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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22화 (643/857)

외전 422화

─그럴 순 없어.

무턱대고 그리 부정하려고 했지만, 루카스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군림자는, 4기사를, 구도자를 모두 ‘삼킨’ 다음 멸망과 싸우는 것.

분명 옳은 일은 아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거북함이 사라지질 않는다.

…루카스의 관점에선 그렇다.

하지만 비기닝 위저드의 관점에선? 아니면 우주적인 관점에선?

삶은 동화가 아니다. 당연히 비극도, 희극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란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루카스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삶은, 그저 삶일 뿐이다.

반드시 옳은 선택도, 반드시 틀린 선택도 없다.

“부정하고 싶은 얼굴이네.”

비기닝 위저드가 질렸다는 듯 웃었다.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게 잘못됐다고 여기는 거지? 희생을 강요하는 것? 구도자들을 소모품으로 쓰는 점? 아니. 난 냉혈한이 아니야.”

그 눈동자에 애틋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부분에서 우리 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부정 못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게 아니야. 애정에 우선순위가 있는 건 당연하니까. 공평한 사랑이란 성립할 수 없다는 걸 너는 알고 있겠지.”

“…….”

“난 마성에서 가르친 아이들을 모두 사랑했다. 그 아이들은 모두 때가 되면 망설임 없이 희생할 수 있는 각오를 갖추고 있어. 그걸 위해 멸망에 대해 가르쳐 주고, 독선에 대한 걸 이해시켰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잘 따라와 줬어. 내 제자로선 과분한 녀석들이야.”

…알고 있다.

비기닝 위저드는 모순적이지 않고, 비열하지도 않다.

만약 이 남자가 희생에 대해 떠벌리는 주제에, 스스로 그걸 실천할 역량이 없다면 구도자들 그 누구도 진심으로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기닝 위저드는 그러지 않았다.

이 남자는 솔선해서 선보였거나, 혹은 언제나 자신의 입으로 강조했을 것이다.

희생이 무엇인지 대해, 어떻게 실천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거부감이 느껴지겠지. 어쩔 수 없어. 그게 네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삶의 방식?”

“넌 지금 낯선 것뿐이야. 이토록 모든 게 준비된 계획에 편히 몸을 실은 적이 없으니까. 아무런 사색도, 고찰도 없으니 올바른 선택일 리 없다……. 그렇게 머리가 착각하고 있는 거지.”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항상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선택지들 속에서, 넌 아무도 고르지 않는 3번째 길만을 골랐지. 누구든 상상할 수 있지만 결코 고르지 않을 가장 험난한 길을.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그런 반발심이나 감정 같은 걸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란 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

“단 한 명이 모든 걸 독식해서 싸우는 것. 이 계획을 추진한 다음 멸망과 싸우면 승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

비기닝 위저드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1할이 돼.”

1할, 10퍼센트.

…무려 10퍼센트.

신이 말했던, 어처구니없을 만큼 낮고 희박했던 가능성.

0이란 숫자와 실질적인 차이점이 없었던 그 숫자가, 단숨에 현실성을 갖추게 됐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확률이 오를 수 있는 거지?”

“나라는 존재 때문이지.”

“뭐?”

“말했잖아. 난 멸망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봐. 내가 강한 건 분명하지만, ‘태초신’이나 ‘신’, ‘허왕’에 비하면 수준 차이가 확연히 난다고 생각하지 않아?”

비기닝 위저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 번째 멸망]은 모든 멸망 중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될 거야. 그리고 넌, 내 계획대로 움직인다면 모든 대적자 중에서 가장 강해질 테고.”

…여기까지 생각했던 것이었나.

바로 이것이다. 비기닝 위저드가 말했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방법.

이 남자는 아주 오랫동안 거대한 계획을 짰고, 그것에 있어 모든 사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했다. ─스스로를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이 방법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고민했을까, 생각했을까.

루카스는 밤낮으로 지새는 비기닝 위저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진정으로 깨닫고 말았다.

이 계획은 극히 존중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단순한 감정이나 반발심 같은 걸로 거절할 게 아니다.

여태까지는 운이 좋았던 걸지도.

반쯤 자아도취 되어서, 충동적으로 골랐던 3번째 선택지가 기적적으로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엔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는 없다.

실패는 멸망이며, 멸망은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하니까.

그러니 비기닝 위저드의 말대로 따르길 모든 존재가 바라고 있을 것이다. 희생해야 할 이들마저도 그렇겠지.

