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09화
마탑의 마법사가 살해당했다. 드러난 상황과 증거들이 자살이라는 확률을 배제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살해란 건 혼자선 이뤄낼 수 없는 개념이다.
그리고 루카스는 이 드넓은 설원에서, 생명의 기척을 단 한 명밖에 느끼지 못했다.
[이 남자가 77탑 출신의 마법사인 건 분명한가?]
레시듀는 우선 다른 확률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틀림없어.”
[어떻게 확신하지?]
“이 로브.”
루카스가 싸늘하게 굳은 로브를 손바닥으로 툭 건드렸다.
“모든 관리자가 로브를 입고 있던 건 아니지만, 입고 있던 자들의 로브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공통점?]
“그래. 특별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어.”
[고작 그런 걸로…….]
“고작이라고 할 만한 게 아냐. 난 이 로브에 섞인 ‘무언가’가 어떤 건지 해명하지 못했다.”
한번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짐작조차 가지 않아. 비기닝 위저드의 가면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군.”
[호오…….]
“…가면을 구성하고 있던 것과 동일한 물질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이 마법사가 바깥 세계의 존재면, 마탑의 인물들만이 가졌던 공통점을 지녔을 확률은 무척이나 낮지.”
[그렇군.]
레시듀가 뒤늦게 납득했고, 루카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보라가 휘몰아치지 않는 이 지역에선 새까맣게 펼쳐진 밤하늘의 모습이 쉽게 보였다.
…이 우주는 어떤 장소일까?
마탑과 이어져 있는 삼천세계 중 하나지만, 루카스가 파악하고 있는 건 거기까지다. 이 우주가 어떤 특색을 가졌는지는 물론이고, 지금 서 있는 이 행성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다.
어쩌면 전 지역이 얼어붙은 얼음 행성 같은 걸지도 모르지.
…그런 곳에서 민하린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희망초’를 찾는 것? 아니. 그건 민하린이 하려는 ‘어떤 일’을 위한 준비물에 지나지 않는다.
민하린은 스스로의 목적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루카스는, 그녀가 진행하려는 어떤 일이 뭔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마탑에 들이닥친 어떤 혼란,
설마 그건 민하린과 관련이 있는 건가?
만약, 그녀가 하려는 일이 마탑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 혹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파괴 그 자체에 있다면…….
[너도 결정을 해야겠지.]
레시듀가 중얼거렸다.
‘…사정을 듣고 난 이후의 문제다.’
루카스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도 힘을 제약할 생각은 아니겠지?]
“…….”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얇은 벽 너머로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보였다. 여기 오기까지 30분이 조금 넘게 걸렸던가.
루카스는 다시금 차가운 눈발 속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달라진 점이 있었다. 눈보라가 루카스의 몸에 맞닿은 순간 안개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순식간에 액체가 되어 녹아내렸고, 바닥을 적시기도 전에 증발한 것이다.
푸시이익, 루카스의 주위로 엄청난 수증기가 폭사되었다. 그가 내뿜은 열기는 주변 환경은 물론, 기후에까지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건방진 놈이로구나!]
불호령처럼 거센 음성이 귓전에 내리꽂혔다.
루카스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조금 위로 올렸다.
휘오오오-
사라졌던 눈보라가 다시금 휘몰아치며, 이형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힘을 개방한 지금, 그게 어떤 존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얼음정령’, 품고 있는 잠력이 제법 대단하다. 최소한 정령왕급.
어쩌면 이 인근을 지배하는 것만이 아닌, 행성의 주인일지도 모르겠다.
[대체 누가 나의 거처에서 열기를 터뜨리는 건방진 짓을 저지르나 했더니, 마탑의 마법사였는가? 지금 행위가 명백한 협정 위반이란 걸 이해하지 못했는가.]
“난 마탑의 마법사가 아니야.”
루카스가 짤막하게 대꾸하자, 얼음정령이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너는 이 세계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보다 훨씬 급작스러운 등장이었단 말이다. 그게 마탑의 수법이란 걸 내가 모를 것 같은가.]
자신과 마탑의 관계를 설명하는 건 몹시 귀찮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얼음정령은 무척이나 분개해 있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루카스는 자신이 걸어온 쪽, 마법사의 시체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저쪽을 봐라. 저 시체야말로 네가 협정을 맺었다는 마법사가 아니었나?”
