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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389화 (610/857)

외전 389화

루카스의 표정이 굳은 직후, 양인현의 소매가 희미하게 펄럭거렸다.

스걱.

철창이 녹아내리기 직전의 촛불처럼 잘려 나갔다.

양인현은 성큼 뇌옥 안으로 발을 들인 다음 천천히 둘러봤다. 무언가 단서를 찾으려는 건가? 루카스도 바깥에서 나름대로 탐색을 시작했지만 육안으로 발견할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이상하다.

‘…뇌존의 소행이 아닌 건가?’

문득 떠올린 생각은 제법 신빙성이 높았다. 흔적이 너무 적었던 것이다.

만약 뇌존이 이종학의 육체를 완벽히 지배한 상태에서 탈출을 감행했다면, 이보다 훨씬 큰 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렇게 감쪽같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건 어딘가 이상하다.

[……! ……!]

순간적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소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뇌존?’

지금 내게 소리치고 있는 게 너냐?

루카스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양인현은 철창을 나선 뒤 뇌옥의 관리자가 머무는 입구 지점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한 남자를 향해 입을 연다.

“용소한.”

“예.”

뇌옥의 관리자인 용소한은 부복의 자세를 취했다.

양인현은 그 반응을 보고, 이자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단 사실을 느꼈다.

“이종학이 머물고 있던 철창을 보고 와라.”

“이종학… 알겠습니다.”

슉.

용소한이 즉각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눈 깜박할 사이 다시 돌아왔다.

떠나기 전과 달리, 낯빛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나?”

“…죄송합니다, 장문인. 어떤 처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스릉.

용소한이 검을 뽑은 다음 역수로 쥐어 자신의 가슴으로 향하게 만든 다음, 칼자루를 양인현 쪽으로 돌렸다.

양인현이 조금만 밀어내도 심장이 꿰뚫릴 것이다.

그러나 양인현은 고개를 저엇다.

“네게 책임을 물으려 부른 게 아니다.”

당연히 처벌도 생각이 없다.

루카스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이 뇌옥에 갇혀 있던 존재는 군림자의 하수인이다. 이딴 뇌옥을 탈출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고, 용소한이 그걸 깨닫지 못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어떤 위화감 같은 걸 느끼진 못했나?”

“죄송합니다.”

“그런가.”

용소한에게선 얻을 수 있는 단서가 없다.

양인현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다시금 루카스를 향해 돌아갔다.

“뇌옥의 관리자는 어떤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더군. 이 경우엔 그 사실이 오히려 단서가 될 수도 있겠지.”

“그래. 저만한 실력자의 이목을 속일 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거니까.”

“흠. 조금 이상한데…….”

루카스에 비하면 군림자에 대해 무지한 양인현조차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말해서, 이건 천둥우레의 뇌존의 스타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군림자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초조함을 억누르며, 무언가 놓친 게 없는지 생각한다.

“…흠.”

그때 페일이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묘한 예감이 드는데요.”

그 비슷한 건 루카스도 느끼고 있었지만, 페일의 경우엔 그걸 본능의 형태로 훨씬 더 직관적이게 느끼고 있는 듯했다.

루카스가 그에 대한 조언을 얻으려는 순간이다.

[……을! ……라!]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확실하다.

이건 뇌존의 목소리다.

‘뭐라고? 잘 안 들리니까 확실히 말해라.’

[지…… 라……!]

그러자 짓이겨진 채 나오는 목소리가 조금 확연해졌다.

[전지를…… 써라……! 루카스……!]

“……!”

다음 순간, 루카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체내에 남아 있던 우레를 끌어 올렸다.

전지의 권능으로 의식세계까 단숨에 확장되었다. ‘바라보는 세계’가 달라진다.

─이윽고 펼쳐진 풍경,

“……!”

이 공간 전역에, 거미줄처럼 엷고 넓게 펼쳐져 있는 힘.

루카스와 양인현은 물론, 페일조차 희미한 위화감밖에 느끼지 못할 만큼 은밀히 전개되고 있는 힘.

‘우레……!’

루카스에게 조금 남아 있는 찌꺼기가 아닌, 오리지널 우레!

