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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스토리-4화 (649/857)

사이드 스토리 4화

감은 눈 너머로 햇볕이 느껴지자, 이리스는 멍한 얼굴로 눈을 떴다.

괜히 목이 뻐근하다.

당연한가. 책으로 만든 침대와 베개로 이뤄진 잠자리였다. 철인이라도 이런 곳에서 한 달을 버텨낼 순 없겠지.

“…큼.”

기침 속에 먼지가 섞인 기분이다.

얼마나 잤지?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 잠에 들었으니, 아마 두 시간 정도일 것이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대까지 향하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이리스는 두꺼운 책에 걸려 두어 번 넘어질 뻔하고, 벽에 한번 머리를 박은 뒤에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쏴아아-

찬물을 두 손으로 받은 뒤 촤악, 얼굴에 물보라를 뿌리자 흐리멍덩한 정신이 뒤늦게 각성했다.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거울을 바라보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췌한 인상의 여인이 보였다.

“흠.”

이리스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지만, 조금 부족한 감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에 비치고 있는 얼간이는 좀 더 고생해야만 한다.

“이래서야 누가 흡혈귀인지 모르겠네요.”

어처구니없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이리스도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렇게 오해받은 적도 있었지.”

“언제 말입니까?”

“글쎄… 아주 옛날.”

샤를이 눈을 흘겼다.

그리고 더는 묻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얼마나 주무셨어요?”

“음. 6시간 정도.”

샤를은 뻔한 거짓말을 굳이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의미 없는 언쟁으로 이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소한 말다툼으로, 안 그래도 정신이 깎여 나가고 있는 여인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건 그녀의 역할이 아니었다.

“식사 준비가 됐습니다.”

“좀 가지고 와주겠어?”

“그러실 줄 알고 테이블에 올려 뒀습니다.”

“고마워.”

이리스는 싱긋 웃으며, 탁자 위에 놓인 토스트와 에스프레소에 손을 가져갔다. 지구의 음식, 특히 이 쓰디쓴 커피는 이리스의 마음에 꼭 들었다. 각성 효과가 있다는 점은 더더욱.

“오늘은 어쩌시겠습니까?”

간단히 식사를 진행하며, 다시 책을 펼친 이리스는 페이지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조금만 더 책을 읽고……. 음. 저녁엔 약속이 있어.”

“저녁… 아.”

샤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오늘이었군요.”

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리스는 눈 깜박할 사이 토스트 두 개를 먹어치웠다. 손에 묻은 기름기를 핥으려 드는 걸 막고, 샤를이 물티슈를 주었다. 빈틈없는 걸로 유명했던 마스터가 언제부터 이렇게 칠칠치 못해진 걸까.

…물론 그 모습에 실망한 건 아니다. 샤를이 실망한 대상이 있다면, 그건 오히려 자신일 것이다.

한밤중에 일어난 이리스의 모습이 기억난다.

사상 최악의 악몽에서 깨어난 듯,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던 모습.

그때 이후로 이리스는 변했다. 만들어진 미소만을 짓고, 멍하니 있는 때가 많아졌고, 자신에 대해 엄격해졌다.

‘엄격?’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하겠지.

이리스는 스스로를 다시없을 만큼 증오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도 죽을 수는 없어서, 매일 자신에게 색다른 지옥을 선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샤를이 본 자학 중 가장 끔찍한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로선 지금 이리스의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리스의 시선이 잠깐 이쪽을 향하더니, 설핏 눈웃음이 지어졌다.

“물론이지. 고맙구나.”

빈말인 걸 안다.

이런 대화도 벌써 수십 번은 오고 갔으니까.

“…힘내십시오, 마스터.”

그런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아서, 샤를은 매일 그렇게 말했다.

* * *

해가 다시 저물었을 때 이리스는 책을 덮었다.

“으음…….”

그리고 오늘 최초의 기지개를 켰다. 찌뿌둥한 몸,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불편하다니까. 육체란 건.”

