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19화
루카스는 당장이라도 이 공간을 부수고 탑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내부에서부터 파괴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설계됐지만, ‘멸망’의 힘을 집중해서 쏘아낸다면 가능할 것이다.
“…….”
하지만 뻗은 손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멸망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잃은 건 아니다.
망설임.
뻗었던 손을 내리며, 다만 입술을 한번 더 짓씹었다. 연속적으로 깨물린 입술에선 이제 핏물마저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 색마저 멸망과 판박이라서 마치 입술 사이로 새까만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보였다.
‘…비기닝 위저드가 만든 마탑이다.’
그 남자가 어떤 생각으로 이 탑을 세웠는지 알 게 되니, 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한시가 촉박한 때에 들어선 안 될 인간적인 감성.
스스로에게 아직 그런 면모가 남아 있단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걸까.
[바깥에서부터 옥상으로 갈 생각이냐.]
‘…….’
[그렇군.]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으나, 레시듀는 납득한 듯 홀로 중얼거렸다.
루카스는 그의 배려에 감사하면서도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고려했다.
만약 자신이 늦었다면, 이미 모든 게 끝났다면…….
나는…….
─1층에 도착한 후, 루카스는 지체 없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탑은 일종의 경외심이 들 만큼 높게 세워져 있었으나,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눈 깜박할 사이에─
“멈추십시오!”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루카스의 앞에 누군가의 인형이 덜컥 출현했다.
익히 그의 등장을 예견하고 있었으므로 놀라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심지어 그 말에 따라 멈춰 주기까지 했다. 그 정도 배려는 보여 줘야 할 만큼의 정보를 제공했던 남자였다.
발탁.
33층의 세븐즈 매지션이자, 현시점에서 루카스의 관리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마법사는, 여태껏 보인 사무적이고 정돈된 태도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루카스의 뒤를 쫓아온 것인가. 아니면, 세븐즈 매지션에겐 탑 내부에서 외부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인가.
“비켜라.”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기도 했다.
신은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했고, 그건 사실이다.
마법사들을 설득할 여유 따위는 없다.
“제 말을 이해한 것처럼 느꼈던 건 착각이었습니까? 아니면 이게 당신의 진짜 목적이었습니까?”
“…….”
“탑 바깥이라고 해서 어둠이 잠자코 있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이 돌발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말을 완전히 마치기 전, 발탁의 눈동자가 풀렸다. 뒤이어 몸뚱이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더니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때쯤 루카스는 이미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쿠웅.
희미하게, 지면이 몸뚱이가 처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수백 미터에서 이루어진 추락이었으나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 군데 부러지긴 했을 테지만.
그리고 루카스는 꼭대기에 다다랐다.
비기닝 위저드의 방,
빙글빙글 웃음기 섞인 태도를 마지막까지 유지했던, 녀석과 헤어졌던 그 장소.
그 이후 곧바로 멸망과의 싸움을 시작했다면, 그때 비기닝 위저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다.
루카스는 문고리조차 없는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열 방법 따위 모르지만 알 게 뭐란 말인가.
열리지 않는 문은 벽과 다를 바 없고, 루카스는 벽을 부수는 법을 알았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알타타의 목소리란 건 알 수 있었다. 발탁보다 훨씬 침착한 태도였으나, 그게 루카스의 행동을 제지할 명분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루카스의 행동을 잠시나마 멈췄다.
“설령 영주님의 동생분이라고 할지라도요.”
“…….”
알고 있었나.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루카스는 뒤를 돌았고, 녹색 머리카락의 여인을 눈에 담았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꼴은 너저분했다.
“또 누가 알고 있지.”
전부 알고 있는 게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저와 같은 세븐즈 매지션 몇 명이 더 귀띔받았습니다.”
“발탁은 모르는 눈치였는데.”
“예. 44층부터 77층까지의 세븐즈 매지션만이 들었으니까요.”
알타타를 비롯한 4명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인가.
루카스는 이 말에 큰 의미도, 충격도 느끼지 못했다. 멸망과 접촉하여 알게 된 진실들에 내성이라도 길러 준 걸지도 모른다.
“…당신께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라고.”
알타타가 다시 말했다.
“영주께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
그래.
그게 바로 비기닝 위저드의 잘난 계획이겠지. 신의 그것과 다를 건 없다. 좀 더 유예가 주어졌다는 것을 빼면 그렇다.
루카스는 다시 주먹을 콱 쥐었다.
“막지 마라.”
“…….”
알타타는 몇 번 입을 웅얼거렸으나, 결국 입을 닫고 고개를 떨궜다. 자신의 힘으론 막을 수 없단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카스는, 문을 열었다.
“…….”
문 너머의 공간은 어두웠으며, 밝았다.
그걸 인지함과 동시에, 루카스는 어느새 들어왔던 입구가 사라졌단 걸 느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상황이었으나 차분함은 유지되었다.
루카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펼쳐진 정경을 바라봤다.
검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래에서 봤던, ‘멸망의 폭포’. 그것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다. 마법사들이 ‘가장 짙은 어둠’ 같은 이름을 붙인 경위는 짐작이 갔다. 육안肉眼으로는 이것에서 어둠밖에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는 그곳에서 빛도 보고 있었다.
빛은 강 위에 연꽃의 형태로 서서히 떠내려오고 있었다. 가까워질 때쯤, 그것에 깃든 것이 보였다.
