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75화
저주받은 운명에도 끝은 있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굶주림뿐이던 삶이 끝났다. 그러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포기하는 걸 포기할 만큼 긴 시간, 해당 우주의 수명이 다한 순간에서야 나는 해방됐다.
그러나 해방은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이었다.
잿빛 사막,
하늘을 수놓은 다양한 색채,
생명의 흔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세계에서.
“──.”
불현듯,
나의 역할을 깨닫게 됐다.
그건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지식들이 우악스럽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렇게 알게 된 진실들 하나하나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나는.
“…큭큭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내가 그토록 고통 받은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됐는데.
“신神을 찾지는 않았겠지.”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색 피부와 대조되는 탈색된 머리카락을 가진 자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신은 찾지 않아. 그게 우리.”
툭툭 끊어지는 말투는 겪어 본 적이 없을 만큼 독특했으나, 말의 의도마저 왜곡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우리?”
그래서 더욱 역겨웠다.
“같은 취급하지 마요. 당신이 굶주림이 뭔지 알기나 해?”
기사라고 다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같은 고통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내게 동질감을 형성하려 들지 마라, 굶주림도 모르는 개자식들아.
“몰라. 하지만 알아. 다른 건.”
“뭘요.”
“우리가 왜 이런 존재가 됐는지.”
“…….”
“있어. 바깥엔. 기적이 수억 번 겹쳐져 태어난 존재가. 긴 삶을 살며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을 존재가. 동전의 양면, 빛과 어둠처럼, 우리가 가져야 할 모든 축복을 가져간 존재.”
“…….”
이건 흘러들어온 지식으로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누군데요. 그게.”
“군림자.”
짤막한 대꾸와 함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목적을 가진 채 탄생하는 걸지도 몰라. 그자가 정한 분류법에 따르면 우리는 날 때부터 패배자라는 것. 그리고 군림자는 태생적인 절대자, 첫걸음부터 모든 걸 손에 넣은 존재지.”
“그자가 누군데요.”
“신.”
“…….”
그날.
신과 군림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날부터, 그들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질투했다.
나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휩싸여 다시 한번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런 나의 내면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말할 생각도 없다.
약한 모습을 비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웃었다.
* * *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가 하나씩은 존재한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족 이상의 존재라고 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밝히고 싶지 않은 것들.
페일의 경우엔 굶주림으로 점철된 과거가 그럴 것이다.
‘미안하다.’
루카스는 우선 사과했다.
그녀는 자신의 기원에 대해 숨기고 싶어 했으나, 루카스는 어떤 허락도 받지 않고 그 기억을 엿봤다. 비난받아도 마땅한 행위다.
‘그랬구나.’
하지만, 그로 인해 루카스는 페일의 본질에 대해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군림자에게 향했던 맹목적인 증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아하하……! 아하하하……!”
페일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으나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미친 것처럼 보였으나 누구보다 냉정했다.
이제 루카스에겐 그게 보였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반드시 해줘야 할 말이 있었다.
비록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해도, 그게 무의미한 일이라고 해도.
[이대로 가면,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거다, 뇌존.]
실제로 그랬다.
뇌존은 비록 팔 하나가 잘려 나갔지만, 외팔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전투 센스를 보여 주고 있었다.
페일의 투구를 날린 것에 그치지 않았다. 본인의 피해는 최소화시키며, 페일의 갑주를 끊임없이 파손시키고 있다.
뇌존은 여전히 페일과의 싸움에 집중하며 대꾸했다.
“[이대로 가면], 이라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뭐냐?”
[승률을 떨어뜨리는 미친 짓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이 어처구니없는 개소리를 들은 게 다른 녀석이었다면, 찰나라도 몸뚱이가 멈칫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뇌존은 그런 얼간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으나, 느끼고 있는 황당함은 그에 못지않았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거냐? 이제 겨우 기세를 잡았다. 청기사에게 넘어갔던 흐름을 겨우 이쪽으로 가져왔다고. 알겠나? 이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면 두 번은 없다.”
뇌존은 바라봤다.
투구가 날아가고, 갑주가 절반을 박살 났는데도 기력만큼은 전혀 쇠하지 않은 존재를 바라봤다.
