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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395화 (616/857)

외전 395화

뚝.

거기서 영상이 끊겼다.

희미하게 발광하던 빛이 자취를 감췄고, 일렁이던 물결도 멎었다.

샘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여기서 끝이라고?”

적기사와 태양거인의 협력, ‘첫 번째 멸망’.

예상치 못한 전개가 이어졌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이다음이다.

루카스는 이 이후의 장면을 봐야 한다. 어쩌면 ‘멸망’이 무엇인지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샘에 손을 담근 채 머릿속으로 페일의 얼굴을 떠올려도, 아무런 변화가 일지 않았다.

“일회용이었다는 건가.”

[아마도 횟수 제한이 있는 듯하군.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충전이 되는 형태인 듯하다.]

“…….”

하는 수 없이 샘에서 손길을 거뒀다. 축축한 손바닥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조금 초조해졌나.

루카스는 샘의 물로 얼굴을 차게 적셨다. 역시 육체가 있는 건 좋다. 이런 외부적인 자극으로도 정신의 각성이 이뤄지니까.

얼굴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으며 물었다.

“충전에 걸리는 시간은?”

[하루.]

비기닝 위저드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하루에 한 번, 반드시 이 샘에 들르라고 했었지.

“녀석은 이 샘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고 있겠군.”

[그렇겠지. …흠.]

레시듀가 침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이 몸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군. 태양거인이 적기사와 손을 잡고 있었을 줄은…….]

“짚이는 게 조금도 없었나?”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방금 보았던 광경 자체를 거짓으로 치부하는 게 더 현실성이 느껴질 정도다.]

루카스는 태양거인을 떠올렸다.

“…난 태양거인에 대해 잘 모르지만, 녀석은 다른 군림자에 비하면 온건해 보이던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거인이라면 적기사와 협력을 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까 하는─”

[큭큭. 재밌는 개소리로군.]

레시듀가 웃음을 흘렸다.

[놈은 군림자 중에서도 가장 다혈질이야.]

다혈질?

그것이야말로 태양거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군림자들은 유희를 위해 감정을 흉내 내는 경우가 있지만, 태양거인은 달랐다. 그는 항상 거짓으로라도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절제했고, 조용했다.

레시듀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끓는점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서, 웬만하면 열불이 뻗친 모습을 보기 힘든 것뿐…….]

“…이해가 안 돼.”

루카스의 시선이 다시 샘을 향했다.

“비기닝 위저드는 대체 내게 뭘 바라고 있는 거지?”

지혜의 샘이라고 했었나? 이건 평범한 샘이 아니다.

레시듀조차 처음 조우할 만큼 희귀한, 모든 우주를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지보至寶다. 어쩌면 비기닝 위저드를 제외한 마성의 마법사들은 이 샘의 존재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그런 곳에, 루카스를 놔뒀다.

설명은 최소한으로, 사용 방법조차 말해 주지 않았지만, 비기닝 위저드는 분명 루카스에게 바라는 게 있다.

[뻔하지. 이 샘을 통해서, 네가 꼭 봤으면 하는 광경이 있는 거다.]

“…….”

역시 이럴 때 레시듀의 조언은 도움이 됐다.

루카스 또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은 편은 아니었으나, 레시듀는 그보다 한 발자국 더 넓었다. 항상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녀석이니만큼 당연하다.

“봤으면 하는 광경?”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비기닝 위저드는 일주일 뒤에 다시 온다고 했지.]

잠시 간격을 둔 뒤, 레시듀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섯 번. 너는 이 샘을 통해 볼 수 있는 그 기회를 의미 있게 써야 할 것이다.]

* * *

루카스는 근처 공터에 털썩 앉은 다음, 샘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보고 싶은 광경은 뭐지?’

언제나처럼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역시 다시금 떠오르게 된 건 페일의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상황은 대충 이해했다. 물론 적기사, 태양거인과 조우한 이후의 상황이 궁금하긴 했지만 이 귀중한 6번의 기회를 페일을 관찰하는 데만 쓰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멸망.’

적기사의 말,

‘첫 번째 멸망’이란 단어가 걸린다.

그건 추방자가 보았다는 ‘멸망의 다섯 가지 형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다섯 차례에 걸쳐 멸망이 몰아치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건 모른다.

현시점에서 알 수 있는 거라곤─

[그건 네놈의 습관이냐?]

심드렁한 목소리가 상념에 끼어들었다.

“뭐?”

[깊게 생각할 때마다 참선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세를 잡는 것 말이다.]

“…음.”

루카스는 스스로를 내려다봤다.

확실히 고민에 빠진 것치곤 조금 거창한 자세다.

[생각에 빠지는 것도 좋지만, 네놈이 그토록 염원하던 마성에 겨우 이른 거다. 주변을 좀 둘러 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뭐. 그렇지. 어차피 이 숲의 좌표는 외웠고.”

그 외에도 파악한 건 있다. 마성이란 공간이 허의 세계에 완전히 속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허의 세계의 영지와는 그 결이 다르다. 다른 차원에 희미하게 겹쳐 있는 형태라서,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는 이상 이곳에 출입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공간을 다룰 수 있고, 이해도 또한 굉장히 높아야 가능한 기예지.’

비기닝 위저드의 소행인 게 분명하다.

루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고민을 뒤로 미루고, 마성을 탐색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 * *

루카스가 향한 곳은 오는 길에 들렀던 언덕 마을이었다.

이 또한 공간이동을 사용하면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지만, 일부러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경계를 살 수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고,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과연.]

루카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치챘나? 이 영지엔 낮과 밤이 존재하는 것 같아. 인공태양, 이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가 움직였어.”

[흠.]