낮게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방 바깥에 펼쳐진 건 보랏빛 안개로 가득 찬 세계였다. 그곳엔 규칙 없이, 셀 수도 없을 만큼의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너머론 각기 다른 장소가 펼쳐져 있었다.

가장 눈이 밝은 길잡이도 방향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곳이었으나, 이리스에겐 익숙했다. 그녀는 평탄하게 뒤섞인 공간을 걸어나갔고, 얼마 안 가 원하던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밤에 둘러싸인 저택,

불길 하나 일렁이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 쌓인 그 저택이 이리스의 목적지였다.

탁-

뒤섞인 세계를 나서고 저택의 중앙 홀에 발을 디뎠다.

“꼭 여기여야만 했나?”

즉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홀의 왼쪽에 쭉 이어진 복도,

그곳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백발의 엘프가 보였다. 창문 너머의 달빛이 그녀를 창백하게 비추고 있어, 안 그래도 냉엄한 인상이 더욱 도드라진 모습이다.

“빨리 왔군요, 스노우.”

“달리 할 것도 없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스노우.

과거 반서클 연합의 수장이었던 그녀는, 지금 혈혈단신이다. 이끌던 세력이 와해된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버린 건 스노우였다.

이리스의 시선이 천천히 떨어졌다. 얼굴을 타고 어깨로, 팔뚝으로, 이윽고 손으로.

“왼손은 좀 적응이 되셨나요?”

“음. 뭐…….”

스노우는 말끝을 흐리며 손을 주억거리더니,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본녀의 팔 안부나 묻자고 부른 건 아니렷다.”

“맞아요. 하지만 아직 안 온 사람이…….”

“나는 여기 있다.”

짜증 섞인, 투박한 목소리.

중앙에 있는 계단에 걸터앉은 적발의 여인이 보인다.

“참고로 제일 빨리 왔지.”

닉스, 가 아닌.

지금은 토르쿤타다.

“그럼 주빈은 모두 왔네요.”

“주빈이라? 본녀에겐 한물간 떨거지 셋밖에 안 보이는데.”

스노우는 그리 말하고, 스스로의 자학이 썩 맘에 들었는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니컬한 말에 토르쿤타의 표정이 불편해졌으나 반박하지는 않았다. 지난 세월은 그녀들이 가졌던 고고한 자존심을 모래성처럼 허물어뜨렸다. 그럴 만한 일도 제법 있었고.

그래서 이리스는 그녀들이 마음에 들었다. 동병상련… 과는 조금 다른가?

“밤이 깊었다. 최근 본녀의 취미는 수면이지. 되도록 오래 자는 걸 즐기고 있느니라. 깨어 있을 때면…….”

말끝을 흐렸으나, 이리스는 그 뒷말이 짐작이 갔다.

─미칠 것만 같겠지.

“…아무튼 가급적이면 본론부터 말해 줬으면 한다, 검은 마녀.”

“애초에 우리 셋이 전부란 말도 납득이 안 가는데. 무슨 공통점이 있다고.”

토르쿤타의 말에 이리스가 반문했다.

“공통점이라면 있잖아요. 우린 디아블로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스노우와 토르쿤타의 눈썹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나랑 저 엘프는 그렇다 쳐도. 너는 아닐 텐데? 그날 이후 쭉 그 해골과 같이 움직이고 있지 않나.”

“당장 척을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휘하의 인물 대부분이 그의 언변에 넘어간 것도 그렇고요.”

이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의 공통점은 그것 말고도 여럿 있지만… 우선은 넘어가죠. 당신들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두 사람이 나의 양팔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요.”

“…….”

“…….”

싸늘한 침묵.

“팔이 없는 걸로 보이진 않는데.”

먼저 입을 연 건 토르쿤타였다. 그녀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랍니다. 드레이크에겐 조금 어려웠나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말이다.”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는지, 스노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팔이라. 무슨 의민지 본녀도 감이 오질 않는군. 설명을 요구한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대융합이란 것이 발생하고, 각자 독립되어 있던 우주가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본래 필멸자가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될 비밀도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게 됐고.”

