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78화
페일과의 관계는 마지막까지 나쁘지 않았다. 그건 루카스를 죽이기 직전 보였던 태도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루카스가 노골적인 도발로 자극하기 전까지, 페일은 다른 결말을 찾고 싶어 했다. 그 때문에 답지 않게 여러 번의 기회까지 줬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루카스와 타협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루카스는 그 제안을 거절하게 됐지만,
‘그 정도 관계까지만 진전되어도 좋아.’
어쩌면 청기사 페일을 완전한 아군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다다랐던 관계까지 다시 진척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번 생처럼 일이 꼬이진 않을 테니까.
뇌존의 잔념을 내면에 받아들이게 됐고,
이리스와 손을 잡은 디아블로가 페일과 대립하는 걸 막을 수 없었으며,
끝내는 그녀와 완전히 적대관계가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 모든 사정을 알게 됐다.
‘…마지막.’
신이 남긴 말을 다시금 떠올리며 경각심을 세웠다.
예상하지 못한 건, 지금 루카스의 내부에 이미 뇌존이 존재하고 있다는 거지만.
‘뇌존.’
[…….]
속으로 불러 보아도 여전히 대답이 없다.
하지만 사라진 게 아니다.
뇌존은 여전히 루카스의 의념 속 어딘가에 존재하고, 지금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엔 반드시 숨겨야 돼.’
지난번 삶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만 꼽자면, 루카스가 뇌존의 힘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도 알게 된 점도 있었다.
군림자와 4기사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페일은 더욱 그렇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것도 갖지 못한 그녀이기에, 태생적으로 지배자의 운명을 가진 군림자를 맹목적으로 증오할 수밖에 없다.
‘좋아.’
페일과 지향해야 될 관계가 보였다.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루카스란 존재를 꺼리지 않도록 상황을 이끌어 가자. 그렇게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형성시킨 뒤엔, 지난번 삶처럼 치명적인 실수만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쉽다.
루카스는 모두 알고 있다.
페일의 과거, 그녀의 의식상태,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야 비위를 맞출 수 있고, 어떤 말을 해야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지는지, 모두 알고 있다.
…….
알고는 있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에 루카스가 멈칫했다.
하지만, 뭐?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는 거냐?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 할 때가 아냐.’
마지막, 이번이 마지막 회귀다.
이 이상의 실패는 용납받지 않는다.
사소한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모든 판단과 행동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여태껏 겪은 여러 번의 회귀는 다 그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건 스스로의 죽음이 아니었다.
이리스의 죽음을 떠올렸다.
그녀의 과거를 떠올리고, 죽기 직전에 지녔던 감정을 떠올리고, 자신에게로 뻗으려다 거뒀던 손길을 떠올렸다.
“…….”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억지로 조였다.
* * *
“…그러니까, 이곳에선 제가 선배인 셈이죠!”
페일이 가슴을 쭉 펴며 콧대를 세웠다. 루카스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잘 부탁한다.”
“히히. 네, 아저씨!”
…아저씨라.
우선은 저 호칭법부터 바꿔야 하나. 다시 ‘루카스’로 부르도록 상황을 유도해야 된다.
루카스는 생각을 이어 가면서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금부턴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는가도 중요하다.
우선은 르샤를 구하는 게 순서다.
슉.
보이드로 설정한 좌표로 이동하자, 피를 철철 흘리며 비틀대고 있는 르샤의 모습이 보였다.
“아, 윽…….”
르샤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핏물에 적셔진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봤다. 동공이 풀린 걸 봐서, 아마 이쪽의 형상 정도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루카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괜찮나?”
“…누구냐.”
날이 선 목소리가 돌아왔으나 지금 그녀에게 대응할 수단은 없을 것이다.
루카스는 어려움 없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다음, 육체의 상처를 치료해 줬다.
“어……?”
그러는 김에 확인할 것도 있었다.
“육체는 완벽히 회복시켜 뒀다. 그러는 김에 마나도 채워 놨고.”
“어, 아, 네?”
“그래서 마나 말인데, 사용하는 데 이상은 없을 것 같나? 이것만은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거라서.”
“어, 그게…….”
“시간이 없으니 빨리 말해 주면 좋겠는데.”
잠시 우물거리던 르샤가, 곧 자신의 체내를 확인하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대답이라곤 할 수 없는 혼잣말이었으나 그 반응만으로 충분하다.
아무래도 보이드를 써서 타인의 마나를 회복시켜 주는 것에도 별문제는 없는 듯하다.
“헤에.”
페일이 흥미 섞인 눈동자로 그 광경을 바라봤으나, 딱히 보이드에 대해 캐물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언제나 그랬다. 지난번 삶에서 마성에 대해 대뜸 물었을 때도, 페일은 루카스가 어떻게 그곳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의아해하지 않았다.
“그럼…….”
별거 아닌 의문은 풀었다.
루카스는 르샤와 페일을 데리고 지저도시의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가 봐.”
“어, 저기, 당신은 누구죠?”
“…….”
루카스는 지난번처럼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밝혀야 될지 고민했다.
대답에 앞서 르샤를 바라봤다.
어두운 금색의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 고동색 로브는 분명 자신과 느낌이 비슷하다.
하지만 이목구비는 잘 모르겠다.
‘닮은 건가?’
닮은 거겠지.
아직까지도 남매란 개념은 루카스에게 낯설지만.
“혹시 마성의 마법사신가요?”
“아냐.”
“그런데 어떻게 이런 힘을…….”
“…….”
이런 힘이라.
르샤는 보이드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하긴. 그렇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비기닝 위저드는 보이드에 대해 알고 있다. 루카스가 ‘극소시간대’에 진입할 수 있었던 건, 비기닝 위저드가 힌트를 주었기 때문이다.
