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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스토리-5화 (650/857)

사이드 스토리 5화

화산의 운해각은 오롯이 장문인을 위한 공간이었다.

물론 양인현이 장문인이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으나, 우선은 그 관습을 어기지는 않고 있다. 하나 누군가 그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겠지.

양인현은 때때로 자신의 모순성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세력의 수장 자리에 앉아서, 난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내게 있어 화산이란 대체 무엇인가.

봉우리 아래로 펼쳐진 초목들을 보고 있자면, 그런 공허한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에 대한 고찰을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손님이 왔기 때문이다. 이 무례한 손님은 운해각에 흙발로 침입한 채, 뻔뻔히 고개까지 쳐들고 있었다.

무례를 지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당장은 그러지 않았다. 그를 부른 게 자신의 의사였기 때문이다.

조르륵-

찻물을 따랐다. 물론 대접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부르긴 했지만, 찻물을 따라 줄 정도로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어제 사막 한가운데서 호수를 발견했다.”

그리 말문을 뗐으나, 손님에게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양인현은 조급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영지로 들어간 게 아니다. 환각에 빠진 것도 아니었지. 허의 세계의 서쪽 지역, 가장 척박하고 공허한 그곳에 호수가 있었다. 당장 마셔도 될 만큼 맑았고, 주변엔 드문드문 풀잎까지 자라나 있더군.”

[…….]

“변화는 대지에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형형색색 빛나는 하늘도 새카맣게 물들더군. …마치 밤을 되찾은 것처럼.”

탁자엔 찻잔 이외에 그릇도 하나 놓여 있었고, 말간 빛깔을 띠고 있는 죽이 담겨 있었다.

─음식.

허의 세계엔 존재할 수 없는 것.

양인현은 죽을 한 숟갈 떠서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반년 만에 먹는 잡곡죽의 맛은 썩 나쁘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면 맛보단 그리움이 더 크게 다가왔지만.

죽을 삼킨 다음, 양인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존재에게 시선을 보냈다.

[차를 대접하려고… 부른 건 아닌 듯하군……. 매상검…….]

‘전 우주의 추방자’는 허리를 굽힌 채 앉아 있었다.

성인 남성의 2배를 웃도는 체격이다. 개축한 운해관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 똑바로 선다면 어깨가 천장에 닿을지도 모르겠다.

“너라면 이유를 알 거라 생각했다.”

[과연… 그런 이유인가…….]

“실망이라도 했는가.”

[그럴 리가……. 오히려 다행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사이가… 이토록 원만해진 줄 알았지 뭔가…….]

어울리지 않게 농담을 입에 담는다.

그 모습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는 한편, 입에선 날카로운 대꾸가 나갔다.

“칼부림을 바란다면 응해 주지. 내 의문이 해결된 다음이 되겠지만.”

잠시 침묵하던 추방자의 입에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각각각……. 각각각각…….]

양인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소름 끼치도록 불쾌한 소음이 웃음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한참이나 기괴하게 웃던 추방자가 손을 내저었다.

[됐다……. 이제는… 그럴 때가 아니니까……. 지금부터 나는… 힘을 비축해야 한다…….]

“왜?”

[삼천세계와… 허의 세계가… 합쳐지고 있으니까…….]

양인현이 멈칫했다.

추방자의 말은 물음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라곤 볼 수 없었지만, 쉽게 흘려 넘길 수 있는 발언도 아니었다.

합쳐진다니, 무슨 뜻이지?

단순한 비유인가? 아니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고 있자, 추방자가 말을 이었다.

[의문이 들겠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다가올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서… 신적인 존재가 설정한… 안배인가……? 모든 존재가 힘을 합쳐서… 재앙을 막아내길… 원하는 것인가……?]

추방자의 말은 곧 혼잣말, 중얼거림이 되었다.

그의 안색이나 눈빛에서 의중을 읽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양인현은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많은 절대자가… 이 사태에… 여러 해석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단언하건대, 모두 틀렸다……. 그리고 나는…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지…….]

그 순간 추방자의 오른팔에 기이한 빛이 아른거렸다.

양인현은 왠지 그 현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준비과정에 불과하다……. 작디작은 욕조엔… 손가락조차 담글 수 없으니까……. 그 크기를 넓힐 필요가 있는 거지…….]

십이허주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바로 추방자였다. 통칭 ‘떠돌이’로 분류되는 허주들이 전부 그렇지만, 추방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수수께끼에 쌓여 있었다.

때문에 그가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게 놀랍지는 않았으나, 지금 꺼내는 말들은 그 정도가 심했다.

양인현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는다.

놈의 목소리에서 아른거리는 광기.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공포를 보았기 때문이다.

“뭘 두려워하고 있나?”

추방자의 강함은 양인현이 가장 잘 안다. 놈과는 벌써 몇 번이나 겨뤘다.

그는 양인현에게, 십이허주란 존재가 자신과 대등하단 걸 인정하게끔 만든 존재였다.

[멸망……!]

“…….”

[알겠나… 매상검……. 너는 이후부터… 나와 함께… 움직이도록 해라…….]

“이유는.”

[왕을 알현하는 데… 네가 필요할 것 같으니까…….]

“…왕?”

허의 세계에서, 왕이란 단어가 가리키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허왕의 자리는 비어 있을 텐데…….”

[너도… 그렇게 여기는가…….]

“…….”

허왕이 실재하고 있다고?

양인현은 선뜻 믿을 수 없었지만, 추방자의 말을 거짓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거절한다.”

그래도 우선 그리 말했다.

“우선은 말이지.”

