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17화
“멸망이 왜 다섯 형태로 존재하는 걸까? 그 이유는 무엇인가.”
멍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구슬 밖]을 경험했겠지. 그곳이 어딘지, 그때의 나는 어떤 존재였는지, 그런 게 얼마나 더 있는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네. 그때 경험하고, 느끼고, 눈치챘던 것들도 다시 이곳에 오는 순간 안개처럼 사라지기 때문이지.”
루카스는 추방자의 말을 떠올렸다. 그 또한 자신이 겪은 일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꺼내는 말은, 물질계의 일원인 비기닝 위저드로서의 견해가 될 걸세.”
그 차이점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듯, 비기닝 위저드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멸망의 형태는 처음에 한 가지였네. 그것은 동시에 창조創造기도 했지.”
“…무슨 의미지?”
“조금 유치한 표현을 써야겠군. 자네는 신神이란 존재를 알고 있지? 직접 보기도 했고, 대화도 나눴겠지. 어떻던가?”
질문의 의도가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무엇이.”
“직접 본 소감 말이야. 무능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 유일신이라는 명함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라 여겼을지도 모르고. 실제로 그는 허의 세계에 끌려와 처형됐지. 창조주치고는 너무 비참한 결말이었네.”
“…….”
“그건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은 존재였다. 자신의 죽음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겼지만, 전혀 그러지 못했으니 말이야. 그것이 세운 유일한 업적은 자네를 허의 세계로 데려온 것과 군림자를 만든 것 정도겠지.”
비기닝 위저드가 큭큭 웃었다.
“자네라면 어렴풋이 그렇게 여겼을 거야. 이자는, 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난 그런 생각은.”
“했어. 무의식적으로라도 했겠지. 내가 보증하겠네.”
기묘한 순간이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타인이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비기닝 위저드의 묘한 관계성 때문에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우선 축하부터 해야겠군. 그 추측은 진실이야.”
“뭐?”
“태초신, 아무것도 없었던 때에 존재했던 ‘유일한 하나’, 우주라는 구슬 안에서만큼은 가장 전능했던 존재가 있었네. 그 존재 또한 ‘밖’에서 왔는지, 혹은 그 존재의 여파가 ‘바깥’에까지 영향을 끼친 건지… 그것까지는 알지 못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할 걸세.”
그제야 루카스는, 비기닝 위저드가 가장 앞서 말한 ‘가장 유치한 표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태초신이라고? 이제 와서 그런 존재를 들먹이는 건가?
얼굴이 없다는 건 다행일지도 몰랐다. 만약 안면 피부가 있었다면 이 순간 냉소를 참지 못했을 테니까.
“태초신에겐 의지가 있었네. 거대한 의지였지. 그것은 자네가 알고 있는 신처럼,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지 않았네. 그럼에도 세계는 만들어졌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네. 생명체가 호흡하며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듯, 그것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네. ─최초의 창조가 이뤄진 셈이지.”
물론, 우리가 구슬 속 세계에서의 얘기지만.
비기닝 위저드는 웃음 섞어 그리 덧붙였다가, 뚝 정색했다. 자신의 농담이 웃기지도, 적절하지도 않았단 걸 눈치챈 것이다.
“감히 기록할 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고, 그 존재는 불현듯 자신의 역할과 운명을 깨달았네. 창조와 멸망은 거대한 범주 안에선 큰 차이가 없었고, 자신은 그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해야 함을. 그래.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것들을 스스로 지워야만 하는 처지가 된 걸세.”
약간의 간격을 두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첫 번째 멸망이 자신의 역할을 자각한 순간이지.”
“…….”
“하지만 태초신은 자신이 멸망이 되기 전에 안배를 마련했네. 의도를 가진 첫 번째 창조, 그로 인해 두 존재가 탄생했지. 자네가 신과 허왕으로 알고 있는 존재네.”
“그렇다면 신과 허왕은…….”
