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84화
“개소리는 끝났나요?”
철컥
페일이 검을 고쳐 잡았다. 그녀의 주위로 푸른색 기류가 피어나는 게 보인다. 청기사가 될 셈인가.
“설마 내가 그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네? 루카스.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렇겠지. 넌 그리 만만한 여자가 아니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일어나지 않은 채, 루카스는 슬며시 눈만 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날 죽이는 것보단 흥미로운 전개가 될 텐데?”
“흐음. 글쎄요. 전 그런 생각이 안 드는데.”
“내 공간이동 마법은 한번 온 장소에만 쓸 수 있어. 이곳 허의 세계에선 말이지.”
“또 무슨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려고.”
잠시 힐난의 시선을 보내던 페일이, 곧 눈살을 찌푸렸다.
“폐기장에 온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네가 날 여기로 안내해 줬지.”
“그래서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때의 페일’이 왜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에 대해선.”
“…….”
휘감듯 치솟던 푸른색 기류가 조금 희미해졌다. 페일은 반쯤 뜬 눈으로 루카스를 바라보았으나,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말하기는 싫다는 건가?
루카스는 그녀의 투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슷한 원죄를 공유하게끔 만들고 싶었겠지. 넌 여기서 내가, ‘다른 루카스’들을 먹도록 유도한 거였어.”
“…….”
“그리고 난 네 의도대로 충실히 움직였다. 폐기장에서, 아주 긴 시간을 버티며 ‘모든 실패한 루카스들’을 먹어치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루카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알겠나, 페일? 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고통엔 이골이 난 녀석이야.”
배후에서 새까만 형상이 피어났다.
페일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만큼의 원념이 루카스의 배후로부터 느껴졌다.
…실패한 루카스들, 그들이 가졌던 감정의 조각인가.
“나의 삶에 대해선 너도 부분적으로 알고 있겠지. 평탄함과는 거리가 멀었단 것도 알고 있을 거다. 이곳에선 특히 더 그랬어. 내 삶에서 손에 꼽을 만큼 힘든 선택도 감행했고, ‘실패한 루카스’들 또한 모두 받아들였다. 그들의 고통까지도.”
그러니 고통이란 루카스에게 낯설거나, 두려운 개념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삶이란 고통’이란 격언에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루카스의 삶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고통의 연속이었으니까.
“나보다 더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기라도?”
페일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지금부터 비교하려고.”
“뭐요?”
“넌 항상 말했다. 네가 겪은 고통이야말로 독보적으로 끔찍하고, 다른 이들이 겪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실제로 그런가는 별개의 문제야. 넌 다른 고통을 굶주림만큼 느껴 보지 않았잖아.”
어느 순간 페일의 검은 지면을 향해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눈동자로 루카스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난 달라. 내가 겪었던 삶은, 그리고 고통은 군림자들도 인정할 정도다.”
[내가 언제?]
“즉, 이 자리에서 내가 굶주림을 너만큼 겪게 된다면… 비교가 가능하단 거지. 굶주림이 가장 끔찍한 고통인가에 대해서, 나라면 증명할 수 있다.”
루카스는 페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버텨 보겠다. 만약 굶주림이 내가 겪은 고통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끔찍하다면, 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 거야. 그때가 되면 네가 나의 목을 베면 돼. 어때. 심플하지 않나?”
“하, 하하하……!”
페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탁한 웃음소리가 폐기장을 크게 울렸다.
이윽고 그녀가 지면에 검을 꽂았다.
푹!
푸른색 검이 지면에 반쯤 파고든 상태로 고정되었다.
“재밌네요!”
페일이 빙긋 웃는 얼굴로 털썩 그 자리에 앉았다.
수락.
마침내 페일이 루카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 * *
폐기장에서의 시간의 흐름은 바깥과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금의 루카스라면, 그 흐름의 상세값을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곳에서 수백 년이 흘러도 바깥에선 수백 초도 흐르지 않도록 설정하는 게 가능하단 뜻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나가면 이 공간의 주인인 십이허주 시귀屍鬼가 필시 눈치챌 터.
상관없는 일이다.
애초에 루카스가 페일과 함께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 녀석은 이미 이쪽의 존재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아무런 개입이 없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이쪽을 관찰하고 있든가, 혹은 관찰이 끝났지만 섣불리 손을 뻗을 생각이 없든가.
시귀의 음흉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고려하면 후자일 확률이 더 높다.
