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24화 (645/857)

외전 424화

[…너.]

레시듀는 그리 말문을 뗐으나, 도무지 이어갈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루카스의 내면을 바라보았다. 놈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집중했다. 그러나 곧 어둠을 노려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단 걸 깨닫고 허탈해졌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멸망과 접촉한 이후부터, 루카스의 내면을 읽는 게 어려워졌다.

[내게 네놈의 껍데기를 뒤집어쓰라는 거냐.]

“그것만으론 부족해. 흉내도 내야겠지”

[흉내?]

“난 네가 ‘루카스 트로우맨’을 연기해 주길 바란다.”

말문이 턱 막혔고, 그걸 뚫은 건 치밀어 오르는 분노였다.

[미친 소리… 지껄이지 마라.]

레시듀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동시에 느꼈다.

저 개자식이 제정신으로 이딴 말을 지껄이는지 의구심까지 들 지경이다.

[감히 이 몸에게 광대 짓을 시킬 생각이냐?]

레시듀의 분노도,

분노하는 이유마저 짐작할 수 있을 텐데 루카스는 웃었다.

“그렇게 느끼는 건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네게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뭐?]

“말했을 텐데. 난 이미 오른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번복할 생각은 없어.”

홀가분한 듯이 지껄인다.

미련 같은 것 없다는 듯, 상쾌함마저 느껴지는 낯짝으로.

…레시듀는,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냐?]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짊어질지도 모르는 책무 같은 건 사라져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군림자였던 시절부터, 루카스 트로우맨은 이해불가의 생물이었다.

[뭐가 개운한 거지? 짐을 내게로 넘겨서? 책무를 덜었기 때문에? 부담감에서 해방된 기분인가? …이건 그런, 그딴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나.]

“…….”

[네놈이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루카스. 저 너머가 더 지옥이란 것을.]

오른쪽,

레시듀는 그로선 볼 수조차 없는 세계.

그곳에서 루카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 지옥이란 단어마저 우습게 느껴질 만한 고통일 것이다. 이곳에서 레시듀가 짊어질 ‘루카스’라는 이름의 무게 따위는 깃털처럼 느껴질 만한.

[…이곳에서 네놈과 비기닝 위저드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난 듣지 못했다. 그래도 알 수 있다. 그놈이 준비한 안배는 이런 게 아니었다는 것쯤은.]

“…….”

[나는 네놈의 번복을 비웃지 않는다. 그러니 묻겠다. 정말로 네 선택은 이거냐? 그곳으로 가야만 되겠나, 루카스?]

그리고 루카스는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레시듀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왜 여태 몰랐지?

녀석의 안색은 창백했다.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전신은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렇겠지. 당연하다.

─멸망이 두렵지 않다고 해서, 저 ‘바깥의 세계’마저 두렵지 않을 리는 없었다.

녀석은, 줄곧 억지로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갈 거야.”

공포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지껄여댄다.

레시듀는 그 모든 태도가 눈에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거슬림은 불더미에 뛰어드는 부나방을 볼 때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딴 광경은 한심하고 재밌을 뿐, 결코 안타깝지는 않다.

[왜?]

“그게 내 역할이니까. 그래야 내가 납득할 수 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어색한 미소로 그리 지껄여 댄다.

레시듀는 다른 의미로 말문을 잊었다가, 더 이상 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았다.

[…네놈은 정말 천하의 멍청이다.]

루카스가 흐릿하게 웃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으나, 레시듀의 매도는 멈추지 않았다.

[주제도 모르는 머저리고, 제대로 분간도 못하는 등신에, 얼간이에, 평생 여자 손도 못 잡아 볼 동정 놈이다. 그리고…….]

“더 있나?”

[…네놈은.]

어쩌면 처음 봤을 때부터 했을지도 모를 생각.

그러나 레시듀는 끝내 그 말을 삼키며, 다른 말을 꺼냈다.

[…꼭 네놈의 흉내를 내야 하는 거냐?]

“계속 그럴 수는 없겠지. 당분간이라도 좋아. 아주 잠시간은, 네가 루카스로서 살아가 주길 바란다.”

[그게 얼마나 모욕적인 제안인지 알고 있겠지.]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너에게 부탁하는 거다.”

[…….]

