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21화
강의 점성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그것들은 죽은 바다의 해초처럼 전신을 끈질기게 옭아맸는데, 그 때문에 한 발자국 내딛는 데에도 사흘 밤낮을 걸은 듯 심신이 지쳐 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멸망과 싸울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다.
신이 들려준 얘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건 루카스가 느낀 세상의 불합리와도 이어지는 것이었다.
왜냐면 이 세계는, 개인의 힘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과거 루카스가 한낱 필멸자 마법사였을 적에도 그랬다.
하나의 존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생명의 수가 너무 많다. 그렇다고 목숨의 가치가 가벼워지는 게 아닐 텐데도.
실질적으로 삼천세계를 만든 게 신이 아니라고 해도, 이후 그 공간을 가꾼 건 틀림없는 녀석이다.
그렇다면 이게 바로 녀석의 바람이겠지.
개인이 가진 힘이 일반적인 궤를 넘어서는 것.
“후욱, 후욱…….”
루카스가 숨을 헐떡였다.
정말 오랜만의 피로였다. 이곳에선 보이드조차 사용할 수 없는 걸까. 아니면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변화 때문일까.
알 게 뭐야.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생각의 초점은 다른 것으로 옮겨졌다.
‘…볼 수 없겠지.’
비기닝 위저드와 멸망이 어떤 싸움을 치렀는지, 루카스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조금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처음에 말했듯, 멸망과 싸울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멸망과 대면’할 수 있는 것도 단 한 명뿐이라 보는 게 옳다.
즉, 비기닝 위저드와 멸망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면 루카스는 이 공간으로 진입하지도 못했다.
“흐읍…….”
강문을 거슬러, 가면의 눈구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면의 표면은 이 세상 물질이라곤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낯설고 불쾌한 느낌을 주었지만, 루카스는 개의치 않고 그 거대한 눈구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철벅!
짧은 낙하와 함께 몸뚱이가 물웅덩이에 처박혔다.
구멍 안쪽, 혹은 너머엔 또다시 물이 고여 있었지만 바깥에 흐르는 것보단 그 색이 붉었다. …다만 수위는 낮고, 점성도 없다.
루카스는 어렵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바라보았다.
“…….”
그 공간 가운데 찾던 존재가 있었다.
비기닝 위저드는,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십자가에 묶인 채, 사지를 속박당한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꼴이 정말 그랬다.
목젖부터 배꼽까지는 갈라져 있었는데, 그곳에선 폭포처럼 검붉은 액체가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적출摘出의 광경은 루카스가 알고 있는 가장 야만적인 공양보다 훨씬 끔찍했다.
단순히 피와 내장을 끄집어내는 게 아니다. 루카스는 이 순간 이해하고 말았다.
연꽃.
새까만 강물 위에서도 찬란히 빛나던 그 기억의 파편은 실제로 비기닝 위저드의 것이었고, 그라는 존재를 구성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딴 건 멸망화에 있어 거치적거리는 것에 불과했겠지.
멸망은, 놈에게 의지가 있을 때의 가정이지만, 그걸 알고 적출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비기닝 위저드의 모든 요소를 피라도 뽑아내듯 도려내고 있었다.
루카스가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한 단어로도 이 광경의 참혹함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기닝 위저드였던 존재가 점차 흐려지고 있단 걸 깨달으니,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기어코 여기 오고야 말았군, 나의 동생.”
그리고 저편에서 먼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는 길이 쉽지 않았을 텐데. …뭐, 내가 걱정할 건 아닌가.”
“패배했나.”
루카스는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첫마디로 적합하지 않았다. 좀 더 괜찮은 말이 있었을 텐데.
“아마도 졌겠지. 그러니 이 꼴이 된 거고.”
여태까지와 다른 부드러운 말투,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기닝 위저드에게 아직 웃을 기력이 있다는 게 놀랍다.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확실히 말해 줄 수 없는 걸 이해해 주길 바란다. 잘 떠오르지 않아서 어쩔 수 없거든. 그저 정말로 무서웠고, 싸움이라고 부를 만큼 대등한 형태가 아니었단 건 기억난다.”
“…….”
멸망과의 싸움이 ‘구슬 바깥’에서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싸움 자체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이게 네가 바라는 최후냐?”
루카스는 어쩌면 처음에 꺼내야 했을지도 모를 말을 했다.
“대체 왜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냐.”
“…….”