“인간적인 표현이지만, 형제라 부를 수도 있겠지.”
루카스는 침묵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혜의 샘으로 엿봤다.
결국 허왕이 어떤 존재가 됐는지.
그렇다면, 돌연 사라진 신 또한…….
“첫 번째 멸망이 들이닥쳤을 때, 신과 허왕은 그것과 맞서 싸웠네. 어떻게 됐을까?”
“…이긴 것인가?”
일단 세상이 아직까지 멸망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서, 루카스는 그리 물었다.
“아니. 패배했네. 처참하게. 하지만 유예는 얻었지. 두려운 일이 일어났지만.”
“두려운 일?”
“이걸 명심해 두게.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결국 핵심적인 멸망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야. 때문에 99의 힘을 가진 존재 수억보다, 100의 힘을 가진 자 1명이 더 중요하지. 그러한 법칙이고, 때문에 신은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삼천세계의 인물들이 흔히 절대자로 이해하고 있는 존재들은 그 부산물이지.”
비기닝 위저드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군림자? 분명 강하지만 부족해. 그것이 온전히 하나의 존재였을 때면 몰라도, 넷으로 분리된 지금은 턱도 없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발언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왔다.
“군림자가 하나의 존재였다고?”
“이런. 그것까지는 아직 알지 못했나? 상관은 없겠지. 이제 더 이상 자네에게 숨겨야 할 건 없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다른 군림자는 몰라도, 일곱 이빨의 용과 같은 경우는─”
“애초에 일곱 절대자가 합쳐져 탄생된 거라고? 아니야. 원래 하나였던 존재가 7개로 나뉜 것이지. 용이 물려받은 건 그러한 특성이었으니까.”
“…….”
“이것에 대해선 더 이상 깊게 알 필요가 없네. 기껏해야 자네 속에 머물게 된, 그 가여운 잔념을 위로할 때나 쓸 수 있겠군.”
레시듀의 의식이 여기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이번 모욕은 루카스 입장에서 보기에도 선을 넘은 것이었다.
비기닝 위저드는 이야기를 되돌렸다.
“때문에 신과 허왕, 두 존재가 힘을 합쳐 멸망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결정적인 때’에 발버둥 칠 수 있었던 건 허왕뿐이었네. 그리고 허왕은 패배했지. 패배한 이후엔 어떻게 되었을까.”
허왕의 최후,
지금 그가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부터 결말을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멸망화滅亡化.”
그것이 적합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루카스는 말했고 비기닝 위저드는 동의해 줬다.
“그렇다네. 허왕은 두 번째 멸망이 됐지. 결과적으로 약간의 유예를 얻긴 했지만, 하나라도 막기 힘든 멸망이 두 개로 불어났네. 난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고찰했지만, 과연 일이 좋게 흘러간 건지 나쁘게 흘러간 건지 아직까지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네.”
“…그렇다면 4기사가 신을 증오하는 이유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허왕을 죽인 게 신이라고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
“물론 4기사 또한 신이 무언가 숨기고 있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존재는 죽기 소멸 직전까지 진상을 숨겼다. 그 생각엔 나도 동의한다. 멸망에 대한 진실은 최대한 비밀스럽게 다뤄져야 해. 아는 이가 많아질수록 혼란만 커질 테니까.”
그래서 아무런 반항도 없이 처형당했다는 것인가.
그 주인 없는 왕성에서.
“…자네가 기억하는 신은 애초부터 찌꺼기였을 거야. 가장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랬겠지.”
루카스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면 첫 만남 때부터, 신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신은.”
“이미 죽고, 세 번째 멸망이 되었네.”
비기닝 위저드의 옆에 떠 있는, 중년 남자의 가면이 새하얗게 눈에 들어왔다.