“네가 해야 돼. 너 말고는 아무도 못 한다고.”

[제기랄. 속 편히 내뱉는군.]

레시듀가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라도 무겁단 말이다. 네놈의 짐이……!]

설마 자신이 앓는 소리를 낼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엄살이라고 여긴 걸까.

루카스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더 안심이군. 실패를 두려워하게 됐다는 거잖아. 그건 네가 멋진 녀석이 됐단 증거다. 레시듀, 우리는 같아. 둘 다 떨고 있다는 부분이 말이야.”

[하. 그럼 네놈도 멋지다는 거냐?]

웃음소리가 커졌다.

이 상황에서 뭐가 웃기단 거냐, 이 녀석은.

“마크 트로우맨, 형은 나의 책임을 가져갔어. 거기서 배운 게 하나 있지.”

[…….]

“정말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 아닌가, 레시듀? 과거 네가 뇌존이었을 적, 나는 네게 선언했다. 나의 업을 결코 누군가에게 전가하지 않겠다고.”

…그러고 보니, 그런 적도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의 업(業)을 전가하지 않아. 내가 걷는 길이고, 내가 내린 선택이다. 네놈이 관여할 부분은 하나도 없어.

똑바른 눈동자로 그리 말했던 루카스가 기억났다.

그랬던 녀석이─

“그랬던 내가, 지금은 오히려 네게 부탁하고 있지. 나의 책임을 대신 이어받아 주기를.”

[…….]

“전가轉嫁라는 거, 나는 평생 못 할 줄 알았다. 솔직히 지금도 그래.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제자나, 가장 친한 친구여도 무리겠지. 내 짐을 줄 수는 없어.”

하지만.

“너라면, 너에게라면 맡길 수 있다. 그러니 부탁한다, 레시듀. 나의 마지막 안배가 되어다오.”

루카스는, 대답을 듣지 않았다.

이미 들은 것처럼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스으으─

그리고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필사적으로 지탱되고 있던 육체가 힘없이 쓰러지고, 정수리 부분에서 새까만 연기가 흘러나왔다.

“쿨럭……!”

레시듀가 움직였다.

루카스의 몸뚱이로 움직이며, 루카스를 바라봤다.

“잠깐, 멈… 춰……!”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루카스의 몸을 움직인 적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무겁다.

이 육체,

일반적인 성인 남성보다 더 가벼운 이 몸뚱이가 너무 무거워서, 레시듀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만 싶었다.

“죽을 생각은, 아니겠지……! 루카스 트로우맨……!”

그 말에 떠나던 검은 연기가 우뚝 멈췄다.

[죽어? 내가?]

“…….”

[아냐. 오랜 시간 동안, 그 무엇도 날 죽일 수 없었다. 멸망도 다르진 않겠지.]

루카스는 검은 연기 같은 형상이 됐다.

레시듀로선 루카스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레시듀.]

지금 녀석이 웃고 있단 건 알 수 있었다.

[─또 보자.]

사라진다.

아니, 떠나고 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여정이 기다리는 곳으로.

…하고 싶지 않겠지. 두렵겠지.

그럴 수만 있다면, 이 또한 미루거나 전가하고 싶겠지.

루카스의 육체에 남은 잔여 감정들이 그리 주장하고 있다.

그래도 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내가 봐야 할 모습이 아니지 않나.”

홀로 남은 레시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 자리엔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광경을 눈에 담아야 할 건 나 같은 녀석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카스의 생각은 달랐다.

녀석은 레시듀를 택했다. 레시듀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받는 건.

“…….”

레시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경계’였던 공간이, 이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비기닝 위저드의 방은 기껏해야 몇 칸짜리의 공간이었고, 최소한의 가구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었다.

지팡이와, 로브와, 가면이.

레시듀는 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77탑, 비기닝 위저드의 방 입구.

그곳에 살아 있는 모든 구도자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44층의 세븐즈 매지션, 알타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제한시간 같은 건 듣지 못했지만, 이토록 시간이 지체되는 건 부자연스럽다.

그분은, 영주께선 말했다.

‘일’이 끝난 후, 자신의 방에서 누가 나오든, 그가 바로 차기 비기닝 위저드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 마탑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던 비상사태는 끝이 났다.