“네가 샘을 통해 나를 엿봤듯, 나 또한 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너의 기억을 보았다. 나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아냐, 그렇지 않아. 그 이후에도 너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너는, 넌…….”
루카스는 가장 괴로운 걸 토해 내듯, 힘겹게 말했다.
“…행복했던 적이 없지 않나.”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꿀렁꿀렁, 비기닝 위저드의 몸에서 무언가가 적출되어 흘러내리는 소리만이 잠시간 울렸다.
“내 기억을 제대로 본 게 아닌 것 같은데.”
웃음 섞인 대답이 나왔을 때, 루카스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난 그리 강인한 놈이 못 돼. 행복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겠지.”
“…….”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여? 그렇지 않아. 너를 안 이후의 모든 순간이 기적이었다.”
“너는…….”
“언젠가 말했었지. 누군가에겐 쓰레기장일지도 모르는 이 세계가, 내게 있어선 기적이었다고. 그건 빈말 같은 게 아니야. 그야 바깥에선 너와 내가 만나는 미래가 단 한 개도 없었으니까.”
“…….”
“쓰레기장이라고 불리는 허의 세계라서, 버림받은 모든 가능성이 모이는 그런 장소기 때문에 너와 만날 수 있었던 거야. 난 그 사실에 감사한다. 비록 생전의 삶은 비참했지만, 이곳에서부터 이어진 연장전은 내게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지.”
비기닝 위저드가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삶의 외전外傳은 썩 나쁘지 않았어.”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결심하고, 그것에 대한 준비를 밟는 과정은 즐거웠다. 타의적인 희생에서 자의적인 희생, 고작 바뀐 건 그것 하나뿐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비기닝 위저드라는 자리, 임시적으로 떠맡게 된 직책이지만 마음에 들었다.
마성을 가꾸는 것도 즐거웠다. 어쩌면 자신은 삼천세계에 한 번도 간 적 없을지도 모르니까, 마성을 비슷한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건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개인적인 욕망이었다.
그래.
희생을 결심한 순간, 비기닝 위저드는 비로소 자신의 응석을 받아 줄 수 있게 됐다.
언젠가 동생을 위해 죽을 테니까,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되잖아.
“…구도자들은, 나의, 우리의 가르침에 따라올 수 있는 자들이야.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바깥에서 호의호식하는 얼간이들보단 훨씬 당찬 녀석들이지. 난 그들이 마음에 들어. 전부 나의 소중한 제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비기닝 위저드가 크게 헛기침했다.
“…….”
루카스가 그의 얼굴을 보고 말문을 삼켰다.
갈라진 가슴에서만 나오던 새까만 액체가 눈과 코, 입에서도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군. …따분한 얘기는 여기까지야. 이제부터 잘 들어라, 루카스. 너는 언제나 인간의 의지에 대해 입에 담았지만, 거기에 스스로를 대입하지는 않았지.”
루카스는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고, 그 어떤 존재보다 눈부시다고 여긴다.
인간의 의지, 계승되는 의지란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아름답다.
…하지만 그곳에 루카스는 속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계승繼承에 대해 입에 담았지만, 자신의 유지를 이어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거라곤 믿지 않았다. 믿지 못했다.
오랫동안 제자를 거두지 않은 이유가 그랬고, 제자를 거둔 이후에도 그랬다. 믿는다고 지껄여 대기만 하고 진정으로 그러진 못했다.
…민하린에겐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러 버렸다. 그 아이는 루카스의 속 빈 강정 같은 말에 속아 자신의 인생을 잃고 말았다.
“우린 결국 결정적인 순간 남에게 기댈 수 없었어.”
비기닝 위저드의 말은 전부 사실이다.
의탁이 뭔지 모르며, 스스로밖에 믿을 수 없는 가련한 존재가 그들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것이 우리의 독선이라면, 귀찮긴 해도 그렇게 계속 살아가는 수밖에 없잖아. 나는 마성에 와서 그걸 알게 됐어. 그리고 너도 비슷한 결론을 낼 거라 생각한다.”
“…내가 비기닝 위저드가 되길 바라는 건가.”
“애초에 너의 자리였으니까. 이제야 순리대로 흐르는 거겠지.”
“…….”
“지금 네 상태를 알고 있어. 우선 루카스 트로우맨이란 이름을 버려야 해. 내 가면이 도움이 될 거야. 당분간은 그걸로 멸망화를 억제할 수 있겠지.”
