녀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루카스가 비슷한 결론을 내는 건 이상하다. 그런 건 루카스답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군.’

레시듀의 의도대로다.

딱 그 정도 위화감을 느끼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어차피 모든 게 끝난다.”

“…….”

“말했을 텐데. 이건 우주적인 규모의 발버둥이라고. 막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돼.”

“하지만…….”

“너는 삼천세계의 출신이기도 하지.”

레시듀의 말에 세디가 흠칫하며,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그럼 구체적인 방안을 말해 봐라. 어떻게 막을 것인지.”

“…….”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단순하다. 삼천세계와 허의 세계, 각각 다른 세계의 주민들이 상대에게 갖고 있는 증오심이 원인이지. 그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 따위보다 훨씬 근원적인 것이다. 나로선 그걸 억제하거나 제어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러니 네게 묻겠다. 그 증오를 잠재울 방법이 있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시듀는 실망감조차 느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억지로 막으려 들면 이쪽도 피해를 각오해야 할 거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전개가 있다면 그것이겠지.”

그 과정에서 십이허주 몇몇이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최악이란 말로도 부족한 꼴이 된다. 얄궂은 일이지만 이 쓰레기장에 군림하는 열두 명의 군주야말로 멸망방어전의 핵심이니까.

레시듀는 가만히 세디를 바라봤다. 압박하거나 관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혹시 그녀라면, 자신이 생각 못 한 다른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닫힌 입술은 한참이나 열리지 않았다.

레시듀가 슬슬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목소리가 익숙해.”

착각이겠지.

지금 레시듀는 노인의 가면을 쓰고 있다. 내뱉은 목소리 또한 루카스의 것과는 거리가 멀 터.

“그런데 하는 말은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아.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좀 더.”

“…….”

끝맺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얀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가려져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으나, 꾹 다문 입술만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왜…….”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잠시 흘러나오다 끊겼다.

레시듀는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간단하다. 사상 최악의 시련 속에서, 얼마나 뛰어난 인재들이 나타나는지. 그들과 교섭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멸망이 출현하면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피투성이가 된 채 다투던 두 마리의 늑대도, 사자의 갑작스런 출현엔 협력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동일한 흐름일 것이다.

[재밌는 해석이군……. 하지만 당대의 비기닝 위저드여… 전제부터가… 잘못됐다…….]

추방자가 끼어든 건 그 순간이었다.

“전제?”

[애초에… 우주에 의지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지 않은가……. 지금 벌어진 일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군……. 그저 현상에 불과한데…….]

“…….”

[그리고… 이 허의 세계에… 얼마나 많은 영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이 세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뻗어져 있다고… 생각하나…….]

그야 모르지.

비기닝 위저드가 준비한 서류에도 그런 건 적혀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모른다…….]

“…….”

[알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깊은 지식을 갖췄든… 대담한 추진력을 갖췄든… 그것들을 바탕으로… 철저히 조사에 임해도… 이 세계엔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추방자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아주 깊고, 긴 심호흡이었다.

“─미지未知의 부분이 존재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미지는 허의 세계의 근본이다. 그리고 지금, 그 영지들을 배경으로 전쟁이 일어났지.”

“삼천세계와의 전쟁.”

레시듀는 추방자의 말을 받으며, 일곱 이빨의 용을 떠올렸다.

미지.

그녀도 비슷한 말을 자주 했었지.

“애초에 전제가 잘못됐다는 거다. 그대는 왜 멸망을 적敵으로 규정짓나? 맞설 방법이 없다. 대응책이 없다. 기도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재앙災殃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멸망은 어떻지?”

추방자의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걸 재앙조차 아닌 멸망이라 불렀다고 생각하나?”

추방자는 떠올렸다.

‘바깥’으로 나갔을 때 느꼈던 해방감을, 일탈감을, 물질계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느꼈던 자유로움───

──을, 아득히 초월했던.

공포.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것과 마주한 순간, 우린 사라질 수밖에 없단 말이다.”

열기 띤 목소리엔 이제 광증이 일렁였다.

“삼파전? 전투, 전쟁이라고? 흐하, 흐하하하……. 비기닝 위저드여, 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넌 그것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딴 말을 지껄일 수 있는 것이다.”

저 말은 진실이다. 결국 레시듀는 멸망을 두 눈에 담지 못했다.

모든 건 루카스에게 전해 들은 것뿐.

하지만.

“아까 말했을 텐데? 네가 본 게 틀렸다는 게 아니야. 그 이후에 변화가 생겼다는 거지. 멸망은 철저히 나뉜 채로 들이닥친다. 우리가 대응할 수 있도록, 충분히 그 몸집을 줄인 채로.”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하는 것인가.]

기계음 섞인 목소리는 회담이 시작되고 처음 듣는 것임이 분명했다.

퓨쳐릭스.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기계의 육체를 빌린 존재가 말을 이었다.

[추방자가 목격했을 때만 해도, 멸망은 분명 다섯 가지 형태였다. 그랬던 것들이 어째서 갑자기, 우리가 맞설 수 있을 만큼 나뉘어 들이닥친다는 것이지?]

“그렇게 만든 존재가 있으니까.”

[그것이 누구냐.]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예 지어내면 의심을 사거나 언젠가 들통나겠지.

그래서 레시듀는 생각해 둔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선대 비기닝 위저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실 섞인 거짓말이지만.

“…그렇군.”

추방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됐다. 무의미한 논쟁의 시간이었군.”

레시듀가 확연한 위화감을 감지한 건 이 순간이었다.

십이허주 몇몇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무척이나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레시듀의 뒤를 향했다. 그가 입장했던 문 쪽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율자 따위가 아니다, 루카스 트로우맨. 그 자리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겠지. 안심해라. 너를 그 책무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오셨다.”

온다고?

달리 누가?

이미 십이허주는 이곳에 모두 집합해 있지 않나.

뚜벅-

그 순간 레시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도, 무척이나 또렷하고 정확하게 귀까지 닿았다.

좌중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어서지 않은 허주들도 문 쪽을 바라봤다. 레시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존재감은…….’

십이허주를 가볍게 상회하는 존재감이다.

결코 무시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끼이익-

문이 열렸다.

철컹, 메마른 금속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은, 과연 레시듀의 예상대로였다.

─왕성의 4기사.

뜻밖인 건, 역시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는 사실이다.

죽음의 흑기사가 이곳에 있다는 건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가 알고 있었겠지. 다름 아닌 그를 되살렸고, 주인을 자처하는 디아블로가 이 자리에 있지 않나.

하지만 다른 기사는 아니다.

‘적기사.’

레시듀가 알기로, 설원에서 태양거인과 공투하고 있어야 할 존재.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장소를 떠나지 않았던 기사.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거지?

…하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건 그게 아닌 건지도 모른다.

‘한 명 더 있다.’

바깥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은 셋이었다. 그건 레시듀의 표정이 굳은 이유기도 했다.

왜냐면,

앞에 모습을 드러낸 두 명의 존재감이 작게 느껴질 만큼, 나머지 한 명의 존재가 훨씬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기사라면 아직 둘이 더 있다.

백기사, 그리고 청기사.

하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나머지 기사와 대동소이한 정도다. 결코 기사 둘을 압박할 기백을 내뿜을 수는 없었다.

힘을 억제하고 있어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뚜벅-

잠시 멈췄던 발자국 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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