“또다시 청기사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면, 그 순간 필패 확정이다. 말했다시피 저 녀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으니까.”
[모두 맞는 말이군.]
“그러면…….”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뇌존은 분명 자신이 통제하고 있는 육체가 멋대로 움직이는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됐다. 입이 멋대로 열리며 목소리를 내뱉은 것이다.
“이번만큼은 내 억지에 따라 줘라.”
말은 내뱉은 직후, 뇌존의 눈동자가 놀란 듯 살짝 커졌으나 곧 다시 좁혀졌다.
“또 성장한 거냐? 과거, 현재, 미래를 직시하면서 몸에 대한 통제권까지 되찾다니.”
“고작 혓바닥과 입술 정도지만.”
“뭘 하려는 거냐?”
“말했잖아. 승률을 떨어뜨리는 미친 짓을 좀 해야겠다고.”
“…네놈, 설마 지금 ‘보고 있지’ 않고 있는 거냐?”
전지의 권능을 말하는 거다.
루카스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병행하고 있어. 하지만 슬슬 한계야. 너도 알 텐데? 이딴 쓸데없는 사담이 길게 이어질수록 승률은 점점 곤두박질친다는 거.”
누군가 이 광경을 본다면 웃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1인 2역이라도 하는 듯, 혼자서 자문자답하고 있는 걸로 보일 테니까.
“감히 이 뇌존을 협박하는 거냐?”
“합리적으로 생각하란 뜻이다. 말해 두는데, 난 이 억지를 굽힐 생각이 없어.”
“갈수록 밥맛이군.”
“…너, 그런 말도 알고 있나?”
그러나 유일한 관중인 페일은 그들의 대화에 손톱만큼도 관심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그 웃음의 이유가 눈앞에 있는 존재들의 웃기지도 않은 만담 때문은 아니었다.
“하. 그래. 어디 한번 네놈 멋대로 굴어 봐라.”
뇌존은 그리 말하며 다시 한번 싸움에 집중했다.
루카스가 되찾은 통제권은 고작해야 혓바닥 정도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페일.”
청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페일.”
극소시간대, 그보다 더 압축된 시간 속.
치열한 전투를 속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루카스는 한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묵묵부답.
페일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들을 생각이 없는 건가.’
그러나 이 엇갈림을 만든 것엔 루카스의 잘못도 있었다.
그래서 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너는 틀렸어.”
“─핫.”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페일의 눈동자에 냉소가 스치며, 휘두르는 참격의 위력이 증가했다.
뇌존이 쯧 혀를 찼다. 감정기복에 따라 강해지거나, 약해지거나 하다니. 그딴 건 약자에게나 통용되는 법칙인데. 역시 4기사란 여러 의미로 섭리를 벗어난 존재인가.
싸움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루카스는 지금부터 더 거칠고 난폭하게 페일의 심경을 자극할 것이다. 그로 인한 뒤처리는 대부분 뇌존의 몫이 되겠지.
루카스는 녀석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이제야 네 행동원리에 대해 알게 됐어.”
어떤 시간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떠올린다.
그 시간대에서, 루카스는 폐기장이란 곳을 향했다. 그곳으로 안내해 준 건 다름 아닌 페일이었다.
‘수많은 루카스’들의 시체,
강해지기 위해선 그들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목적까지 페일은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카스는 그들을 먹어 치웠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우며 죄를 저질렀다.
나중에 재회한 페일은 그 사실을 깨닫고 누구보다 기뻐했다.
처음엔 그 이유에 대해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페일은 그 순간 저열한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누군가를 타락시키면서 느끼는 배덕감에서 중독적인 쾌감 또한 얻었다.
…사랑스러움 또한 느꼈겠지.
그건 같은 죄를 가진 자에게만 향하는 비틀린 애정이었다.
똑같은 상처를 가진 자만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질이 나쁘다.
페일은, 그런 자가 없다면 만들어 내려고 했다.
그를 위해 루카스를 폐기장으로 안내했고,
나비에겐 부모를 먹도록 유도했다.
“그래선 안 돼.”
루카스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 방법은 틀렸어.”
“뭐가 틀렸다는 건데요.”