공간의 일그러짐은 소멸했고, 시커먼 폭포 또한 그 모습을 감췄다. 고층 대부분을 점령했던 ‘가장 짙은 어둠’도 꺼지듯 사라졌다.

그러니 아직까지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공간은, 눈앞에 있는 비기닝 위저드의 방이 전부였다.

‘…영주께선 저곳의 출입만은 막았다.’

그리고 먼저 문이 열리기까지, 절대로 접근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그럼 계속 기다려야 하나? 이대로 몇 날 며칠을 계속?

초조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알타타가 입술을 깨물은 순간이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구도자들 전원이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언제든 마법을 전개할 수 있게 마나를 끌어올렸다. 사정을 알고 있는 알타타나, 같은 세븐즈 매지션인 하이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곳에 어떤 존재가 나오든 따라야 하는 입장이지만, 방금까지 어둠을 겪었기 때문에 긴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저자는…….”

구도자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물결처럼 번졌다.

누군가에겐 낯이 익고, 누군가에겐 낯선 얼굴.

남자의 정체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보단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 로브, 그리고 가면에 더욱 시선이 갔다.

─비기닝 위저드의 상징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아니, 이분은.

알타타는 가장 빨리 자신의 역할을 깨달았다.

“─영주시여.”

숙인 머리 뒤편으로 서늘한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알타타는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영주시여.”

하이크의 목소리가 이어진 순간, 나머지 구도자들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영주시여.”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끌어 주소서.”

“답을 주소서.”

“부디 저희를 구원해 주소서.”

무릎을 꿇은 자들.

그 가운데,

그 남자는 물끄러미 가면을 내려다봤다.

“아니,”

툭 굴러떨어지는 돌멩이처럼 무심한 목소리였다.

“이끌지 않겠다.”

숨죽인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답을 주지 않겠다. 구원해 주지도 않겠다.”

그를 접한 적 있는 몇몇 구도자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목소리, 같은 얼굴인데도, 어쩐지 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 몸은……. 아니.”

잠깐 끊어졌던 말이 다시금 이어졌다.

“나는, 군림하겠다.”

그날.

대마도사가 한 명 떠났고,

대마도사가 한 명 탄생했다.

역사상 가장 이색적인 대마도사가.

* * *

‘우습다.’

레시듀에게 있어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랬다.

그야 이 정도까지 추락하게 되면, 분노나 허탈함보다 웃음부터 나오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천둥우레의 뇌존이었을 때, 군림자였을 때.

어쩌면 레시듀는 당시엔 그 사실에 아무런 자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다른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의 위치는 꼭대기였다. 다른 곳에 서 있는 기분 따위,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바라는 것,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건 곧 현실이 됐다. 강대한 물리력만이 아니다. 군림자의 정신력은 겁의 세월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서, 상정 밖의 일이 벌어져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럼 언제부터였나?

내게 동요가 익숙해진 건.

─내게 있어, 인간성이란, 달빛 아래 한 잔의 술잔을 기울이며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었다.

루카스가 ‘검은 가시의 마왕’을 향해 했던 말.

그 당시엔 아무런 감흥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레시듀는, 부러움을 느끼게 됐다.

죽어도 다른 녀석, 특히 루카스에겐 내보이고 싶지 않은 내면이다. 녀석이라면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레시듀는, 어처구니없게도 동경심을 품고 말았다.

그리고 더 알고 싶어졌다.

인간 같은 게 아니야. 너다, 루카스.

나는, 그저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너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강렬했다. 높은 밀도를 가진 기억들이, 강렬한 색채를 띤 채 하나씩 더해졌다. 알게 됐다. 찰나 같은 삶이 가진 아름다움을.

그리고 때때로.

아니, 실은 항상.

…즐거웠다.

“…등신 같은 놈.”

레시듀가 중얼거렸다.

그건 그가 처음으로 한 자책일지도 몰랐다.

멍청이처럼, 떠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주제도 모르는 머저리고, 제대로 분간도 못 하는 등신에, 얼간이에, 평생 여자 손도 못 잡아 볼 동정 놈이다. 그리고…….

─더 있나?

─…네놈은.

그리고 말했어야 됐을 것이다.

─네놈은… 멋진 녀석이다, 루카스.

그렇게,

떠나는 친구를 배웅했어야 됐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