[그 말은…….]

“그 전에,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지 않나.”

[…십이허주 회담.]

양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좋다……. 그 의견엔 찬성하지……. 마침 새 비기닝 위저드에게… 전할 말도 있으니까…….]

“잠깐. 무슨 소리지? 새 비기닝 위저드라니…….”

[뭘 놀라는 거냐……. 넌 이미 그와 만났지 않나…….]

“…….”

추방자는 이름까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인현은, 돌연 나타나 돌연 사라진 마법사를 떠올렸다.

─루카스 트로우맨.

그 남자가, 비기닝 위저드가 된 건가?

[그 남자야말로… 열쇠겠지…….]

추방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군림자의 관점에선 그보다 나은 표현을 찾을 수 없는 존재.

체격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한 톨 먼지와 큰 차이가 없는 미물.

그런 벌레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눈동자에 아무런 공포와 경외도 품지 않은 채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검은 가시의 마왕에겐 이 상황을 막을 수단이 무수히 있었고, 과거 셀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했다.

눈을 파버리거나, 척추를 끊어 버리거나, 고개를 꺾어 버리거나……. 마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살인 방법의 수만큼이나 많은 해결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

그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눈앞의 벌레를 짓밟지 않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것인가, 용?]

이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원래는 자신과 동등한 힘을 가졌던 전前 군림자라는 사실은 단 한 가지뿐이었으나,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베니앙이에요.”

베니앙은 우선 자신의 정체성부터 정정해 줬다.

마왕은 실소를 숨기지 않았다. 저 존재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이름이군.]

그러니 일견 무례해 보이는 이 언사 또한, 마왕에겐 나름대로의 긍정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말씀하신 기억은, 네. 조금은 돌아왔어요. 덕분에 당신의 본체가 있는 이 우주로 올 수 있게 됐고요.”

[단순히 기억을 되찾았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지. …삼천세계의 절반이 넘게 사라졌고, 나머지 모든 우주는 하나로 합해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각 우주 간에 형성되어 있던 경계의 벽도 허물어졌지.]

“덕분에 우주 간 이동의 난이도도 현저히 낮아졌죠.”

베니앙은 마왕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주 간 이동의 난이도가 현저히 낮아졌고, 결과적으로 약화된 지금의 베니앙도 이곳에 올 수 있게 됐다.

마왕은 약간의 침묵 후에 말했다.

[그렇다면 미리 말하지. 나는 네게 ‘이빨’을 돌려줄 생각이 없다.]

“…….”

[물론 내게 이 이빨이 커다란 가치를 갖는 건 아니다. 다만 수중에 들어왔을 때 생각했지. 네가 나와 동급의 힘을 되찾지 않는 이상, 결코 돌려주지 않을 거라고.]

모순된 조건이다.

베니앙이 용으로서의 힘을 되찾으려면 이빨이 필요한데, 그 정도의 힘이 없다면 이빨을 줄 수 없다니.

[설마 그 정도 각오도 없었던 건 아니겠지? 너는 우리가 했어야 할 가장 조심스런 도전에 섣불리 임했고, 결과 그 꼴이 됐다. 그리고 나는 약자에게 발언권을 허락하지 않아.]

불합리한 선언을 듣고도 베니앙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착각하고 있으시군요. 저는 이빨을 요구하러 온 게 아니에요.”

[호오…….]

예상 밖의 대답에 마왕이 처음으로 흥미를 드러냈다.

[그럼 무슨 용무지? 앞서 질문보단 신중히 대답하길 바란다. 너의 존재는 내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키지……. 나와 같은 영역에 군림하던 자의 격락된 꼴을 바라보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거든.]

아마도 베니앙이 지금부터 꺼내는 말이 마왕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마왕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죽일 것이다. 혹은 죽는 것보다 끔찍한 꼴로 만들겠지.

그럼에도 베니앙의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 가지 예언할게요. 당신은 자신의 손으로 제게 ‘이빨’을 돌려주게 될 거예요.”

[…나의 의지로?]

“네.”

[…….]

마왕은 침묵했다.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었는데도 비웃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다만 차분히 가능성을 고려했다.

베니앙의 말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대체 어떤 상황이 조성되어야 할까.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 제가 허의 세계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

[패배담은 관심 없다.]

“네. 패배담이죠. 그런데 당신과 동급의 격을 가졌던 ‘일곱 이빨의 용’이 누구한테 졌는지, 정말로 관심이 가지 않나요?”

[십이허주의 짐승이지 않나.]

“그건 마지막 패배였어요. 그때의 저는 이미 많이 약해진 상태였죠.”

베니앙은 투명한 눈으로 마왕을 올려다봤다.

“앞으로 당신에겐 처음 겪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날 겁니다. 어쩌면 과거의 저는, 그것들을 앞서 체험하기 위해 스스로 격락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우습군. 실패를 치장하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도 없는데.]

“치장이 아닙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대비한 것뿐이에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마왕, 당신 또한 여러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을요.”

[…….]

“하지만, 그걸론 부족합니다.”

베니앙이 중얼거렸다.

“거인도 마찬가지. 그는 이제 막 협력協力에 대해 배우고 있지만, 이대로는 시간에 맞지 않을 겁니다.”

마왕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적어도 베니앙은 한 가지는 성공했다.

마왕게서 흥미를 이끌어내는 것.

[그래. 한없이 작은 존재야. 너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치자. 그럼 내가 알아야 할 건 무엇인가?]

“패배.”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분위기가 변했다. 공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베니앙은 마왕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제가 이곳에 온 건, 당신에게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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