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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02화 (623/857)

외전 402화

마성은 넓다. 루카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지식으로 접한 것과 직접 걸으며 두 눈에 담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겠지.

사람은 지도를 보고 세상의 넓이를 이해할 수 있지만, 실감할 수는 없다.

루카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에야 이곳이 얼마나 거대한 영지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자연.”

루카스는 잠시 멈칫했다.

마성에 있는 모든 동식물은 비기닝 위저드가 직접 만든 것이다. 아마도 제로에서부터. 그러한 풍경에 자연自然이라는 단어가 어울릴까, 찰나 고민했다.

“…자연이 거의 보존되어 있군.”

하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말을 이었다.

“음?”

비기닝 위저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가면엔 물기가 묻어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앞엔 거대하고 아름다운 폭포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쿠아아- 물살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전을 세차게 때렸지만, 이자에게 목소리가 닿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허의 세계의 인물들이라면, 그리고 너의 지식이라면 충분히 과학을 더 발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

“마법사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군.”

“자연을 해치고, 별의 수명을 단축시킬 만큼의 첨단과학을 말하는 게 아냐. 나는 이곳에 있는 자들의 생활을 보았다. 비효율적일 만큼 구시대적이더군.”

“…….”

가면 너머로, 비기닝 위저드가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녀석은 ‘마크 트로우맨’으로서 루카스에 대해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반면 루카스는 놈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화를 거듭할수록 루카스는 비기닝 위저드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있었다.

“경험상 이 정도가 딱 좋더군, 이보다 더 과학이 발전하면… 항상 그것이 생겨난단 말이야.”

“…그것?”

“욕심 말일세.”

노골적으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곳에 사는 자들은 고맙게도 모두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고, 내가 가꾼 마성 또한 존중하고 있네. 그래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거야.”

“…….”

“난 이 폭포를 ‘천둥폭포’라고 부른다네. 물살이 떨어지는 소리를 오래 들으면, 귓전에서 전기가 튀는 것 같거든.”

[쥐뿔도 안 비슷하니까 귀는 멀쩡한지 물어봐라.]

천둥의 주인이었던 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레시듀는 유난히 비기닝 위저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말을 면전에서 들었으니 당연한가.

“후후. 너무 놀라지 마. 내가 절경이라고 생각하는 장소는 아직 서른여섯 곳이나 더 있으니까. 말하자면 천둥폭포는 시작에 불과하네.”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비기닝 위저드가 말했다.

“그럼 다음 장소로 가볼까?”

* * *

서른여섯 곳보다 더 많았다.

비기닝 위저드는 그가 분류한 ‘절경’이라는 장소를 향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근사한 장소가 있으면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하여 향한 장소는 자연이 만들어 낸 듯한 풍경이 될 때가 있었고,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마을의 모습일 때도, 혹은 작은 가게의 인테리어가 되기도 했다.

“노을이 아름다운 장소지 않나.”

“지금은 시기가 아쉽군. 이곳은 낙엽이 떨어질 때 그 진가가 발휘되는데…….”

“이곳은 어떤가?”

비기닝 위저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루카스의 의중을 계속 물어봤다.

[저 개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레시듀도 질린 듯한 목소리를 뱉었다.

‘아마도 내게 무언가 사인을 보내고 있는 거겠지.’

[사인?]

‘그래. 직접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내가 눈치채길 바라고 있는 거야. 뻔한 전개지.’

[직접 말할 수 없는 무언가라…….]

말끝을 흘리던 레시듀가 물었다.

[그게 뭔데?]

‘…….’

모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비기닝 위저드가 안내한 장소, 눈짓이나 목소리, 사소한 동작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에 더해, 언뜻 보면 독립적으로 보이는 단서들 간의 공통점을 찾으려 뇌를 분주하게 돌렸다.

그런데도 짚이는 게 없었다.

“원래는 각 지역마다 차별을 두고 싶었지. 문자 그대로, 이 마성을 하나의 세계처럼 구현하고 싶었거든. 그리고 세계란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있어야 하고.”

…모르겠다.

이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비기닝 위저드가 내게 전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도.

“그런데 힘들더군. 마성에 존재하는 자들은, 흠. 좀 따분했거든. 물론 나도 알고 있네.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야. 애초에 이곳은 그런 공통점을 가진 자들에게만 입장을 허락하는 영지니까.”

‘그런 성향 덕분에 불필요한 것에 욕심내지도 않고’, 담백하게 흘리는 목소리에도 집중했다.

의미를 찾을 수 없지만, 분명 무언가 숨겨진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상대는 비기닝 위저드, 마성에선 4기사마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괴물이니까.

‘마크 트로우맨’은 그가 가진 수많은 정체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도 기호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아서, 한가할 때는 마성 전역을 돌아다니며 괜찮은 가게를 찾았다네. 어떤가. 여기 차, 제법 풍미가 깊지 않은가?”

그 말에 루카스는 고개를 숙이고, 빨갛게 물든 찻물을 내려다봤다.

달칵.

찻잔을 든 순간, 그윽한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든다. 찻잔을 기울여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향기가 몇 배는 증폭됐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입안에서 작은 꽃밭이 피어난 것 같았다.

…그것뿐.

“잘 모르겠어.”

찻잔을 내려놓고, 루카스가 그리 말했다.

“그런가.”

비기닝 위저드가 픽 웃었다.

태도를 보니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카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딴 차의 맛에 대한 감상이 아니야.”

감정 섞인 목소리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어조만큼은 차분했다. 하지만 어구만큼은 도무지 좋게 치장할 수 없었다.