[…저건.]
얼음정령의 시선이 루카스 어깨 너머를 향했다.
“내가 왔을 땐 누군가에게 이미 공격당해 죽어 있었─”
[이제 보니 마탑의 마법사가 아니라 침입자였구나!]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착각하지 마라. 내가 아니라 다른 어떤 존재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온 것이더냐! 이 ‘바이오프로스트’가 그리도 우습게 보였더냐!]
“…그러니까, 나는 저 현장의 발견자일 뿐이라고. 내가 저 마법사를 죽였다면 이렇게 대놓고 너한테.”
[네놈들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침 잘됐다……! 네게 겨울의 혹독함이 얼마나 시린지 일깨워 줄 것인즉!]
“…….”
뚝 하고, 루카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겼다.
[좀 패라.]
레시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역사적으로도 그게 약이었다.]
* * *
잠시 후, 얼음정령이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절대자님을 몰라봤습니다.]
“…….”
루카스는 절대자가 아니었으나, 얼음정령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지금 스스로의 상태를 몇 마디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날렸군.’
쯧, 혀를 차며 루카스가 얼음정령을 노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움찔 떠는 모습이지만 동정심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냥 콱 없애 버릴까.
루카스는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억누른 채 말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이 일대의 지배자라면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을 터. 알고 있는 걸 말해 봐.”
잠시 우물거리던 얼음정령이 내뱉었다.
[모릅니다.]
“뭐?”
[저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
[저, 정말입니다. 전 사실 방금까지 정신을 잃은 채로 있었습니다.]
루카스가 멈칫했다.
“…정신을 잃었다고? 정령인 네가?”
[그렇습니다. 저도 수천 년 만에 처음 있었던 일이라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식이 돌아온 이후엔 본래 힘의 100분의 1조차 내지 못하게 됐습니다.]
얼음정령이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나 이외에 다른 침입자에 대해서는?”
[예?]
“저 방향에 있는 동굴에 사람이 한 명 있다. 넌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도 몰랐나?”
[예, 예.]
얼음정령이 면목 없는 얼굴로 말했다.
루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지금의 민하린이라면, 얼음정령의 이목을 피해 살해를 저지르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지만, 정신을 잃었다는 대목이 신경 쓰인다.
[…아.]
문득 얼음정령이 목소리를 냈다.
[마, 말씀드려도 될 만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절하기 직전에 새까만 어둠을 본 것 같습니다.]
“새까만 어둠?”
[예. 솔직히 꿈을 꾼 것처럼 흐릿하긴 하지만요.]
“…….”
루카스는 그 이후에도 얼음정령에게 몇 가지 더 물어봤으나, 더 이상 건질 만한 건 없었다.
녀석을 놓아준 다음, 다시 동굴을 향해 갔고 눈 깜박할 사이 도착할 수 있었다.
“…….”
동굴 안,
민하린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고개는 떨군 채로, 떠날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
잠에 든 것보단 상념에 빠졌거나, 고찰을 하고 있거나, 혹은 수양의 도중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그 모든 게 진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민하린은 깨어 있었고, 그녀의 주의는 루카스에게 향해 있었다.
“말도 없이 나가셨더군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하나밖에 없는 눈이 뜨였다.
“어딜 갔다 오시는 길인가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루카스의 의중을 묻듯 다가왔다.
“네가 왔던 곳.”
“…….”
서로 시선이 오갔다.
민하린의 눈동자는 거울이 아닌 유리였다.
빛을 담지 못하는 유리는 아무것도 비출 수 없고, 담을 수도 없다.
하지만 루카스는 반쯤 홀린 듯한 심정으로 그 눈동자를 계속 지켜봤다.
이윽고 그녀가,
“─루카스, 트로우맨.”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놀라거나, 혹은 무언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그 순간 동굴 천장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얼음 섞인 돌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지는 가운데, 동굴을 부순 진짜 원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거무튀튀한 형태의 액체처럼 보였는데, 떨어지면서 길쭉한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마치 끝없이 늘어나는 고드름처럼, 그 액체가 지나온 곳은 붓으로 그은 것처럼 새까만 균열이 남았다.
─돌연 느껴지는 섬뜩한 공포에 가슴 한쪽이 오싹해졌다.
루카스는 이 공포를 겪은 적이 있었다.