그래서 루카스는 아예 시간의 흐름마저 조정했다. 이제 폐기장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든, 바깥에선 찰나도 흐르지 않을 것이다.
“참을성이 깊은 편이겠죠. 분명히.”
페일이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양 무릎을 꿇은, 어울리지 않는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루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다.
“이곳에 있는 모든 루카스를 먹었다고 했나요? 그건 수십 년, 수백 년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몹시 높은 정신력이 있더라도 최소 수천 년은 걸리는 작업이지요.”
“…….”
“내가 하나 예언할까요?”
목소리에 슬며시 차가움이 채워졌다.
“이번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내가 그 전에 포기할 것 같나?”
“포기요? 농담도. 그러려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야 되는데?”
페일의 입술이 달싹이며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굶주림을 수천 년씩이나 안고 갈 수는 없단 거예요. 나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고 했죠? 그럼 딱 두 가지만 기억해 둬요.”
그리고 속삭임은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이 고통은 익숙해질 수 없어요. 그저 심해지죠. 악몽처럼.”
* * *
시간.
루카스는 다시 한번 그 단어를 떠올리며, 스스로의 기억을 천천히 훑어봤다.
내가 살아온 긴 시간 속에서, 내가 가장 오랫동안 굶주렸던 건 어느 정도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루카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나, 그에게 굶주림이란 비교적 생소한 종류의 고통이다.
애초에 온전한 육신을 가지고 있던 순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저갱에 갇혀 있을 때도 고통 받았던 건 육신이 아닌 정신이었다. 당연히 굶주림은 느끼지 않았다.
절대자가 된 이후엔 육신이라는 허물을 벗고 초월체로서 활동하게 됐다. 때때로 육체를 지닌 채 현계하는 일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일반적인 생명체에게 필요한 신진대사가 일절 필요치 않은 초월적 상태로 지냈다.
그래, 나는.
‘굶주린 적이 없었어.’
루카스가 겪은 숱한 고통 중에 굶주림은 없었다.
그런 결론이 나왔다.
물론 기억 속의 ‘실패한 루카스’들 중에선 아사餓死한 루카스도 있었다. 그가 죽기 직전 가졌던 비통함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직접 체험한 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실제로 겪은 것과 동일한 기억을 현실처럼 느낄 수 있다고 해도, 실제로 겪는 것과는 천양지차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루카스는 직접 굶주릴 것이다.
* * *
시간의 흐름만큼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1초씩, 그리고 1초씩 하나씩 센다.
루카스는 기계와 같은 정밀도로 체내시계를 작동했다.
하루가 지날 때까진 별 느낌이 없었다. 위장이 조금 꺼진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뿐이다. 애초에 루카스도 과거 마법 연구에 힘쓸 때면 삼일밤낮을 굶은 적이 몇 번이고 있었다.
하루가, 그리고 또 하루가 더해졌다.
공복의 존재가 확연해졌다. 적어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섰다. 그래도 여전히 버틸 만하다.
루카스는 상념에 잠기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시간이 터무니없을 만큼 느리게 흘러가는 걸 느꼈다.
다시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공복만큼이나 존재감을 드러낸 녀석이 있었다.
갈증.
식도가 바싹 마른 사막이 된 것 같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따갑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침을 삼켜야 되는데, 구내에서 타액의 분비가 무척이나 더뎠다. 그래. 입안이 텁텁하다. 혓바닥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모래처럼 느껴졌다.
“…….”
루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대개의 고통은 루카스에게 시련이 되지 못한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루카스는 물리적인 고통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루카스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 눈을 떴다.
히죽─
페일은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생각에 변화가 온 건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지점인가.’
루카스는 스스로 느끼고 있는 굶주림을 직시하며 생각했다.
아마도 이 시점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사餓死를 할 단계다. 개체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한 달 넘게 살아 있을 인간은 없다.
여기서 죽는다면 차라리 편할 것이다.
하지만 페일이 겪은 굶주림은 다르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이 앞에 있을 고통은,
생명체는 그 누구도 겪지 못한 고통,
죽음 너머에 있는 고통이다.
그리고 시작됐다.
“……!”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돌연 목구멍이 확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위장이 수축이라도 되는 것처럼 확 오므려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그 중심엔 칼날로 만든 공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서, 루카스는 그 과정이 반복될 때마다 침음을 삼켜야만 했다.
구역질이 나왔다. 물론 토할 게 없었다. 이미 속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노랗게 물든다.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괴롭다.’
힘들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비교적 냉정함을 유지한 채 생각했다.