“하늘엔 구름이 있다. 아마 밤이 되면 달이나 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기온도 있고, 바람도 분다……. 샘이 있었던 숲에선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지만, 이렇게 조금만 거리를 거닐어도 아무 데서나…….”

루카스는 제법 커다란 바위를 뒤집었다. 축축한 진흙 밑에 꿈틀대는 지렁이의 모습이 보인다.

“…벌레를 발견할 수도 있지.”

루카스가 들른 영지 중에서, 그나마 삼천세계와 가장 닮은 풍경을 가졌던 건 양인현이 지배하는 화산이었다. 하지만 그 영지에서도 어딘가 묘한 위화감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도, 조화造花에선 생기를 느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허의 세계와 달리 생명이란 게 존재하는 듯한 곳이다. 삼천세계를 모방하기라도 한 건가?]

“글쎄. 모방으로 치부하기엔 완성도가 너무 높아.”

루카스는 자신의 추측을 중얼거렸다.

“아예 이 영지 자체가 ‘바깥’에서 온 것처럼 느껴지는군.”

그때쯤 언덕 마을이 보였다.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여전히 바쁜 일과에 전념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뭐냐?]

“…그냥, 좀 그리워져서.”

언젠가 이런 풍경을 떠올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조금 흐릿하다. 그 사실에 조금 놀랐다.

내게도 아직 잊힌 기억이 남아 있었구나.

‘당연한가.’

지니고 있는 모든 정보를 온전히, 그리고 완벽히 매순간 기억하고 있다면, 루카스는 인격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워?]

“아냐. 아무것도.”

마을엔 울타리조차 없었다. 외적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당연히 출입을 제지받지도 않았다.

루카스는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평화로운 마을을 거닐었다. 어디선가 구수한 빵 냄새가 흘러왔다.

“이곳에선 음식도 만들 수 있는 건가.”

[그런가 보군. 흠, 점점 네 가설에 힘이 실리는 것 같다.]

어린아이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담장에 걸터앉았다. 고적한 눈으로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

때마침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루카스는 가만히 그 바람을 맞았다. 이상하게 아련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는 한동안 석상처럼 굳은 채, 그곳에 앉아 있었다.

묘하다.

방금까지 샘이나 첫 번째 멸망, 적기사, 태양거인 따위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당돌하게 인사를 건넨 건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소년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씩 하고 웃는다.

“이거요.”

그리고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호밀빵이다.

“이걸 왜?”

“아저씨 먹어요!”

그리고 떠넘기듯 빵을 맡기더니, 그대로 다다다 떠난다. 루카스는 딱딱하게 굳은 빵을 내려다보다가 한입 물었다.

까득.

[거의 돌이군.]

“그러게.”

* * *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루카스의 추측대로, 마성엔 밤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을을 밝히던 불빛이 하나둘씩 꺼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그와 반대로 하늘은 확 밝아졌다. 가득 수놓은 별무리는 은하수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빗나간 예측도 있었다. 이곳의 밤하늘엔 달은 없었다.

“…….”

짧지만, 심도 있게 마성을 관찰했다.

멍청히 담장에 앉아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루카스는 마성의 구조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게 됐고, 때문에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좋은 곳이야.”

“감사합니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는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고 뒤를 돌아봤다.

멀찍이서, 이 마을을 눈에 담은 순간부터 가장 신경 쓰였던 기척이다.

온화한 걸 빼면 특색이 느껴지지 않는,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었으나 그는 루카스가 파악하기로 이 마을 최고의 마법사였다.

“너는?”

“촌장인 ‘셀런’입니다만, 손님껜 구도자求道者라고 자칭하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우시겠지요.”

구도자인가.

“마성의 구도자가 내겐 무슨 볼일이지?”

“볼일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저 달 없는 밤하늘을 홀로 감상하시는 게 쓸쓸해 보여 말동무 노릇이나 하려고 왔습니다.”

“…….”

“혹 방해가 됐습니까?”

“아니.”

“다행이군요.”

셀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루카스와 조금 떨어진 담장에 앉았다.

루카스는 그에게서 시선을 뗀 다음 말했다.

“구도자라고 했지.”

“예.”

“답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기에 구도자, 궁금하군. 너희들이 추구하는 이치란 무엇인가? 대체 어떤 진리를 원하기에 스스로를 구도자라고 부르는 것인가?”

처음 구도자란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느꼈던 의문이다.

루카스의 관점에서, 마법사에게 구도란 단어는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았다.

단순히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들이 깊은 내면수행으로 삶의 고통에 대한 고찰, 혹은 종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거라면… 마법사란 족속과는 너무나도 멀게 떨어져 있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그들이 관찰하는 건 항상 바깥, 즉 세계다.

그러자 셀런이 웃었다.

“우리가 찾는 건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무엇에 대한 공포지?”

“멸망입니다.”

루카스의 시선이 멈췄다.

“그를 위해선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을 필요가 있죠. 머릿속에 단단한 방벽을 세우는 겁니다. 그걸 국경으로, 나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고 그 땅을 나의 독선으로 채웁니다. 그것만이 멸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건 구도자만이 알고 있는 사실인가?”

“한때는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이곳의 모든 마법사가 알고 있습니다.”

루카스는 그 말에 담긴 무게에 침묵했다.

마성의 모든 인물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마법사다.

담장에 걸터앉아 그들의 일상을 보았다.

…힘든 노동에 땀을 훔치던 남자, 빨래를 걷고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던 아낙네, 서로를 지탱하며 언덕길을 오르던 노부부, 멋쩍게 웃으며 호밀빵을 건네던 소년까지,

─모두, 멸망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곳이군.]

레시듀가 마성에 대한 정확한 감상을 처음으로 입에 담았고, 루카스는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달이 없는 밤하늘이란 조금 기분 나쁘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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