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스토리 1화
무저갱無底坑.
바닥 없는 지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정말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민하린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
생각해 보니 방금 표현엔 어폐가 있다.
몸뚱이가 없는 민하린은 ‘침묵하는 게’ 아니라, ‘침묵할 수밖에’ 없는데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물론 그 사실이 크게 답답하지는 않고, 갑작스런 육체의 상실 또한 당황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마치 캄캄한 심해에 쭉 잠기고 있는 도중 같다.
수압.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는 수압은, 처음엔 생명의 손길처럼 전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성질을 바꾸었다. 마치 흉포한 거인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 같다. 전신이 짓이겨드는 느낌.
물론 이러한 생각은 모두 착각일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민하린에겐 육체가 없었다.
때문에 이 상황에선 누구나 느낄 법한 답답함도, 그것이 점차 심화되면 피어날 광기도 없을 것이다.
민하린은 생전 처음 겪는 이상사태에도 냉정했고,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나쁠 게 없겠지.
하지만 길게 생각하면.
‘과연. 좋은 상황은 아니야.’
민하린은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에서, 공간에 펼쳐진 어둠은 그녀의 정신을 좀먹고 있다. 그 속도가 무척이나 더디다는 건 좋은 소식이지만,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는 건 나쁜 소식이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반드시.
민하린의 정신은 어둠에 침식당한다.
‘자아가 소멸하는 거지.’
[생각하는 걸 그만두게 되고] 그 상태가 영원토록 이어지는 것. 생물학적 죽음보다 훨씬 비참한 최후다.
물론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타개책은 있다.
그래서 곤혹해하고 있는 거지만.
‘감정…….’
감정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법을 찾을 수 있었던 건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냉정히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되려면, 오히려 감정이 필요하다…….
감정을 끌어내서, 폭죽처럼 점화시키는 것.
그때 일어난 정신적 폭발이 어둠의 침식을 몰아내거나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감정을 깨우치지 못하면 나는 여기서 죽어.’
과연.
다시 생각해도 좋은 상황은 아니다.
현 상황은 민하린에게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이 아닐까?
자신의 의지로 버린 감정을, 반드시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냐.’
무저갱은 민하린에게 최고의 수련 장소이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이 바깥보다 훨씬 느렸고, 조용했다.
무엇보다 육신이 사라진 특수한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초월체超越體가 될 수 있는 단서 말이다.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알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하린은 지치지 않는다.
가령 일억 개의 문이 병렬로 펼쳐져 있고, 그중 진짜 문은 하나밖에 없더라도 절망을 느끼지는 않겠지.
그저 하나씩, 하나씩 직접 열어 보고 확인할 뿐이다.
한 개째를 열 때에도, 일억 개째를 열 때에도 소모 시간과 집중도는 일정할 것이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둠의 침식 속도는 무척이나 느리니까.
민하린은 시간에 늦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 *
시간이 흘렀다.
썩 괜찮은 정밀도를 가진 체내시간으로 짐작하면, 아마도 수십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
정정한다.
좋지 않은 게 아니라, 전보다 더 악화됐다.
민하린은 육체가 없다. 당연히 수면이 필요 없고, 정신을 잃을 일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의식은 이미 몇 번인가 끊겼었다.
그 조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어둠의 침식이 민하린의 예상보다 훨씬 깊게 진행됐다는 증거.
그때부터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날 때면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곳.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홀로 죽는다.
사명을 지키기 위해 감정까지 버렸는데, 그런 거래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아…….’
두려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의 파편이 느껴졌다.
육체와 정신,
본래라면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가 나뉘어졌기 때문에, ‘밑바닥 우주’와 한 거래도 잠시 그 효용이 상실된 걸까?
모른다.
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감정의 일부분을 드디어 느꼈는데도, 민하린은 이걸 호조로 여길 수 없었다.
‘이대로 죽으면… 모두 끝나는 건가?’
두려움이 사고를 멎게 만들었다.
그녀가 바란 건 불꽃처럼 거센 감정의 폭발이었으나, 공포나 두려움은 달랐다. 그건 냉기였고, 차가운 바람이었다.
잊고 있던 공포에 노출된 정신이 처량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추위를 느낄 수 없는 상태인데도, 돌연 한풍이 휘몰아치는 설원의 중심에 놓인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나갈 수 없는 건가, 애초에 내겐 무리였나. 이것이 나의 최후란 말인가.
나는…….
화악-
갑자기 냉기가 희미해졌다.
그리고 온기.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온기가 전신을 부드럽게 녹여 줬다.
생각을 멈췄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처음엔 거짓말을 해도 좋다.
민하린의 정신이 흠칫 떨렸다.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은 장점이 있지. 언제든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착각으로 여겼지만, 아니었다.
일렁이던 빛은 곧 희미한 형상을 갖췄다. 그건 잠긴 빗물에 아른거리는 조명처럼 불안했다.
하지만, 민하린은.
─너 자신을 속여라. 떨림을 두려움이 아닌, 흥분이나 분노 때문인 것이라 여겨라.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저 형상이 어떤 자인지 알고 있었다.
─쉽지 않겠지. 처음엔 너 스스로도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건, 꾸준함이지. 지금의 네가 가장 잘하는 거.
캄캄한 어둠 속에서 쏟아진 한 줄기 빛은 너무 따뜻해서,
들린 목소리는 너무나도 온화해서,
─할 수 있다. 너를 믿고 있어. 네가 나보다 더 낫게 될 거라고 했던 건 결코 빈말 같은 게 아니었다.
만약 육신이 있었다면, 이 순간 반드시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그건 목소리보단 흐느낌이 됐을지도 몰랐다.
민하린이 여전히 굳어 있는 사이 형상은 사라졌다. 빛도 자취를 감췄고,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온기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민하린은 여운에 잠긴 채 생각했다.