즉 ‘천둥우레의 뇌존’이 직접 사용하고 있는 권능이란 뜻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한 발짝 늦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게 됐다.

뇌옥에 아무런 흔적도 없었던 이유,

군림자가 벌인 탈출극치고는 너무나도 고요했던 이유!

‘탈출은, 현재진행형이었다……!’

파직─

전류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게 신호였다.

도화선에 불길이 붙은 것처럼, 거미줄처럼 얽힌 전류가 거세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하하─! 크하하하─!]

쩌렁쩌렁한 광소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푸른 전격이 사방을 뒤덮었다.

* * *

전격이 몸에 닿기 직전,

루카스는 양인현과 용소한, 그리고 페일까지 대동한 채 공간이동을 시행했다. 순간적으로 극소시간대에 진입한 덕분에, 뇌옥이 무너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탈출하는 게 가능했다.

쩌저적!

하지만 뇌존의 공격을 무위로 되돌린 건 아니었다.

뇌옥을 무너뜨린 건 파괴의 시작에 불과하다. 전격은 가파른 기세로 화산을 관통했다. 산의 뿌리로부터 생긴 금은 이윽고 거악 전체를 뒤덮었다. 쿠르르, 꼭대기에서부터 파괴의 잔해조각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양인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순히 산 하나가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니다.

저곳에 머물고 있는 화산파의 인물들은 물론이고, 어쩌면 이 영지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멸할지도 모른다.

“넌 가서 사태를 수습해라. 제자들도 피난시키고.”

루카스가 짤막하게 말하자 양인현의 시선이 힐끗 돌아왔다.

“넌?”

“아까 우리가 나눈 대화를 잊었나?”

“제법 자신이 있나 보군.”

“일단 혼자는 아니니까.”

양인현이 페일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겠다.”

자리를 떠나는 양인현 대신, 루카스는 전류의 흐름을 눈에 담았다.

산을 완전히 갉아먹은 푸른색 전류는 하늘에서 다시 합쳐지더니 창공을 까맣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몰려온 먹구름이 용트림 같은 소리를 내며 간헐적으로 뇌전을 뿜어댔다.

“어쩔 거예요?”

“우선은 대화부터 해보려고.”

“…헤에. 대화라. 그것 참…….”

잠깐 할 말을 찾던 페일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대 쥐어박아서라도 막고 싶은 생각이네요. 말한 게 루카스만 아니었다면요.”

우선은 묵인해 주겠다는 거다.

“가 봐요. 상황이 꼬이면 개입할 테니까 그런 줄 알고요.”

“그래.”

“조심해요~”

페일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루카스는 느슨하게 웃었다. 그래. 뇌존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중에선 페일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녀가 뒷배가 되어 준다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루카스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며 구름 너머를 향했다.

먹구름 사이에 전류를 두르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 보였다.

[…루카스.]

천둥우레의 뇌존을 보며, ‘뇌존’이 말했다.

[부탁한다.]

“…….”

그리고 루카스는 자신의 육체를 넘겼다.

* * *

뇌존은 바라보았다.

천둥우레의 뇌존을 바라보았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러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우선 뇌존은 그 사실에 씁쓸해졌다.

[흐음.]

천둥우레의 뇌존이 중얼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재밌군.]

“…….”

[그래서, 너는 대체 어떤 존재냐?]

“난… 뇌존이다.”

뇌존이 내뱉은 말에 천둥우레의 뇌존이 웃었다.

[아예 헛소리는 아니로군. 네게선 분명히 ‘우레’가 느껴지니까. 이딴 촌극을 한 이유도 너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지.]

루카스에게 머물고 있는 ‘뇌존’의 존재를 깨닫고, 자신의 육체를 전류로 바꾼 다음 화산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지금 일어난 일련의 행동들은 천둥우레의 뇌존이 소소하게 준비한 서프라이즈 쇼다.

[호기심이 드는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런 꼴로, 루카스 트로우맨에게 기생하고 있는 거냐?]

“나는 네게서 떨어져 나간 의식이다.”

[호오. 자세히 설명해라.]

그리고 뇌존은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루카스의 회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순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 그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면 지금 뇌존이 처한 상황을 완벽히 이해시킬 수 없다.

[흐음…….]