“…한 명, 신이 생전에 해두었던 모든 안배는, 단 한 명의 절대적 존재를 탄생시키기 위함일세. 그리고 루카스 트로우맨, 자네는 신의 계획에 가장 안성맞춤인 존재였겠지. 자네의 삶이 시련투성이였던 이유는 간단해. 삼천세계를 만든 존재가 그걸 바랐기 때문이야.”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루카스는 놀라움보단 분노를, 분노보단 허탈함을 느꼈다.
그 순간에도 두뇌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한 명의 절대적 존재.
──한 명.
“…독선獨善.”
루카스는, 비기닝 위저드가 끊임없이 강조했던 그 말을 떠올렸다.
“내가 한 가지 알고 있는 건 말일세, 멸망이란 존재가 자아自我를 가진 기적의 시간 동안, 그들은 모두 필사적으로 동일한 행동을 벌였단 것이야. 멸망이 될 나 자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었지. 태초신이 형제를 낳았던 것처럼, 신은 군림자를 만들고 절대자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허왕은 4기사와 십이허주란 존재를 탄생시켰지.”
“그게 무슨 의미가…….”
“의미가 없는 필사적인 행동을, 우리는 발버둥이라고 부르지.”
비기닝 위저드의 가면이 투명하게 루카스를 바라봤다.
“낯설군. 자네가 발버둥에서 의미를 찾는 건가? 이미 비슷한 짓을 했으면서.”
차가운 바람이 살결을 훑는 것 같았다.
“보험이라고 했나. 자네가 멸망과 접촉하기 전에 몇 가지 안배를 두었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난 내 죽음 이후를 대비한 것뿐이야. 내가 멸망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건 폭포에 접촉한 이후라고.”
“죽음만을 느끼진 않았겠지.”
기긱, 긱.
불협화음.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본능이나 예감을 뛰어넘은 무언가였을 걸세. 이상한 건 아니야. 자네는 멸망이 될 존재가 응당 해야 할 일을 수행한 것뿐이니까.”
그럼에도 비기닝 위저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가진 의문은 보다 근본적이네. 왜 우리는 멸망이 됐을까? 어쩌면 애초부터 멸망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스스로 의지하고, 발버둥 치는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 또한 ‘바깥’의 존재가 미리 설정한 상황에 불과하다면, ‘나’라는 자아自我마저 바깥의 인물들이 정의한 것이고, 이 모든 게 어떤 거대한 존재의 심심풀이 유희遊戲일 뿐이라면…….”
그러한 의문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루카스는 침묵했다.
“…[구슬 바깥]에 있는 다섯 존재는 무엇인가? 정말로 다섯이긴 할까?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해선 아무런 단서도 없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을 걸세. 아마도 나라는 자아가 완전히 사라지고, 비로소 네 번째 멸망이 되면 깨닫게 되겠지…….”
목소리가 차츰 흐려졌다.
“자네는 언제고 멸망으로서 각성할 테지만, 아직은 아니야. 이곳에 올 때가 아니란 말일세. 왜냐면, 자네야말로 나와 신이 마련한,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대비책이기 때문이지.”
“…….”
루카스는 침묵했다.
스스로의 두뇌가 결코 둔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쏟아지는 일련의 이야기를 완벽히 이해하는 건 어려웠다.
그럼에도 비기닝 위저드의 설명에 있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게 무엇인가.
“이번에 얻은… 이곳을 …나서─”
치지직, 칙.
“4기사… 십이허주와… …림자…….”
치직, 칙.
비기닝 위저드의 목소리에 강한 노이즈가 섞이기 시작했다.
노인의 가면이 덜컥 낙하하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루카스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때.
“─루카스 트로우맨.”
목소리가 들렸다.
비기닝 위저드와 다른 목소리. 들은 적 있는 목소리.
고개를 돌려서, 가면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중년 남자의 가면.
비기닝 위저드의 말에 따르면, 세 번째 멸망.
다른 이름은, 신.
이미 자아를 잃었을 존재가, 루카스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