이리스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호응이라도 하듯 뒤쪽 공간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저는 제가 본래 가지고 있던 공간의 능력과, 대무녀를 통해 알게 된 좌표 덕분에 허공록과 접촉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재밌는 게 많은 도서관이더군요. 저는 그곳에 있는 방대한 정보를 당신들과 공유할 생각입니다.”

“공유?”

“네. 아마도 스노우 당신은 망가진 팔을 완치시킬 수 있을 테고, 보다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도 있겠죠. 토르쿤타는 어쩌면, 염원하던 분리를 이뤄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

토르쿤타는 상당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스노우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들뜨거나 기뻐하는 기색 없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핵심적인 얘기가 진행되지 않는 것 같은데. 그것과 우리를 양팔로 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전 힘이 필요하니까요.”

이리스가 중얼거렸다.

“대융합. 우주의 역사를 거슬러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사건이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정말 놀라운 것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죠. 그때를 대비해서, 전 힘을 비축해야 합니다.”

그래. 이리스 피스파인더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제는 용서를 구할 자격조차 없다고 해도, 이 이상 죄를 저지르는 것만은 안 되니까.

강해져야 한다.

그가 가는 길엔 항상 힘이 필요했고 무력無力이란 곧 죄였다.

이리스는 짧지 않은 인생에서 그러한 경험을 너무나도 많이 겪고 말았다.

그러니까.

“같이 강해져요, 우리.”

힘이 필요하다.

* * *

적기사 엘은 허의 세계의 남쪽 지대인 설원雪原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이 세계의 다른 장소에 비하면 가장 그녀의 고향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쉬움은 있었다.

이곳에 눈은 내리지 않는다. 가슴을 얼어붙게 만드는 시린 하늘도 없고, 설원 속에 가끔씩 고개를 내미는 억센 잡초를 찾을 수도 없다.

쓰레기장이라고 불리는 세계.

쭉 머물러 있고, 나아가지 않는 세계.

정지停止된 세계.

그런 곳에 변화가 일어났다.

[…….]

엘은 자신이 토해 낸 숨결을 지켜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수만 년을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목격한 적 없었던 기상현상을 앞에 두고, 엘은 말문을 잊고 말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하늘이 거무스름한 푸른빛을 띠기 시작하며, 마치 백야白夜 같은 광경을 만들어 냈다. 마치 어두운 수채화 같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이곳 허의 세계에 밤낮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엘은 불신감에 투구를 벗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

그 상태로 귀를 쫑긋거렸다.

…생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시선을 돌리는 순간, 눈밭 속에서 설치류로 보이는 작은 물체 한 마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허의 세계에 존재할 리 없는 동물.

저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바깥 세계의─

“너의 소행인가?”

혼잣말이 아니었다.

엘은 질문한 것이다.

언젠가부터 이 설원에 머물기 시작한, 거북하기 짝이 없는 동거자에게.

화아악!

그 존재는 곧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밤하늘에 한 존재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실체, 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그자의 의지가 지금 저곳에 존재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내가 한 게 아니다.]

군림자, 태양거인은 현현함과 동시에 대답했다.

엘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 동물이, 이곳에 있는 건.”

띄엄띄엄, 알아듣기 힘든 특유의 말투가 이어졌다.

“일어나고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

[다음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다음 단계?”

[알고 있나? 이곳의 바깥, 삼천세계. 그곳엔 지금 대융합이란 미증유의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지.

엘은 삼천세계가 아닌 허의 세계에서의 일을 물었는데.

[모르겠는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융합은 삼천세계에서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 네가 목격하고 있는 모든 현상이 그 증거지.]

“그 말은…….”

[그렇다.]

태양거인이 낮은 목소리로 이었다.

[삼천세계와 허의 세계, 두 세계가 합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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