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12화 (633/857)

외전 412화

[왜 받아들인 거냐?]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계집은 네게 동행을 요구했으나, 네놈이 거절했다면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진 않았을 것이다. 잠자코 수긍한 채 물러났을 거란 뜻이다.]

‘…….’

[설마 감정이 되살아나는 기적이 벌어질 거라 예상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부탁이니 유치한 기대는 집어치워라, 루카스. 저 계집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나? 저것은, 영구적인 소실이다…….]

영구적 소실.

루카스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앞으로 민하린이 세상을 둘러보며, 어떠한 장면, 혹은 새로운 인연에 커다란 자극을 받아, 메말랐던 감정이 기적처럼 샘솟는다고 해도 그건 얼마 안 가 꿈결처럼 증발한다는 뜻이다.

‘밑바닥 우주가 가진 영향력이 그토록 끈질기단 거냐? [거래]가 끝난 이후에도 영구적으로 따라다닐 만큼?’

가령 민하린의 그릇이 ‘밑바닥 우주’를 포괄할 만큼 커진다면, 놈들이 새긴 주박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도 분명 품었다.

하지만 레시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루카스의 말을 부정했다.

[…밑바닥 우주는 단순한 시스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단순한 시스템?’

[특정 조건을 만족한 자를 소환한 다음, 무언가를 대가로 강함을 주거나 혹은 강해질 수 있는 비전을 전해 준다……. 그것에 누군가의 의지가 적용되어 있는 것 같나?]

‘…….’

[물론 밑바닥 우주를 만든 존재가 분명 있겠지. 신이건, 아니면 이 몸조차도 알지 못했던 어떤 존재건.]

레시듀는 변했다.

녀석의 말투엔 여전히 오만함이 묻어났지만, 유아독존적인 사고방식에는 분명 변화가 생겼다.

그렇기 때문에 루카스는 레시듀의 말을 잠자코 경청했다.

[중요한 건 밑바닥 우주가 단지 시스템에 불과하다면, 그곳에서 얻은 제약은 지금 저 계집과 일체화된 상태일 것이다.]

‘하린이가 성장할수록, 제약 또한 강대해진다는 뜻인가.’

[그렇다. 왜냐면, 앞으로 저 계집이 얻게 되는 강함은 원래라면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성장 또한 제약 덕분에 가능한 거니까.]

…지독한 일이다.

루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종류의 시스템이라면, 만에 하나 루카스가 ‘밑바닥 우주’란 곳을 직접 찾아가 박살을 내도 민하린에게 감정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네 말은 모두 맞을 거다. 하나만 뺀다면.’

[뭐냐.]

‘네가 말한 유치한 기대 같은 건 나도 하지 않아. 그래서 하린이를 당분간 곁에 두려는 거다.’

[무슨 뜻이냐?]

‘관찰해야 알아낼 수 있을 거 아닌가. 하린이의 감정을 되살릴 방법 말이다.’

[그딴 방법은 없─]

‘있어.’

레시듀의 말을 끊듯이 말하고, 어이없어하는 녀석에게 덧붙였다.

‘…물론 지금은 짐작도 가지 않지만.’

그래도,

세상에 결코 찾을 수 없는 소실물이란 없으니까.

* * *

‘희망초’를 찾는 데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시간이 소모됐다. ‘멸망의 폭포’로 세계 그 자체에 금이 가, 루카스가 알고 있는 탐지 수단들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얼음정령, 아마도 ‘바이오프로스트’라는 이름을 가졌던 녀석의 도움을 받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건 초거대균열, 크레바스의 깊숙한 곳에 있었다.

크레바스의 밑바닥, 표면으로부터 수백 미터 지하엔 얼음 한 조각도 없었다. 루카스는 그곳에서 강렬한 정기正氣를 느꼈다.

그곳에 희망초가 있었다. 그건 화사한 호박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크기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작았다.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뿌리까지 합쳐도 루카스의 종아리를 넘지 않을 것 같다.

“괜찮나? 이렇게 순순히 줘도.”

[제가 저지른 무례에 비하면 값싼 대갑니다. 1,000년에 한두 송이 정도는 피어나니 문제도 없고요.]

얼음정령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녀석은 생각보다 더 오래 살아온 듯하다.

“고맙다.”

루카스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뿌리를 손상하지 않은 채 도려냈다. 희망초는 지면에서 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기를 조금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마 이 상태로 수십 년을 내버려 둬도 썩지 않을 것이다.

민하린은 희망초를 소중히 갈무리했다. 당분간 루카스와 함께 움직일 테지만, 언젠가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다.

그리고 둘은 미련 없이 23층, 빙하지대를 떠났다.