지혜의 샘을 통해서 보았던 ‘멸망’.
그 멸망이 두르고 있었던 어둠, 그걸 조우했을 때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감각.
콰아아!
루카스는 망설이지 않고 보이드를 펼쳤다. 스스로 정해 둔 제약에 대해선 이 순간 까맣게 잊었다.
꽈앙!
펼쳐낸 보이드는 방벽의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떨어진 어둠의 물방울은, 마치 강한 산성이라도 가진 것처럼 방벽을 그대로 뚫었다. 아무런 지체도 없어서, 마치 통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루카스는 자신이 펼친 보이드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단 사실에 경악했다.
[전지의 힘을 펼쳐라!]
레시듀의 조언에 따라 ‘우레’를 끌어올려 전지를 사용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정보의 형태가 되어 뇌에 빨려 들어왔다.
“……!”
그리고 루카스는 어둠의 물방울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됐다.
그건 죽음이었다.
소멸이었고, 루카스가 여태껏 관측한 ‘가장 완벽한 파괴’기도 했다.
물방울은 자신이 거쳐 온 ‘모든 공간’을 흔적도 없이 사멸시키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루카스는 증폭된 감각을 통해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막을 방법이 없다.’
막을 수 없다면, 답은 회피다.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곳을 파악한 다음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도 민하린을 바라봤다.
전지를 사용한 순간 깨달았다.
이 물방울은 민하린이 전개한 게 아니다. 타이밍은 굉장히 공교로웠지만, 아무튼.
‘[극소시간대]에 진입할 실력은 아닌가.’
루카스는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젓고 말았다.
레시듀의 말대로, 그게 당연하다.
지금 루카스가 진입한 공간은 모든 우주를 통틀어 스무 명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풍경이다.
─날이 서 있던 의식을 무디게 만든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시간이 원래의 흐름을 되찾았고, 다시금 파괴가 시작된 직후 민하린을 툭 밀쳤다.
“…아.”
비틀거리며, 민하린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거기.”
우뚝 멈춘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13초 동안.”
루카스는 짤막하게 경고한 다음 동굴을 나섰다. 그녀에게도 볼일은 있지만 우선 파악해야 할 게 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지점은 모두 암기했으니 위험부담은 없다.
동굴을 나온 직후, 루카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보라는 진작 멎어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즉시 알 수 있었다.
그건 종말의 끝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하늘이 거무튀튀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공간이 찢어지고 생긴 균열 속에선, 부서진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리는 유사流沙처럼 불길한 액체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이 동굴을 덮친 건, 저 강물처럼 거대한 흐름에서 새어 나온 일부분에 불과했다.
[‘멸망’…….]
레시듀가 그 단어를 중얼거린 순간, 루카스는 손끝이 차게 얼어붙는 듯했다.
“역시 스승님이셨나요.”
뒤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13초는 이미 지났다.
루카스는 뒤를 돌아보았고, 동굴 앞에 서 있는 민하린을 보았다.
“살아 계셨군요.”
“…그래.”
끝까지 잡아떼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 게다가 민하린의 태도를 보면 처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고.
짤막한 침묵.
루카스는 그 시간을 이용해 제자를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고, 그녀에게서 기쁨이나 놀라움은커녕, 일말의 동요조차 찾을 수 없단 걸 깨달았다.
나와의 재회가, 이제는 이 아이에게 약간의 의미도 줄 수 없게 돼 버린 걸까.
“…….”
민하린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그건 세심하게 꺼낼 말을 선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다행이에요.”
이윽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투명했고, 무감정했다.
…기쁘지만 씁쓸하다.
하지만.
“죄송해요.”
그때 민하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죄송해요.”
한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을 때, 루카스의 입이 툭 벌어졌다.
…무언가 이상하다.
나와의 재회엔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 여기서 그녀의 기쁨을 바라는 건 루카스의 욕심일 테니까.
…하지만 이 상황은?
하늘이 무너지고, 그 속에서 거무튀튀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이 멸망의 풍경 앞에서도.
…어떻게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저것’을 보고도 어떻게 두려움을 품지 않을 수가 있는 거지?
─보이는 건 그뿐이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바쳤을지도 모르지.
갑자기 레시듀의 말이 떠올랐다.
눈과 팔 이외에도, 바친 것.
루카스는 이 순간 그게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민하린에겐, 감정이 상실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