…느낀 적 없는 기분.

모든 존재가, 상황이, 루카스 자신마저도.

비기닝 위저드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위해 모든 게 정당화되도록 상황이 조성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비기닝 위저드의 말을 따르면…….

“…왜 웃는 거지?”

비기닝 위저드가 불쑥 물었다.

루카스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거나, 비기닝 위저드의 말을 반문하는 아둔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스스로 웃고 있단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못 해.”

그리고 거절했다.

한 마디,

딱 한 마디의 거절.

꺼내기 직전까지 힘들었다.

그런데 입 밖으로 꺼낸 순간 가슴의 중압감이나 머릿속의 혼란 같은 게 연기처럼 사라졌다.

“…못 한다고?”

“그래.”

기긱, 긱.

머릿속의 불협화음이 더욱 커졌다.

이 순간 루카스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직감했지만, 뭐 어쩌라고.

“넌 아무 생각 없이 거절할 남자가 아니지.”

비기닝 위저드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상냥했으나, 방금과 비교하면 분명히 온도 차이가 있었다.

“무엇이 널 거절하도록 만든 거지? 부탁이니 인륜이니, 도덕이니, 혹은 내키지 않는다든지. 그런 시시한 이유는 아니길 바란다.”

“그런 게 아니야. 난 그냥 납득이 가지 않는 것뿐이다.”

“납득이라고?”

어처구니없는 목소리.

그러나 루카스는 위축되지 않고, 비기닝 위저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넌 가장 중요한 걸 밝혀내지 못했어. 의미를 찾지 못했다고.”

“…의미라니.”

“존재하는 모든 것엔 의미가 있어. 내가 삶을 통해 단 하나 확실히 배운 게 있다면 그거지. 불변의 진리라고 해도 좋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카스는 처음 들었을 때부터 줄곧 걸렸던 점을 입에 담았다.

“멸망과 일대일로밖에 싸울 수 없다면, 어째서 멸망은 다섯 개나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

“애초에 멸망화滅亡化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지? 만약 계획대로 ‘네 번째 멸망’이 된 너와 싸워 이긴다면, 그걸로 정말 끝일까? 아직 남은 두 번째, 세 번째 멸망이 들이닥치진 않을까?”

“…그럴 리는 없어. 최근에 들었던 추측이지만, 어쩌면 이 모든 게 태초신의 계획 중 하나일지도 몰라. 시간을 거듭할수록 멸망은 약체화시키고, 우리들의 힘은 키우는 거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루카스는 그저 물어보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순수하게 궁금했다.

“아니. 생각은 할 수도 있으니 질문을 바꾸지. 정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거냐?”

“…세상엔 근원적인 법칙들이 있어. 창세 때부터 확립되어 있었던 시스템에 이유란 없지.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애초부터 그렇게 정해진 법칙’들이 존재해. 그 이상의 진실도, 숨긴 것도 없는, 그 자체만으로 사실인 것들. 멸망이 그런 종류야. 그런 것에서 이유를 찾으려 드는 건 미련한 짓이라고.”

루카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이 남자의 결론인가.

“넌 그걸로 납득이 됐나 보군.”

“그래.”

…마크 트로우맨은, 루카스 트로우맨이다. 비극적일 만큼 닮은 게 그들이었다.

그러니 마크가 납득했다면, 루카스도 납득할 수 있다.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다.

비기닝 위저드가 자신보다 뛰어난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다.

이렇게 다 포기한 것처럼 말하고 있어도, 멸망의 정체에 대해 고찰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아마 상정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고, 추측했고, 찾아 헤맸겠지.

그런데도 답을 내지 못했고,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추측을 입에 담고 있는 것이다.

이때가 대다수의 사람이 타협하는 단계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나는.

“…‘원래가 그렇다’.”

“뭐?”

루카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지.”

“…….”

“멸망이 다섯 개인 이유도, 일대일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도, 원래가 그런 것이고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래. 그렇게 여기면 편하겠지.”

하지만 인간의 탐구는 항상 그다음으로 이어졌고, 그런 끈질김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과 발전으로 이어졌다.

─어째서, 왜, 무슨 이유로?

“피곤한 삶이야.”

비기닝 위저드가 지친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건 알고 있어. 쉽게 바꿀 수는 없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번만큼은 그런 고집을 부릴 때가 아냐. 가끔은 포기할 때도 알아야 돼. 네가 지향하는 길엔 끝이 없으니까.”