이미 경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에, 루카스는 다음 층으로 이어지는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24층은 미로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루카스와 민하린은 그 한중간쯤에 출현한 듯했는데, 미로는 정원에나 있을 법한 귀여운 사이즈가 아니었다. 벽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게 세워져 있어, 마치 거인을 위해 마련된 것 같다.

다만 미로는 파손되어 있었다.

벽채로 손상되거나 심한 쪽은 아예 무너져 있어서, 누군가를 헤매게 만든다는 본연의 역할을 충족시킬 순 없을 듯하다.

“여기도 [마탑의 마법사]란 존재는 없는 것 같네요.”

민하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시각을 잃은 대신, 파동波動과 영혼靈魂으로 된 세계를 볼 수 있게 됐는데, 어떤 의미에선 루카스보다 더 예민해진 구석도 있을 것이다.

루카스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로부터 흘러내리는 ‘멸망의 폭포’가 여전히 보인다.

처음 동굴을 습격했던 빗물 같은 형태의 재앙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러한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폭포는 기분 나쁠 정도로 평화롭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좀 더 위로 가보자.”

레시듀의 말마따나, 위층으로 갈수록 사건의 진상에 가까워질 테니까.

하지만 25층에서도, 26층에서도 마법사를 만나진 못했다. 시체조차 없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안감이 점점 뚜렷해지는 것 같다.

‘멸망’과 조우하기 전에, 한 명이라도 좋으니 마법사와 만나고 싶었다.

레드룬과의 대화로 짐작해 볼 때, 마탑은 지금 일어나는 이상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듯 보였으니까.

지금 루카스에게 필요한 건 정보다. 비기닝 위저드에 대해서도 물어볼 게 있고.

‘설마 이대로 꼭대기 층까지 아무도 못 만나는 건 아니겠지.’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11층에 있는 레드룬이나 22층에 있는 빌라에게 가볼까.

그들은 위층과 통신이 가능한 듯하니,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하고 있을 터. 물론 외부인인 루카스에게 순순히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지만, 이쪽도 점잖게 체면 차릴 여유는 없다.

조금 난폭한 수단을 써서라도, 어떻게든…….

“…….”

루카스는 뒤이어 민하린의 존재를 깨닫고, 해당 계획을 폐기했다.

누군가를 협박하는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지.

루카스는 고민했으나, 이러한 생각은 결과적으로 다음 층, 27층에 발을 들인 순간 더 이상 쓸모없게 됐다.

“안녕하십니까.”

그곳엔 루카스가 찾아 헤매던, 마탑의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카스 트로우맨.”

노란색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 * *

고개를 든 남자는, 뒤이어 곤혹스런 얼굴이 되었다.

그의 시선은 루카스가 아닌 그의 옆쪽을 향하고 있었다.

“누구입니까?”

물론 민하린을 말하는 것이다.

루카스는 대답에 앞서 우선 물었다.

“그러는 너는?”

“전 발탁이라고 합니다.”

“…세븐즈 매지션인가.”

레드룬, 빌라, 알타타에게서 느껴졌던 특유의 기척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부족한 몸이지만, 그러한 직책도 가지고 있죠.”

“여기는 27층일 텐데.”

속칭 ‘쌍층’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아니다.

발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원래 저의 담당 구역은 33층입니다.”

“…….”

주변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6층이나 밑, 발탁은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저는 제 정체를 밝혔습니다. 다시 한번 묻지요. 그녀는 누굽니까?”

일문일답을 수긍한 건 아니었지만, 루카스는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내 제자다. 23층에서 우연히 재회하게 됐고, 사정이 있어 당분간 동행하기로 했지.”

“…23층.”

잠시 침묵하던 발탁이 물었다.

“‘로스터’는, 그곳에 있던 남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어.”

“…그렇습니까. 유감이군요.”

발탁이 잠시 씁쓸한 얼굴을 했으나, 크게 놀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 예상한 듯한 반응이다.

“마탑은 삼천세계의 한정된 공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만, 원래라면 해당 공간엔 바깥의 인물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지요. 아무래도 이상 현상의 여파로 그러한 제한도 사라진 듯합니다.”

“…….”

“혹시 피치 못할 일에 휘말린 겁니까? 23층의 세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든가. 만약 그렇다면, 제 힘으로 그녀를 ‘바깥’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습니다.”

“아뇨.”

대답한 건 루카스가 아닌 민하린이었다.

“전 스스로의 의지로 이 자리에 서 있어요.”

“각오는 마치셨다는 거군요. 잘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허용되지 않을 일이지만, 지금은 사소한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니 넘어가죠.”

발탁은 사무적인 태도로 말한 뒤, 다시 루카스를 보았다.

“지금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테죠.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루카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27층은 마법사의 공방工房으로 보이는 장소였다. 어둡고, 축축하고, 먼지 냄새가 나는 장소.