마성으로 가면 루카스 트로우맨은 죽는다고, 그런 얘기를 오래전에 들었다.
…아마도 녀석이 훨씬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일,
녀석은 루카스 트로우맨이 스스로의 이름을 버리고 비기닝 위저드의 자리를 이어받길 바라고 있었다.
“멸망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해 준다고 했지……. 내 방에 있는 가면에 ‘기억’을 넣어 두긴 했지만, 직접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네. 잘 들어. 열쇠는 ‘4기사’와 ‘군림자’다.”
비기닝 위저드는 몇 번 콜록거린 다음 말했다.
“넌 지금 청기사 페일에게 절대적인 충성도를 얻었고, 군림자의 잔념 또한 지니고 있지. 그러니 우선은, 네게 호의적인 청기사의 힘을 빌려 모든 군림자를 사냥해.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용’은 약해져 있고, ‘뇌존’의 약점은 잔념에게 들을 수 있겠지. ‘거인’은 적기사와 협력 중이니 마지막으로 미루고, 가장 까다로운 건 역시 ‘마왕’이 될 거야.”
무언가 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카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비기닝 위저드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다른 군림자가 죽는다고 해도, 그들이 위기감을 가지거나 협력할 일은 없겠지.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니까. 즉, 모든 싸움은 일대일로 치러질 거야. 청기사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승리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군림자와 홀로 싸워 보길 바란다. 멸망과의 일전에 앞서 좋은 경험이 되겠지. 그다음엔, 그들의 힘을 거둬.”
말문이 막혔다. 비기닝 위저드가 쏟아 내는 말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페일을 이용해 군림자 전원을 사냥하고, 그들의 힘을 거두라고?
그게 가능한가? 정확히 어떻게?
아니. 그보다 왜?
“[나의 기억]이 말했겠지. 군림자는 애초에 하나의 존재였다고. 사실 [애초]보단 [태초]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지만.”
말장난처럼 들렸지만 아니다. 비기닝 위저드에겐 농담할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태초.
…태초신.
루카스의 표정이 바뀌었고, 비기닝 위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림자는 태초신의 무기였다. 멸망과 싸우기 위해 그 자신이 연마한 무기였지. 그리고 그 검에 담긴 힘이야말로, 삼천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4가지 힘이었다.”
“…그 말은.”
“원래 군림자란 자아自我조차 없는 한 자루의 무기였다.”
“…….”
군림자가 가진 힘은, 그들의 주인만큼이나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다.
다른 어떤 힘과 섞이게 됐을 때 동조하고 섞이기보단, 집어삼키고 지배하려 든다. 세상엔 패도적인 특성을 가진 힘이 무수히 많으나, 군림자의 그것은 정도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뇌존의 ‘우레’를 체험한 루카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우레와 대등한 게 다른 군림자의 힘이다.
그 모든 게 태초엔 하나였다니.
그리고 다시금 루카스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니.
“그래서 말했잖아. 네겐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
“그 이후엔 좀 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으니까.”
“…해야 할 게 더 있다는 거냐.”
“말했잖아. 핵심은 군림자와 4기사라고.”
어느덧 벅차올라 있던 가슴이 가라앉아 있었다. 바뀐 분위기가 루카스의 머리도 차게 식혀 주었다.
묶인 채로 있는 비기닝 위저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처음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루카스는 그로부터 전혀 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4기사 전부를 죽여.”
“뭐……?”
“그리고 그들이 가진 힘을 거둬들여라.”
“너, 무슨 소리를─.”
담담한 목소리.
“그들은 군림자와 달라서 서로 협력할 가능성도 있겠지. 경우에 따라선 비기닝 위저드의 권능에 군림자의 힘까지 합해도 힘들지 몰라. 만약 힘이 좀 부족할 것 같다면 마성의 구도자들을 먹어라.”
상냥하게,
동생에게 비밀 선물이라도 준비한 것처럼,
“목적을 뚜렷이 밝히면 그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을 거야.”
비기닝 위저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위해 내가 길러 둔 거니까.”
그 순간 루카스의 뇌리에 한 가지 단어와 함께,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독선獨善.
그리고 로드(Lord).
이 순간 깨닫고 말았다. 어쩌면 훨씬 옛날부터 느꼈을 위화감의 정체를.
비기닝 위저드의 세계엔, 단 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