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76화
양인현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 한 세계를 지웠기에 멸무滅武, 황폐화된 세계에 씨앗을 심었기에 재화栽花, 긴 시간이 흐른 후, 꽃무더기가 다시 피어나기에 만개滿開……. 그럼 다음 초식은 무엇이지?
불쾌함을 느낀 이유는 쉽고 유치했다.
- 네가 검에 담고 싶은 건 파괴인가, 재생인가? 대답할 수 있겠나? 아니. 그럴 수 없을 테지.
놈의 말은 정확히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정곡을 찔리니 오히려 성을 내는 꼴이라고 할까.
“…후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려 했으나 잘 지워지지 않았다.
악마왕의 혈액은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고약한 냄새를 풍겼고, 역겨울 만큼 끈적거렸다.
[알겠다. 네놈의 마지막 초식.]
악마왕의 몸을 빌린 마왕.
놈의 사지는 찢겨나가 있었고 몸뚱이엔 셀 수도 없을 만큼의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검법에 당한 게 아닌, 수많은 작은 칼날에 도륙이라도 당한 듯한 몰골이다.
[그건 미완성이로군.]
“…….”
[하나 강하다. 오히려 미완성이기 때문에 더욱이, 지금의 네놈에겐 가장 잘 맞는 초식이겠어.]
마왕이 픽 웃었다.
[십이허주의 힘. 내 생각보다 좀 더 윗줄이었나. 아니면 그저 네가 특별한 것일까. 재밌는 고찰거리가 하나 늘었군.]
그리고 몸뚱이에서 점차 생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법 괜찮은 시간 죽이기였다.]
툭, 고개가 떨궈졌다.
시체가 된 악마왕의 몸뚱이는 얼마 안 가 잿더미가 되어 흩날렸다. 양인현은 무심한 눈동자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지금 난 삼천세계로 온 직후보다 더 강해졌다. 그게 아니었다면 네게 졌겠지.”
양인현은 발자국을 옮겼으나, 채 몇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쿨럭.”
꾹 참았던 핏물이 뒤늦게 치밀어 올라왔다. 양인현은 의복이 더러워지는 걸 개의치 않고 순순히 뱉어냈다.
더 이상의 출혈은 목숨에 지장이 갈 테지만, 이걸 억지로 삼켜도 딱히 바뀌는 건 없겠지.
양인현은 흐릿한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봤다.
[넥스트 스테이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으나 시야는 곧 새까맣게 물들었다.
“…….”
왜 이렇게, 미련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싸운 거지. 나는.
양인현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매상검의 마지막 초식을 실전에서 쓴 적은 없었다. 그럴 만한 상대도 거의 없었거니와, 만약 있다고 해도 사용을 망설였을 것이다.
마왕의 말대로 이 초식은 미완성이었으니까. 단순히 육체로 가는 부담감만이 아닌, 정신력의 소모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그야말로 존재력을 갈아 넣은 일격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희미해진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매상검 최후의 초식은 목숨을 버릴 각오가 갖춰졌을 때 비로소 사용하는, 양인현 필사의 비기였다.
‘왜?’
마왕과의 싸움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나?
냉정히 말하면 아니다.
‘네가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약속은 지켰다.
덕분에 죽음의 순간에 앞서 어울리지도 않게 만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아쉬움이 더 크다.
매상검은 양인현의 내면세계를 검술의 형태로 발현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매상검 마지막 초식에 담고 싶었던 건 양인현이 그리고 싶었던 미래였다. 여태껏 미완성이었던 이유는 그리고 싶었던 뚜렷한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런데 변화가 생겼다.
이제 그리고 싶은 미래가 생긴 건가?
- 내게 있어, 인간성이란, 달빛 아래 한잔의 술잔을 기울이며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너는 이런 나를, 인간이라고 불러 주는 것인가.
이런 나를 보고 해답을 얻은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고,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다.
‘어떤가? 술잔이라도 기울이면서 얘기를 나눠 보는 게.’
이종학에 대해서 해줄 말이 있다고 했지.
그래.
날이 조금 추운 날, 옷깃을 여미지 않는다면 바람의 쌀쌀함이 느껴지는 날, 달밤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날이면 좋을 것이다.
양인현은 억지로 일어섰다. 그리고 검을 지팡이 삼아 걸었으나, 얼마 걷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 한 짝이 없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은 몰랐다. 이곳은 허의 세계가 아니니, 잃은 다리를 재생시킬 방법도 없다.
어쩌면 계속 이대로 살아갈 수도 있으니, 외다리에 알맞은 무공을 개발해야 할지도 모른다.
푹!