“가 봐.”
루카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엔 자신의 이름을 밝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르샤는 눈치가 빠른 것 같다. 루카스가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길 꺼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대신 다른 제안을 했다.
“내가 왜?”
“답례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답례.”
“…바라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루카스는 단칼에도 거절하려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다.
지저도시의 주인인 미카엘.
…녀석에게 얻을 게 있을지도.
“좋아. 같이 가자.”
루카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저도시로 이동했다.
* * *
지저도시에 발을 들이는 건 오랜만이다.
이 모래사막 밑에 존재하는 도시의 경관은, 당연하지만 여전했다.
“와아!”
“돌아옴! 트로우맨이 돌아옴!”
“트하! 트하!”
미글링들도 여전했다.
이 작은 난쟁이들인 르샤의 귀환에 뛸 듯이 기뻐했다.
“잘 있었어?”
르샤도 부드럽게 웃으며 화답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좀 미숙한가.’
여전히 대다수의 주의가 이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그래. 올바른 반응이다.
비록 목숨을 살려 줬다고 해도 르샤에게 있어 루카스는 여전히 정체불명의 인물. 응당 경계를 쏟는 게 당연하다. 안 그랬다면 오히려 여동생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좀 더 자연스럽게 살필 수는 없는 건가?’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생각해 보니 루카스도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마도 르샤가 지저도시로 루카스를 부른 까닭 중엔 탐색의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본진까지 끌어들이는 건 위험한 도박이라고 생각되지만.
‘도시에 있는 동료들을 믿는 걸까?’
그럴 수도.
아무튼 루카스는 스스로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었다.
“엇! 트로우맨!”
…본인에겐 없었다.
한 미글링이 루카스를 가리키며 그리 외치자, 다른 미글링들의 고개가 동시에 홱 돌며 이쪽을 향했다.
루카스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또 트로우맨!”
“트로우맨이 두 명!”
“기쁨도 두 배!”
“우헤헤.”
미글링들이 루카스 주변을 감쌌다.
“잠깐만, 이럴 시간이…….”
우르르 달려온 미글링들이 그대로 헹가래라도 할 기세라 루카스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트로우맨……?”
르샤는 의아한 눈동자로 루카스를 바라봤다. 일이 귀찮게 꼬이고 있다.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 막막해하는 순간.
“우리 좀 급하니까 비켜 줄래요?”
“……!”
페일의 한 마디에 미글링들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으, 응. 알겠음.”
“급한 건 어쩔 수 없지.”
“가셈, 가셈. 안 막음.”
그리고 양옆으로 좌악 흩어지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페일이 만족스런 얼굴로 말했다.
“자, 가요.”
* * *
신전에 들어가기 직전, 미글링들이 르샤와 페일을 막아섰다.
“안 됨.”
“여기서부턴 저 트로우맨만 입장 가능함.”
“…….”
페일이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자, 미글링들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 그렇게 바라봐도 안 되는 건 안 됨.”
“종말에 직면하더라도 타협은 없음.”
“차라리 날 죽이라.”
“누가 뭐래요? 씹을 거나 좀 줘 봐요. 입 심심하니까.”
페일은 미글링들이 그리 싫지 않은 듯 킬킬 웃으며 그리 말할 때, 슬쩍 르샤가 거리를 좁혀왔다.
“당신은 혹시 미카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뭐.”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루카스가 대답을 흐리자, 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부디 유익한 대화를 나누시길.”
르샤의 경계가 눈에 띄게 줄었다. 단순히 미카엘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리 되었다. …녀석을 제법 믿고 있는 것처럼 보여 조금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데미갓 로드와, 트로우맨의 이름을 가진 마법사 간에 신뢰감이 형성되어 있는 광경이라니.
‘…쓸데없는 생각할 때가 아니지.’
루카스는 고개를 저으며 예배당을 향했다.
끼익-
문을 열자 쭉 이어진 복도와 끝에 놓인 제대祭臺가 시야에 들어온다.
미카엘의 모습은, 없다. 보이지 않는다.
저번엔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왔다는 건가.
잠시 의자에 앉아 기다릴까 하는데 제단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예배당에 올 때마다 미카엘이 자주 읽고 있었던 책이다.
호기심이 들어 책 표지를 자세히 살펴봤다.
[쓰레기장에도 밤하늘은 펼쳐져 있다]
[Mark]
“…….”
소설인가?
밑에 적힌 건 저자인 것 같고.
루카스가 책을 펼치려는 순간이다.
[당신은 누구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는 놀라지 않고, 들고 있던 책을 다시 제대에 놓았다.
“실례했군.”
[…….]
미카엘.
로드와 똑 닮은 생김새를 가진 존재에게서 짙은 경계심이 느껴졌다.
평소와 달리 이쪽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듯한 발언도 하지 않는다. 루카스는 미글링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충분히 감추고 있었다.
마주하기 전까진 제대로 통할지 의문이었는데, 반응을 보니 성공한 것 같다.
‘과연.’
지금의 난, 미카엘의 통찰력으로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건가?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어. 너나 이 도시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까.”
[그 말을 쉽게 믿기 힘든 입장이란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허의 세계에 오고 로드의 모습을 한 미카엘을 보았을 때,
루카스는 의혹과 경계, 그리고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매달리듯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루카스는 무지했고, 약했으니까.
그러나 이후 몇 번의 회귀를 반복했고, 이제는 그 관계가 역전됐다.
앞서 루카스가 느꼈던 것들을 지금은 미카엘 쪽에서 느끼고 있고, 루카스는 더 이상 그에게 궁금한 게 없었다.
그리고.
“미카엘.”
[내 이름을 어떻게─]
“나와 거래하지 않겠나?”
이제는 이런 말도 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