…안심한 건가?
이곳에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라서,
스승님이 남긴 사소한 흔적이 있어서.
‘…그랬구나.’
스승님은 무저갱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 말했지만, 이곳엔 그가 걸어온 발자취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가 직접 겪었던 경험과 지식 같은 것들이 산재해 있었다.
마치 그것들이 민하린에게 의미 있는 자극이 될 거라 확신하는 것처럼, 루카스는 무저갱을 그렇게 꾸며 놨다.
그것만으로 민하린은 더 이상 이 공간이 두렵지 않게 됐다.
그리고 아주 오래 잊고 있었던 듯한, 최초의 결심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저는.’
조금 어두운 금발과, 온화한 눈동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뒷모습.
그 모든 걸 떠올리며 민하린은 생각했다.
‘스승님처럼 되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뵙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재회를 바라게 됐다.
* * *
어떤 우주의 어떤 행성, 어떤 나라의 어떤 마을이었던 곳.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곳에 페르안 준은 머물고 있었다.
무너진 채 오래 방치되어, 모래사장에 반쯤 묻힌 건물들. 마을보단 유적이라고 불러야 될 곳에서, 그나마 지붕이 성한 집이 페르안의 임시적 거처였다.
화륵-
모닥불을 피우고 물을 끓인다.
하나는 스튜고, 다른 하나는 도마뱀구이다. 최근의 식사를 떠올리면 오늘은 진수성찬이다.
스튜가 걸쭉하게 끓여질 동안, 먼저 구워진 도마뱀을 씹어 먹었다.
까드득.
“윽.”
…모래가 조금 섞였나?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지만, 참고 먹었다. 도마뱀구이를 다 먹을 때쯤, 페르안은 문득 스스로의 상황이 우스워져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어렸을 적부터 스스로의 행동이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적이 더러 있었으나, 최근엔 그 빈도가 너무 잦아졌다.
지금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 행동력, 그 원천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루카스 트로우맨이 내게 이 정도의 존재였나?
살면서 이뤘고, 쌓아 왔고, 가졌던 것들. 쟁취하거나, 물려받은 것들.
그러한 것들 모두를 내던지면서까지, 루카스의 상실된 명예를 되찾는 것은 내게 중한 일인가?
아니.
그게 아니다.
페르안의 여행은, 어떤 의미로 수도修道와 흡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바깥’을 둘러보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내면을 주목했고, 어느 순간 오랫동안 외면했던 자신의 유치한 초심을 비로소 마주볼 수 있게 됐다.
‘처음엔 핑곗거리였다.’
태어나서부터 부족한 게 없었고 원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건 어렵지 않게 손에 들어왔다. 그러다 보면 주변의 칭찬이나 칭송 따위가 어느 순간 잡음으로 들리게 된다.
그때쯤 아카데미에서, 프레이 블레이크를 알게 됐다.
처음으로 자신과 대등한 사내를 만났다 생각했고, 그에게 이끌렸다.
─하지만 그 이후엔 어땠나?
나중에 알게 됐지만 녀석은, 프레이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그걸 인정한다.
데미갓과의 싸움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걸 이루기 위해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지.
그리고 이어진 데미갓과의 전쟁에서도, 페르안은 호출되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치열한 싸움은 페르안과 무관하게 진행됐고, 결말을 맞이했다.
…알고 있다.
당시 페르안이 가진 힘은, 맞서 싸워야 할 데미갓에 비하면 개미 이하다. 방해라도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러 줬으면 싶었지.”
툭 중얼거렸다.
모든 존재가 프레이 블레이크를, 루카스 트로우맨을 잊었을 때.
나만이 그에 대한 자취를 기억하고 있을 때.
페르안은 자신이 이번에야말로 운명의 간택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하나뿐인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아니. 그딴 숭고한 사상은 실은 없었다.
페르안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게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어, 그로 인해 표출된 감정의 고삐조차 잡지 못한 채, 억지로 극복하기 위해 우선 인생부터 갈아 넣고 본 머저리였다.
그저 대등해지고 싶었다.
떳떳하게, 전설적인 존재의 옆에 서고 싶었다.
그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게 아닌,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멀다.’
지금 그가 어떤 풍경을 바라보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가능한 걸까.
세상엔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일이 존재하지 않을까.
페르안은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운명처럼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 기이한 행성의 청록색 밤하늘에, 무언가가 날아다니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으나, 조금 더 집중하여 직시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건 페르안이 이 행성에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생물체였다.
몸통에 길쭉한 다리와 팔이 두 개씩 달려 있고, 목이 솟아나 있는 생명체. 손바닥 정도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모두 들어가 있는 생명체.
다시 말해, 사람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
전신의 몸이 굳었다.
정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포가 밀려왔다. 페르안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사고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콰앙!
페르안이 굳어 있을 동안 그 사람 같은 건 낙하를 마쳤다.
거의 운석처럼 지면에 처박혔기 때문에, 충돌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페르안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찰나 사이에 전신이 땀범벅이 됐다. 페르안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낙하장소 쪽을 바라봤다.
이 마을 어딘가였고, 애석하게도 무척이나 가까웠다.
“…….”
확인해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겪은 공포를 떠오르자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짜악!
충격요법으로는 더없이 어설프지만, 우선 자신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더 나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세게 때렸는지 입 안쪽 살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나왔으나, 덕분에 굳은 몸이 조금 풀렸다.
페르안은 낙하 장소로 향했고, 얼마 안 가 떨어진 인물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쿨럭.”
살아 있었다.
그토록 높은 곳에서 낙하했음에도, 그자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성한 꼴은 아니었다.
페르안이 긴장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
뒤이어 그자가 고개를 든 순간, 페르안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