무릎을 꿇고, 지면에 꽂은 검에 몸을 기댔다.
눈꺼풀이 무겁고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쉬면서, 새 초식의 이름이라도 생각하자.
‘…술잔에 비친 달.’
그런 이름이 괜찮을 것 같다.
…매상검梅常劍, 제삼초식第三招式. 경월鏡月.
양인현이 희미하게 웃은 채로 굳었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 * *
루카스는 자신이 죽는 미래를 직시하면서도 절망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파도처럼 밀려오는 체념을 밀어내려 노력했다.
…확정된 미래를 바꿀 방법이란 정말 존재하지 않나?
루카스는 희망을 찾아 발버둥 쳤다.
하지만 수많은 가능성을 가졌던 별의 바다에선 더 이상 색채가 느껴지지 않았다. 가능성의 대해는 이미 썩은 물이 되어 멈춰 있었다.
“무엇을 보았나, 루카스 트로우맨.”
뇌존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고, 멍청한 질문을 할 필요도 없겠군.”
짜증 섞인 기색으로 혀를 찼다.
전황이 달라졌다는 건 누구보다 확연히 느끼고 있겠지.
뇌존의 말을 빌리자면, ‘흐름’이 상대에게 넘어갔다. 감정을 폭주시킨 페일은 말도 안 되는 무위를 뽐내며 뇌존을 압도하고 있었다.
“네놈이 벌인 미친 짓거리가 실효를 거뒀다는 건가. 정말 짜증 나는 놈이야. 이 뇌존에게 간접적인 형태로나마 패배를 안겨 주다니.”
[미안.]
“흥. 어차피 네놈의 몸뚱이다.”
그 순간 몸을 두른 우레가 페일의 칼날에 잘려 나갔다.
갑주와 방패, 검까지 모두 벗겨진 채 알몸이 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 그러나 뇌존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쯧.”
페일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턱밑까지 거리를 좁힌 뒤, 칼자루를 양손으로 잡은 채 검을 올려 벴다.
미래를 보고 있는 루카스조차, 일순 시야가 푸른색 섬광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음.”
그리고 뇌존이 짧은 침음을 흘렸다.
남은 팔 한쪽이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여기까진가.”
담담한 목소리를 내뱉은 순간.
푹, 뇌존의.
아니, 루카스의 몸뚱이에 칼날이 파고들었다.
“…….”
루카스의 자아가 돌아온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다. 원래부터 감각은 공유하고 있었으니, 고통이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칼날은 치명적인 급소가 아닌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뇌존이 마지막 순간 몸을 비튼 덕분이다.
덕분에 아주 약간의 시간이 더 허락됐다.
눈앞엔 페일이 있었다.
싸움이 시작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그녀가 있었다.
손 뻗으면 닿는 곳, 그보다 더 가깝게.
“날 죽인 다음엔 어떡할 거지? 널 거슬리게 만들었던 자들은 다 죽였잖아.”
“아닌데요.”
페일의 입가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지상에 있는 흑기사, 군림자, VIP. 치워야 할 쓰레기는 산더미처럼 있어요.”
“너 혼자서 그들 전부를 죽이겠다고? 그게 정말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왜 안 될 거라 생각해요?”
페일의 미소가 점차 위험한 색으로 물들었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아.”
“아뇨. 루카스는 몰라요.”
“비밀친구.”
미소가 굳었다.
눈동자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가, 뒤이어 고요한 분노가 차올랐다.
“누구한테 들었죠? 백기사, 그 얼간이가 말한 건가?”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서, 그녀는 이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이 없었나.
뭐든 상관없었다. 루카스는 허탈함 섞인 웃음을 흘렸다.
“너에게 비밀이란 죄였겠지. 같은 죄를 저지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고,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거야.”
선량한 존재,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는 사람일수록 페일과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오히려 혐오감만 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면, 심지어 그 죄가 자신과 흡사하다면…….
페일은, 그 존재를 사랑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겠지.
“그걸 알면서.”
이어지는 목소리는 흘러나온다기보다 쥐어 짜내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해주지 않았나요?”
페일이 검을 뽑았다. 칼날이 살결을 가르는 서늘한 감촉에, 루카스의 목구멍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알고 있잖아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
“…….”
“자. 이리 와요.”
페일이 루카스를 이끌었다. 건틀릿 너머의 손기로부터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천사 같은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루카스를 어느 장소로 끌고 갔다.
한 구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먹어요.”
“…….”
이리스의 시체는,
지면에서 싸늘히 식어 가고 있었다.