개방된 곳은 아니라서 ‘멸망의 폭포’가 보이지는 않았으나, 27층이 그것의 영향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이 세계 또한 앞서 보았던 곳들처럼, 당장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롭다.

“우선 제가 관할 구역인 33층이 아닌, 27층에 대기하고 있었던 이유는 루카스 님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확인할 게 있었으니까.”

“확인이라고?”

“예.”

“그게 네 목적이라면 빨리 끝내라. 난 한시라도 빨리 위로 올라가야 하니까.”

“어째서죠?”

루카스는 짜증을 내려다 참았다.

“…몰라서 묻는 건가. 마탑을 쑥대밭으로 만든 멸망의 폭포, 그게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지 찾기 위해서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발탁이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멸망의 폭포, 당신이 그리 명명한 현상을 두 눈에 담았지 않습니까. 그것에 맞설 방법이 있었습니까? 처리할 방법은? 아니, 잠시 지체시킬 수 있는 수단은 있습니까?”

“…….”

“없겠죠. 그래서 저는, 당신이 의심스럽습니다.”

“…의심?”

“예.”

발탁의 눈동자에 일순 서늘한 빛이 깃들었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얘기하겠습니다. 우선 멸망의 폭포를 발생시킨 원흉, 즉 당신이 찾는 근원지는 최상층에서부터 발생했습니다. 우린 그걸 임시적으로 [가장 짙은 어둠]이라 부르기로 했죠.”

…가장 위층,

루카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비기닝 위저드가 있는 곳 말이냐? 놈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상황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닐 텐데.”

발탁은 물끄러미 루카스를 바라보다가, 하나씩 대답했다.

“영주님의 방은 탑에 존재하지만, 속했다고는 볼 수 없는 개별적인 공간입니다. 제가 말한 가장 위층은 77층을 의미하는 거였고요. 그리고 현재, 영주님과의 연락은 끊어진 상태입니다.”

“…끊어졌다면, 설마.”

“아닙니다.”

발탁이 고개를 저었다.

“영주님께서는 살아 있습니다. 구도자라면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설명을 잇도록 하죠. 가장 짙은 어둠은 77층부터 한 층씩 떨어지며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만, 그 속도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때론 빨랐고, 때론 느렸으며, 심지어 가만히 멈춰 있을 때도 있었으니까. 그러다 세븐즈 매지션 중 한 분인 ‘하이크’ 님이 깨달았죠. 어둠의 이동 패턴에 대해서.”

이동 패턴.

그게 어둠의 정체, 혹은 공략법에 대한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한 순간, 발탁의 손가락이 루카스를 가리켰다.

“당신입니다.”

“…무슨.”

“어둠의 속도는 당신과 완전히 일치해 있었습니다.”

루카스의 몸이 굳었다.

“무슨, 뜻이지.”

“어둠이 출현한 건 꼭대기 층, 즉 77층이죠. 그곳에서부터 한 층씩 아래로 내려오고 있고.”

“…이미 했던 설명이지 않나.”

“예. 하지만 전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제 얘기를 듣고 이상함을 느낀 부분이 없습니까?”

루카스는 잠시 침묵했다.

발탁의 말에 조금 뜨거워졌던 머리를 차갑게 식히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위화감들이 여럿 느껴졌다.

“…최하층이 아닌 최상층에 출현했고, 한 층씩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예.”

발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이 가진 파괴력은 당신도 알고 있을 터. 마음만 먹으면 꼭대기 층에서 1층까지 박살 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눈 깜박할 사이 탑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어둠은 기분 나쁠 정도로 철저히, 한 층 간격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

“때론 아예 움직임이 멈출 때도 있었습니다. 층을 완전히 침식했음에도 해당 구역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 55층에서 벌어진 일이죠.”

“…55층.”

그렇게 말해도, 루카스는 54층이 어떤 세계인지 모른다.

발탁은 물끄러미 루카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역순으로 볼까요. 꼭대기 층을 1층으로, ‘어둠’은 탑을 오르고 있는 것이라 가정해 봅시다. 55층은 어둠의 입장에서 23번째 세계가 됩니다.”

발탁이 강조해서 말했다.

“23, 23층. 무언가 느끼는 게 없습니까.”

“……!”

루카스의 표정이 굳었다.

빙하의 세계,

얼음정령 바이오프로스트와 민하린을 만난 세계.

그리고 희망초를 찾기 위해서, 루카스가 다른 곳보다 비교적 오래 머물렀던 세계.

─23층.

“어둠은, 당신과 똑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당신이 한 층 올라가면, 어둠은 한 층 내려오는 식으로.”

조우한 적 없는 어둠,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른다.

그런데도 루카스의 가슴 한쪽엔 외면할 수 없는 섬뜩함이 피어났다.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어둠의 근원지를 봐야 한다고 하셨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발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39층. 1층과 77층의 중간 지점에서, 당신은 어둠과 조우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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