평범한 인간이 이만한 고통을 마주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 고통에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지 고려할 것이다.
잘 수도 없다. 기절할 수도 없다.
굶주림이 그러도록 내버려 두질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방법은.
‘…죽고 싶다.’
─아.
그 순간 루카스는 불현듯 이해했다. 과거 청발의 소녀가 느꼈던 심정을, 엿본 기억이 아닌 동일한 체험으로 학습했다.
페일은,
오래 살았다.
많은 이를 보았다.
굶어 죽는 이들도, 아사를 한 시체들도 산더미처럼 보았다.
누구나가 동정을 품거나, 혐오를 품을 그 광경을 보고 그녀는 어떤 심정을 품었나.
부러움,
질투심에 눈이 돌아갈 만큼의 부러움을 느꼈다.
왜냐면, 어떤 수를 써도 그녀는 죽을 수 없었으니까.
* * *
고통이란 이름의 눈덩이가 불어났다. 몸집을 불렸다.
좌선하듯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던 루카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표정을 찡그리거나, 눈썹을 꿈틀대거나, 입술을 움직이거나, 미약했던 움직임은 얼마 안 가 거세졌다.
“으, 그윽…….”
루카스가 복부를 움켜쥔 채 신음을 뱉어댔다.
…사흘벌레, 사흘벌레라고 했나? 놈들이 주는 끔찍한 고통을 기억한다. 지금 루카스가 느끼고 있는 고통은 그때 느꼈던 것 못지않았다. 폐기장에서만 존재하는 청소부들이, 몸뚱이 속을 활개치며 아주 천천히 내장을 좀먹고 있는 것만 같다.
“하, 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루카스의 목소리에선 바람 새는 듯한 소리만이 나왔다.
그게 괴로웠다.
바싹 마른 기도를 공기가 지나쳤고, 그때마다 얼음으로 다듬은 칼날이 목구멍을 사정없이 할퀴는 것 같아 너무 고통스러웠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이 되었다.
더 이상 앉아 있을 기력이 없었다.
루카스는 바닥을 기었다.
때때로 자신의 목을 조르거나, 복부를 주먹으로 쳤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효과도 없었다.
질식으로 인한 고통, 혹은 타격에 의한 고통도 굶주림 앞에선 의미가 없었다. 이미 가장 뜨거운 불꽃에 몸뚱이가 타고 있으니, 성냥불로 지지는 것 따위는 고통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다.
“시간을 세고 있었죠?”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으나 루카스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페일은 빙글빙글 웃으며 루카스를 내려다봤다.
시체들 사이에 파묻혀 지옥을 거닐고 있을 남자를 향해 입을 연다.
“그런데 도중부터는 더 이상 못 셌을 거예요. 그런 거에 집중할 여유는 사라졌을 테니까. 후훗. 어때요. 쉽지 않죠?”
페일이 키득 웃었으나 루카스는 그 웃음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내가 말해 줄게요. 이제 3개월 지났어요.”
하지만 그 말만큼은 또렷이 들렸다.
─3개월.
아.
그런가.
겨우, 그것밖에…….
“내가 겪은 세월이 비하면 새 발의 피, 그것조차 못 돼요. 찰나라고 해도 무방하겠죠. 그런데도 아저씨는 벌써 이런 꼴이에요. 추하게 바닥을 기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푸흐흐.”
익살스러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린다.
“…아무리 내 고통을 따라 겪으려 해도, 그런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성해도, 아저씨와 나는 근본적으로 달라요. 결코 나처럼은 될 수 없단 말이에요. 왜냐면, 그쪽은 언제든 포기할 수 있잖아요.”
속삭임은 유혹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둔다’고 한 마디만 하면 끝나요. 그리고 뭐, 다음은 나랑 싸우면 되잖아요?”
“…….”
“힘 싸움에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군림자의 힘도 빌리고 있겠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나랑 싸워서 승리를 도모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겠어요?”
루카스는 멍하니 페일을 올려다봤다.
굶주리고,
목이 타는 이 순간,
페일의 제안은 너무나도 달콤한 벌꼼의 향기처럼 루카스를 뒤흔들었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조건에서 건네지는, 달콤한 유혹.
…….
…….
…….
─을,
이 루카스 트로우맨이,
대체 몇 번이나 떨쳐냈다고 생각하는 거지?
“……!”
페일이 흠칫 몸을 떨었다.
굶주림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몸을 비틀며,
루카스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