“네놈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

“이해가 가지 않나? 지금 내가, 항복하는 거라고. 네놈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다음 말을 잇기 위해선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직접 가르쳐 달란 뜻이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카스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까지 짚이는 게 없을 줄은 몰랐다. 자신의 통찰력과 분석력, 그리고 추리력이라면 충분히 단서를 수집하여 해답을 도출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

비기닝 위저드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가면 너머의 눈동자도 깊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입안에서 아른거리는 차향이 희미해질 때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도 같은 건 없네만.”

“뭐?”

“말했지 않나. 마성엔 근사한 곳이 많다고. 내 입으로 말하기도 우습지만, 이 영지를 가꾼 건 나일세. 둘러볼 때마다 어느 정도의 뿌듯함이 생기지. 그곳을 자네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서…….”

“이유가 뭐냐.”

“…….”

다시 한번 흐름이 끊겼다.

그 태도에 루카스는 답답함, 그리고 슬슬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느꼈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었다. 네가 나를 죽이려는 이유와 어떤 연관이 있나?”

“…아니.”

“허왕의 정체, 혹은 멸망을 막기 위한 힌트가 숨겨져 있었나?”

“아닐세.”

“그럼 너는, 대체 뭘 하자는 거냐?”

결국 루카스의 목소리에 화가 섞였다.

“내게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네놈은, 나한테 이딴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냐.”

“…….”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 혹시 그것이 멸망을 막기 위한 초석이 될 수도 있는 거냐? 만약 그렇다면, 난 그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

루카스가 스스로의 죽음을 재차 입에 담았지만, 레시듀는 이번에 그저 침묵했다. 물론 루카스로서도 그와의 약속, 아니 - 맹약을 잊지는 않았다.

“…그런데 만약, 이딴 시간 죽이기도 못 되는 유람이, 죽기 직전의 나를 동정해서 저지른 거라면…….”

차분했던 어조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에 반해 표정은 더욱 얼어붙었다. 루카스는 제 감정에 못 이기는 아마추어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완전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루카스의 몸에서 얼음 같은 아지랑이가 끓어올랐다.

“넌 나라는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

훅,

끓어오르던 아지랑이는 루카스가 말을 끝맺은 순간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리고 얼어붙은 시간이 다시금 흘러간다.

가게엔 다시 한번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부드러운 홍차 향이 피어올랐다.

모두가 일상을 되찾은 흐름 속에서, 비기닝 위저드만이 여전히 정지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하던 말을 멈추고 침묵을 유지했으나, 이번 건 유난히도 길었다.

“…그래. 확실히, 내가 잘못 생각한 걸지도.”

특유의 픽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평소와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루카스가 그 위화감을 느낀 순간 목소리가 이어진다.

“자네에겐 여유가 없는 게 당연하겠군. 내 생각이 짧았네. 사과하지.”

드륵,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기닝 위저드가 말했다.

“그럼 곧바로, ‘77탑’으로 가볼까.”

“…77탑?”

“내가 머무는 곳이기도 하지. 좀 더 진부한 이름을 대자면.”

비기닝 위저드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마탑魔塔.”

* * *

비기닝 위저드는 평소에 어떤 장소에 머물까.

루카스는 그 뒤를 따르며, 같은 십이허주인 양인현의 거처를 떠올렸다.

운해각.

산봉우리 바로 밑에 위치한 그 소박한 별채가, 루카스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조화를 이룬 위치와 주변의 절경도 좋았고.

─그리고 비기닝 위저드의 거처인 77탑, 다른 이름으로 마탑이라 불리는 장소는 운해각보다 훨씬 높은 장소에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훨씬, 이었다.

지상을 벗어나 하늘 너머에 있는 별,

77탑은 그곳에 존재했으니까.

“이 별의 이름은 소마성小魔星이라고 하네. 어떤가?”

“…촌스럽군.”

루카스는 짤막한 감상을 입에 담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소마성, 작은 마성이라고 불리는 별은 정말로 작았다. 넓이로만 따지면 웬만큼 작은 섬만 했다. 주변 풍경도 일반적이지 않다. 캄캄하고, 어두운 장소에 드문드문 별자리가 펼쳐져 있었으니까.

마치 우주라는 망망대해에 놓인, 손톱만 한 섬 같다.

때문에 그 섬 위로 쭉 뻗어진 길쭉한 탑의 모습이 더욱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거겠지. 펼쳐진 배경이 우주기도 하니,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몽환적인 느낌도 들었다.

비기닝 위저드의 몸이 부드럽게 떠올랐다.

부유는 곧 비행이 되었고, 그는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탑의 꼭대기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루카스도 그 뒤를 따랐다.

최소 수백 미터는 될 법한 탑이었으나,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탑은 기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었다.

지상, 그러니까 1층의 둘레는 웬만한 성처럼 컸는데 층수가 올라갈수록 점점 가늘어져 가는 게 보였다.

탑의 꼭대기에 이르러서는 성은커녕, 평범한 망루만 한 너비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루카스는 그곳에서 기묘한 것을 보았다.

꼭대기의 벽면에 문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발을 디딜 곳은 없었다. 울퉁불퉁한 표면에, 마치 벽화라도 새긴 것처럼 뜬금없이 문이 달려 있었다.

“흠.”

비기닝 위저드가 익숙한 동작으로 문을 열었다.

루카스가 그 뒤를 따르려는 순간이다.

“멈춰라.”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목덜미에서 차가운 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얼음송곳이 루카스의 목 주위를 단숨에 꿰뚫을 것처럼 감싸고 있었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살기에, 루카스는 힐끗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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