“끝은 있어.”

“뭐?”

“내가 납득하면 돼.”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비기닝 위저드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게 보였다.

“지금의 난 어떡해도 납득이 가지 않아. 그걸 무시하면 결국 스스로를 속이는 게 되겠지. 그리고 분명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다.”

“…….”

논리도 뭣도 없는 말이었으나, 지금 입에 담은 게 루카스의 진심이었다.

비기닝 위저드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내뱉었다.

“…넌 나보다 약해.”

“알아.”

“…멸망에 대해서도 나보다 모르고.”

“그래.”

“결국 겪어 보지 않았으니까 그딴 말을 지껄일 수 있는 거야. 무지한 자의 아집 같은 거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너보다 훨씬 끈질겨.”

푸핫.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껏 준비한 것들이 죄다 쓸모없게 돼 버렸네.”

비기닝 위저드가 맑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쉽게 넘어올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네가 거절하지 못할 분위기를 만들려고 이 꼴을 보여 주면서까지 너를 유인한 건데.”

“유인…….”

“여지만 남겨 둬도, 어떻게든 날 다시 만나러 올 거라 확신했지. 좀 아슬아슬하긴 했다만.”

쿨럭. 말이 끝난 동시에 비기닝 위저드가 기침했다.

루카스는 문득 그의 가슴을 보았다.

쏟아지고 있는 액체의 기세가 처음보다 많이 약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루카스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궈졌다.

“…망설였다.”

“뭘?”

“네게 내 생각을 솔직히 전할지에 대해서. 어차피 넌 사라질 테고, 그걸 막을 방법도 없으니까 그냥.”

뒷말은 쉽게 이어지지 못했다.

루카스가 어물쩍거리는 동안, 비기닝 위저드가 뒷말을 받았다.

“그냥, 가는 길에 미련이라도 없게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치려고 했다?”

그 목소리는 언뜻 들었을 때 차가웠다.

힘이 담겨 있었고, 아팠다.

루카스는 왠지 모르게 허리를 쭉 펴게 됐다. 바닥에 향해 있던 고개도 빳빳하게 들게 됐다.

비기닝 위저드의 얼굴이 보였다. 따뜻한 눈동자가 보였다.

마지막 목소리, 마지막 모습, 마지막 얼굴.

결코 잊지 않기 위해 꼼꼼히 뇌리에 박았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지.”

“…그래. 그러지 못했어.”

“너는 루카스 트로우맨이니까.”

“…맞아.”

루카스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시야가 흔들려서 두 눈을 꾹 감고 말았다. 더없이 따뜻한 선이 눈에서부터 볼, 이윽고 턱까지 그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루카스 트로우맨이니까.”

웃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훨씬 희미했다.

루카스는 처음으로, 그 웃음소리가 자신과 닮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결국 네게 가르쳐 주지 못했군.”

“가르쳐 주지 못했다니?”

“편하게 사는 법 말이야.”

“…….”

“하지만 너는 그걸로 된 거지? 만족하는 거겠지?”

“…그래. 만족해.”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계획은 있어?”

“있어. 많이 어설퍼서, 좀 더 보완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렇구나.”

이제는 목소리가 거의 희미해서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또 하나의 계획을… 짰었지…….”

“또 하나의 계획?”

“마성을 가꿀 때마다 생각했어……. 너랑 함께 이곳을 구경한다면, 정말로 좋을 텐데.”

“…….”

“맛있는 걸 같이 먹고,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고, 어찌 돼도 좋은 얘기를 떠들면서,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거나… 진짜 형제처럼…….”

루카스는 다시 한번 고개를 떨어뜨릴 뻔했다.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다음에 그러도록 할까.”

“……다음에?”

“그래. 다음에.”

웃음소리가 들렸고.

“다음, 좋지.”

목소리가 이어졌다.

“──.”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비기닝 위저드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텅 빈 공간은 다시없을 상실감을 주었다.

루카스는 그가 있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나의 모든 걸 알면서 오히려 긍정해 줬던 남자.

루카스만의 책무를, 누구에게도 나눠 주지 않았던 짐을 억지로 가로채 간 남자.

그 같은 사람을 또 만나는 게 가능할까.

“…….”

…한 번쯤은, 그렇게 불렀으면 좋았을 것이다.

마크 트로우맨이나 십이허주, 비기닝 위저드가 아니라.

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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