기억이었다.
─가끔씩은.
…목소리.
─주변 사람들이 역겨워서 못 참겠단 말이지.
루카스의 목소리가 아닌.
─노력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단 말일세. 그저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엉엉 우는 자들, 스스로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는 어린아이들이지.
비기닝 위저드의 목소리.
언젠가 나눴던 대화의 일부.
─흙을 먹고 토하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고 혼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러한 광경을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억 번, 수조 번 보게 되면…….
─어느 순간 그들이, 조금 똑똑한 원숭이처럼 보일 때가 있네.
그건 루카스의 가장 비밀스런 치부였다.
한때 모든 인간의 신을 자처한 존재가 품기엔 너무나 불경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생각.
그것이 다른 존재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땐 가슴이 철렁였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은 루카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비난하지도 모욕하지도 않았다.
─긍정해줬다.
루카스는 정말 뒤늦게,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그게 얼마나 기적적이며, 또 감사한 일인지.
─누군가 대신해 줘.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 대신해 줘.
…비기닝 위저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 *
─동생이 태어날 거란다.
친모의 얼굴은 원활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오래된 페이지의 글자처럼 흐릿했다. 사실 기억하는 목소리가 맞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동생이요?
─그래.
─그럼 제가 형이 되는 건가요?
─오빠일 수도 있지만, 나도 아들이면 좋겠구나.
─…….
─잘 보살피고, 지켜 주렴.
─제가요?
─그래. 형이니까.
그때의 기억 대부분이 낙엽처럼 바스러진 가운데, 그녀가 남긴 말과 작은 가슴 속에 차올랐던 기대감만은 여전히 또렷했다.
하지만 어린 마크가 가졌던 기대감은 결과적으로 피어나기도 전에 사그라지게 됐다.
태어날 동생을 제대로 눈에 담기도 전에 이별하게 된 것이다.
후계자, 정치, 암약, 장남, 차남…….
그 이유조차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후 마크는 동생의 존재를 잊었다.
잊고 살아갔다.
아주 오랫동안.
* * *
마크 트로우맨에게 책임감이란 애증의 단어였다.
─마크! 학원의 상급생들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겁박했어! 어쩌지?
─내가 얘기해 볼게.
철이 들 무렵부터 그 단어에 담긴 무게를 알게 됐다.
─최근 삼림의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소.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적당한 우수함은 축복이 되지만, 도를 넘는 순간부턴 저주와 다를 바 없단 것도 알게 됐다.
─데미갓이란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네. 그들은, 인간의 무력과 지식으로는 맞설 수 없는 존재야…….
─…제게 맡겨 주시옵소서.
세상엔 문제가 많았고, 마크는 그것들을 풀 방정식을 알고 있었다.
어려운 건 아니었고, 대단한 일은 더욱 아니었다.
─앗, 저기 봐!
─저분이 바로 인류역사상 최강의 마법사인…….
─정말 대단해. 영웅의 귀감이셔.
하지만,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우리 따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숭고한 것이겠지.
하지만 세상은,
─그대 같은 선인善人이 실제로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존경할 만한 사상을 가지셨군요.
─당신이 세운 업적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마크를 멋대로 판단하고, 기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책임을 멋대로 전가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마크는 속으로 홀로 중얼거렸다.
영웅? 선인? 숭고해?
전부 틀렸다.
마크는 그저 해결 방법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요소를 빼면 모든 게 그들과 같았다.
그래서 가르치려고 했다. 끈기를 갖고,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하면 자신처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마크처럼 되고자 했던 이들은 도중에 포기하거나, 죽어 나갔다.
그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마크는 어느 순간 가르치는 걸 단념하고 말았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제 영웅입니다.
─부디 대마도사님의 앞길에 무궁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왜지?
왜 저들은 나의 업적만을 조명하고, 나의 살업殺業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가?
누군가를 구한다는 건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인데.
저들이 마크를 세상에 둘도 없는 구세의 영웅으로 여길 거라면, 동시에 역사상 최악의 살인마로도 여겼어야 했다. 그것이 공정한 판단이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이 갔다.
반드시 도움을 청해야 한다면, 그 상대론 살인마보다 영웅이 낫지 않겠는가.
역겨운 자들.
진심으로 질려 버렸다.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마저 스스로의 양심이 우선이란 말인가.
“큭큭큭…….”
마크는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그런 모습만 알게 됐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하지만 인간은 그런 일면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마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자들도 있어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동료들도 분명히 존재해서, 가련하고 연약한 모습이 더 없이 사랑스러워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내팽개칠 수가 없었다.
내가 돌보지 않으면, 이 무지하고 약한 자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세상은 평화란 단어와 거리가 멀었고, 사람을 위협하는 적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마크는, 그러한 생각을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가뒀다. 다시는 나오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봉인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마음껏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열망은 방치당한 덩굴처럼 기분 나쁘게, 하나 착실히 자라났다.
때때로 묻어뒀던 감정이 급격히 솟아올라 그의 정신까지 침범했고, 그때마다 도망치고 싶다는 열망은 더욱 커져 갔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바람은 바뀌었다.
도망逃亡에서, 전가轉嫁로.
─나 대신에.
─나와 똑같은 존재가.
─나의 책임을 대신 짊어졌으면…….
하지만 그런 기적은 마크의 생전에 찾아오지 않았다.
단 한 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