이야기가 끝나자, 천둥우레의 뇌존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렇군. 그래서 다시 이 뇌존에게로 돌아오고 싶다는 것인가?]

“그리고 이종학의 몸에서도 떠나 줬으면 한다.”

[큭큭. 이종학은 애써 구한 꼭두각시다. 내가 이놈을 버림으로써 얻는 이점이 뭐가 있지?]

“내가 ‘다른 미래’에서 경험했던 일들에 대해 흥미가 가지 않나?”

당연하지만, 뇌존은 회귀 전에 겪었던 모든 일을 설명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루카스의 회귀에 대한 사실을 빼면 대부분의 사실을 숨겼다.

‘이곳과 다른 미래에서 봤던 기억’, 그것이야말로 모든 걸 잃은 뇌존이 갖고 있는 유일한 협상재료였다.

[흥미, 가지.]

“그렇다면…….”

[흐음]

다시 한번 장시간의 침묵,

초조하게 기다리는 뇌존에게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다. 너를 다시 받아들여 주도록 하겠다.]

“정말인가?”

[한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널 회수해 주겠다.]

“…조건?”

천둥우레의 뇌존이 웃으며.

[지금 너는 루카스 트로우맨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군.]

“…보면 알잖은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그럼 간단하군. 그 몸을 이용해서, 지금 내가 꼭두각시로 다루고 있는 이종학을 죽여라.]

“뭐라고?”

뇌존이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리고 상대를 바라보며 으득 이를 갈았다.

“내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냐?”

뇌존은 루카스에게 말했다. ‘천둥우레의 뇌존’에게서, 이종학의 몸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설득하겠다고.

그러니 놈이 하는 저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받아들이면, 뇌존은 스스로 꺼낸 말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온전히 이해했기에 말하는 것이다.]

“그딴 행동을 해서 네게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는 거냐?”

[으하하……. ‘나’였으면서도 모르겠나? 내가 이 말을 꺼내는 저의를?]

“…….”

[그렇다면 설명해 줄 가치도 없다. 알겠나? 내가 원하는 건 대답이다. 네가 나의 잔념이라면, 독립된 채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 터. 그 저주받은 매순간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지 않나?]

…그렇다.

역시 ‘천둥우레의 뇌존’이다.

지금의 뇌존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치가 떨릴 정도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

뇌존은 루카스와 나눴던 대화를 마지막으로 떠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뚝.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큭, 크크큭…….]

낮은 웃음소리에, 뇌존이 표정이 굳었다.

[크크큭, 크하하하하─! 으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이 까맣게 물든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왜 웃는 거냐.”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 실은 알고 있다.

‘나’였으니까,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웃음소리니까,

저러한 웃음이 어떤 때에 터져 나오는지 싫어도 알 수밖에 없다.

[이 몸은 그냥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때 ‘나’였던 존재가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는지. 아아─. 과연, 인간과 너무 깊게 관여되면 안 되겠군. 내가 네놈처럼 될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빙글빙글 웃는 듯한 말투,

철저한 비웃음.

[설마 지금도 스스로를 뇌존으로 여기는 건 아니겠지? 네놈은 이미 격락했다……. 아니, 그 이하다.]

“…아니야.”

[부정할 텐가? 정말로 그럴 수는 있나? 네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네가 그 꼴이 되어서도 군림자이고자 했다면, 스스로를 그렇게 여긴다면 한번 했던 약속은 결코 어기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내게 제안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상태는…….”

[끔찍하겠지. 도망치고 싶은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래도 받아들여선 안 됐다. ─그래. 문자 그대로, 종말의 앞에서라도 꺼냈던 말을 어겨선 안 된다. 그것이 우리다.]

“그렇지 않다. 나는…….”

[어디 있는 힘껏 부정해 봐라. 그럴수록 너는 점점 더 ‘나’에게서 멀어진 존재가 될 것이다.]

“…….”

[스스로를 ‘천둥우레의 뇌존’이라고 착각하는 얼간이를 위해서, 이 몸이 확실히 말해 주겠다.]

그리고 천둥우레의 뇌존이 말했다.

[네놈은 더 이상 군림자가 아니다. 떨거지. 주제를 알아라.]

선고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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