“그게 시작이에요. 저걸 먹으면 여태까지의 일은 다 용서해 줄게요. 몸에 있는 군림자? 내가 몰아낼게요. 악마왕과 디아블로? 그들이 VIP인 이상, 그리고 군림자의 힘을 빌린 이상 내 척결대상에서 벗어날 순 없어요. 하지만 아저씨는… 루카스는 달라요.”
“…….”
…이제는 알고 있다.
페일의 이 제안이 얼마나 특별한 건지.
그리고 지금의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각별히 여기고 있는 건지도.
잠시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을 때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그녀는 아마 꺼낸 말을 충실히 지킬 것이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축적된 애정을 가감 없이 루카스를 향해 쏟아내겠지. 그리고 페일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그녀의 애정을 역이용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페일의 정신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고 있다.
처음엔 비위를 맞추듯 행동하다가, 서서히 관계를 역전시켜 나가는 것도 지금의 루카스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군림자와 동격의 힘을 가진 존재를 뜻대로 다룰 수 있게 되는 것.
여태까지 반복됐던 삶에선 끝자락조차 잡을 수 없었던 놀라운 기회다.
“어서요.”
페일이 싱긋 웃으며 재촉했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발걸음이다.
이리스를 먹는 것,
이미 죽은 시체. 생명력이라곤 눈곱만큼 남아 있지 않은, 싸늘히 식어가는 고깃덩이를 먹는 건 이미 경험이 있다.
“…….”
루카스는 이리스를 향해 걸어갔다.
만신창이인 꼴이라, 고작 몇 발자국 옮기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핫.”
페일이 키득거렸다.
이리스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루카스는, 그녀의 두 눈동자를 감겨 줬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뭐 해요?”
“아까부터 마음이 쓰였거든. 눈을 뜨고 있는 게.”
“그딴 걸 묻는 게 아니잖아.”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그 압박감만으로, 루카스는 다시 한번 핏물을 게워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벌써 잊었어요?”
“페일, 난 너를 괴물로 여겼어.”
“…….”
뜬금없는 말에도 페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줄곧 경계하고, 두려워했지.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뭔데요.”
“난 널 계속 이해하려고 했다.”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어떤 존재인지 계속 알려고 했어.”
그 이유가 공포에서 우러나온 것이든, 혹은 다른 무언가이든, 계기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넌 한 번이라도 그랬었나?”
페일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나를 이해하려고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
“아니겠지. 그딴 거엔 관심도 없었겠지. 너는… 그냥 계속 누군가를 바꾸려고만 들었어. 타인의 생각이 어떻든, 그런 건 네 알 바가 아니었어.”
“…단언하는군요.”
“그래. 왜냐면 네게 만약 조금이라도 이해심이 있었다면, 내게 이딴 역겨운 제안은 안 했을 테니까.”
‘역겨운 제안’이라는 말에 페일의 표정이 또다시 바뀌었다.
“내가, 역겹다고요?”
이 말은 페일의 역린일 것이다.
루카스는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다.
이 말이 페일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도 알고 있다.
“어.”
그래서 더 또렷하게 말했다.
“두 눈으로 못 볼 만큼 역겨워.”
푹.
다시 한번 짧은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는 자신의 목구멍을 꿰뚫은 페일의 검 대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불안정하고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푸른색 안광을 두 눈에 담았다.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무엇을 싫어하는지부터 알아야 하지.’
목구멍부터 찌른 건 더 이상 지껄이는 걸 듣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겠지.
페일이 검을 거뒀다. 루카스는 울컥울컥 차오르는 핏물의 감촉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루카스는, 가장 강한 마음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리스 피스파인더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털썩.
쓰러진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이, 전지의 권능으로 보았던 미래의 모습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까지.
루카스가 정말 주의 깊게 살폈던 미래는 ‘이 순간’까지다.
전지의 권능, 이라고 거창하게 말은 했지만 뇌존의 말이 옳았다.
해당 공간에서 일어난 모든 과거, 현재, 미래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이 가공되지 않는 정보의 원형으로써 뇌내에 축적됐을 뿐이다.
그러니 펼쳐진 풍경은 ‘그 이후’의 것이겠지.
“…….”
흐릿해지는 정신, 가물거리는 시야로 누군가 하늘에 서 있는 게 보였다.
한 남자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뒤늦게 깨달은 페일도 표정을 굳혔다.
‘[루카스 트로우맨]…….’
이 세계에서, 그의 존재를 안 직후부터 쭉 주목했으나 끝내 정체를 밝히지 못했던 자.
그자가 루카스를 보고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지……?’
자신을 흉내 낸 듯한 어설픈 얼굴을 보며, 루카스는 마지막으로 물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뒤이어 시야가 암전했고,
루카스 트로우맨은 또다시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