페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가 폭주한 이후, 처음으로 대화가 성립한 것이다.
“지옥을 거닐고 있다고 남을 끌어당기면 안 돼.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잠시 동안 고통이 희미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주변은 여전히 지옥이야. 바뀌는 건 무엇 하나 없어.”
“바뀌는 거? 난 변화를 바라지 않아요.”
“아니. 넌 변화를 바라고 있다. 자기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는 걸 절실히 바라고 있어. 넌 내가 아는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 혼자 있는 걸 버틸 수 없는 거야.”
창백한 칼날에 실리는 힘이 더욱 배가되었다.
우레를 두른 팔이 그 공격을 막아 냈으나, 뇌존의 몸은 지반째 움푹 내려앉고 말았다.
울컥 피를 쏟는다. 그제야 뇌존은 루카스가 말한, ‘승률을 떨어뜨리는 미친 짓’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해했다.
이딴 대화를 이어가며 페일을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패배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제발 나를 봐달라고, 내 상처를 이해해 달라고, 매 순간 피를 토해가며 외치고 있었지.”
루카스는 천천히 과거를 회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미안해. 눈치채지 못해서.”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계속 견제했고, 주의했다.
그건 이번 삶, 페일과 가장 가까워졌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번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삼천세계로 나온 이후에도 페일을 위험분자로만 취급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녀를 줄곧 통제할 수 없는 괴물로만 여겼다.
디아블로나 악마왕, 당초의 목적이었던 놈들이나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군림자보다 페일을 더 경계했다.
…그래선 안 됐다.
“…….”
페일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태도다. 그녀의 얼굴엔 어느 순간부터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꽉 문 입술은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틀어막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
“내가 도와줄게. 보다 바르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겠어.”
물론 루카스도 잘난 듯 떠들 만큼 삶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삶엔 정답이 없다. 오직 한 가지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삶이란 원래 고통이다.
그리고 페일의 경우는, 스스로의 고통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슬픈 일일 것이다.
“…그리고 열등감을 죽이고, 질투를 조절하고, 패배감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금도 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마음속에 한 줌의 악을 가지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선善으로 이뤄진 인간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이제는 루카스도 그걸 알고 있다.
“너 때문에 그걸 알게 됐어.”
“…….”
“폐기장에서 수많은 ‘나’를 먹었기 때문에 알 게 된 거라고.”
무슨 말을 하는지, 페일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한동안 이곳을 바라보던 페일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루카스는 손을 뻗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육체의 통제권은 아직 뇌존에게 있다. 루카스가 부분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건 언급했다시피 혓바닥과 입술 정도가 전부였다.
이제는 그것도 한계였다.
루카스는 잠시 되찾았던 통제권을 다시 뇌존에게 넘겼다.
그리고 뇌존과 청기사,
두 절대자의 싸움에서 시선을 떼며 미래를 보았다.
바라건대, 지금 이 대화가 결코 무의미하지 않기를.
조금이라도 무언가가 바뀌었기를.
절실히 바라며 직시했다.
별의 수보다 많은 미래들을 바라본다.
“──.”
루카스는 한번 눈을 깜박였다.
수억 가지보다 많았던 가능성들,
그 대부분의 미래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건 새까만 하늘 아래 펼쳐진 은하수가 급속도로 꺼져가는 광경과 흡사했다. 불빛으로 가득 찬 도시가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가능성’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뇌존에게는 비밀이지만, 루카스는 ‘페일과 화해하는 미래’를 못 찾았다.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뭔가 바뀌길 바랐다.
정말 싫은 단어지만 기적이란 게 일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만 봤을 때 루카스가 저지른 행동은 어리석은 게 맞았다.
대부분의 가능성이 사라진 시야 속,
새까만 미래들 가운데 오직 단 한 가지 가능성만이 색채를 잊지 않고 있었다.
“…….”
그 미래를 바라보며, 루카스는 조용히 체념했다.
더없이 처참하고, 비참한 꼴로 지면에 쓰러져 있는 시체의 모습,
그건 이미 확정된 미래였고, 바꿀 수 없는 미래였다.
이제 곧,
루카스 트로우맨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