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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362화 (583/857)

외전 362화

고동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목구멍이 탄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등골을 훑는 듯한 감각.

죽음의 감각.

마지막으로 느낀 게 언제였지?

[두 개였다.]

악마왕이 굵직한 두 개의 손가락을 펼쳤다. 양인현의 검을 잡았던 그 손가락, 살점은 물론이고 뼈까지 손상되었을 텐데 지금은 피딱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처음엔 단 두 개의 세계만이 존재했다. 거울처럼 서로를 비췄던 세계, 결코 떼놓을 수 없지만 서로 간섭할 수도 없었던 세계. 차이가 있다면… 하나의 세계에서만 가능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지. 구닥다리 같은 말이지만 ‘빛의 세계’라고 불러야 되겠군.]

양인현은 악마왕이 늘어놓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이라도 몸의 상태가 호전될 것을 기대해서, 나머지 하나는 놈이 지껄이는 얘기를 아예 무시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하나의 우주가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이란 얼마나 작은가? 너라면 알고 있겠지… 양인현. 고작해야 절대자 몇몇이 출현한 것만으로 삐걱대던 꼬락서니를.]

“…….”

[처음으로 그 상황을 깨달았던 ‘어떤 존재’는 대비책을 떠올려야만 했지. 하지만 많은 가능성을 물색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멸망의 기운이 우주를 갉아먹고 있었으니까……. 결국 그 존재는 완벽하지 않은 수단을 채택했다.]

“완벽하지 않은 수단?”

[복사다.]

악마왕의 입가가 비틀렸다.

[하나의 우주를 끝없이 복사한 것이다! 즉 삼천세계의 근원은 모두 같았다! 마법이 발전한 세계도, 검법이 발전한 세계도, 과학이 발전한 세계도! 애초에는 모두 ‘같은 우주’였다는 것이다……!]

“……!”

[하하하! 그야 아무도 깨닫지 못하겠지! 하지만 단 하나의 작은 사건만으로 우주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수도 있다! ‘코흘리개 꼬맹이가, 어느 비가 온 날에 외출을 하려다 말았다’, 그딴 시시한 일 하나로 우주의 소멸 여부가 결정되기도 한단 말이다! 하물며 복사된 이후 수만, 수억, 수조 년보다 아득한 시간이 흘렀다! 우주 간에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

“…그럼 지금 일어난 대융합은.”

[그래. 대융합 같은 게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 이제야 우주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우주를 복사했던 존재가 죽었으니까!]

“…….”

[애초에 나는 어떤 존재였던 것 같나? 0번째 악마란 이름이 무슨 뜻을 가졌으리라 생각하나?]

악마왕의 미소는 어느덧 차분해져 있었다.

[악惡이란 개념은 내게서 탄생했다. 모든 악마가 나의 자식이다. 바깥 세계에서, 스스로가 절대무적인 것처럼 굴었던 검은 가시의 마왕조차 내게서 파생된 존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양인현은,

무언가 아주 중요한 얘기를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것만 같은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아마도 지금 악마왕이 지껄인 내용을 알고 있는 건, 전 우주에 모든 존재를 합쳐도 열 명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진실을 알게 된 심정이 어떤가.

물론 놀라웠다. 당황스럽기도 했고.

하지만, 무언가.

‘이 얘기를 들어야 할 자는, 내가 아니어야 했다.’

─그런 생각이 희미하게 들었다.

양인현이 다시 악마왕을 보았다. 정신없는 얘기를 떠벌렸지만, 아직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걸 듣지 못했다.

“네놈의 목적은 뭐지?”

[나의 목적? 이미 이뤘다……. 단순히 ‘역할’만을 갖고 있던 내가 바깥으로 나왔다. 자아를 가지게 됐다. 그리고 나의, 스스로의 의지로 원하는 만큼 세상을 누볐다. 그러니 나는 지금 행복을 느낀다.]

이 말엔 양인현도 상황을 잊고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재밌는 농담인데.”

[…….]

양인현이 다시 검을 들었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몸뚱이가 아까보다 더 무거워진 것 같은데, 아마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대로라면 시간이 지나도 호전은커녕 악화되겠지.

[무엇이 재밌나?]

“스스로의 의지라? 그게 네 의지인 것 같나? 아니야. 네놈은 그저 지독할 만큼 역할극에 심취해 있는 것뿐이지. 텅텅 빈 머릿속에 잘 넣어둬라.”

그래도 양인현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상理想만큼은 훔쳐선 안 돼.”

[…….]

“네가 내게 지는 이유는 그걸 몰랐기 때문이다.”

[흠. 인상 깊지 않은 유언이로군.]

악마왕이 자세를 취하는 게 보였다. 양인현은 무거운 손을 억지로 들었다.

그럭저럭 자세는 취할 수 있었다.

“─후우우.”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오랜만에, 목숨을 걸고 싸워 볼까.

* * *

루카스는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공간도약을 쓰면 순식간에 목적지에 이르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공간값이 다시 한번 꼬이고 있다.’

일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루카스로선 파악할 수 없는 여러 문제가 겹쳐진 게 이유겠지만, 그중 확실한 것 중 하나가 페일의 폭주다.

4기사, 이 괴물 같은 놈들.

단순히 본신전력을 드러낸 것만으로 공간을 이 꼴로 만들다니.

‘내가 막을 수 있을까?’

루카스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페일과의 관계는… 몇 번의 삶을 반복하는 동안, 지금이 가장 호조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페일을 설득할 수 있는가는 별개다. 양인현의 경우와 같다. 틀을 벗어난 강함을 지닌 존재일수록,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이란 게 존재한다.

건드려선 안 되는 부분, 이른바 역린.

…나비.

페일이 마음을 허락했던 붉은 피부의 소녀는 사망했을 확률이 높다. 아니, 확실히 죽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죽음이 페일의 자아를 붕괴시켰다.

내가, 가서, 그녀를 설득해야 된다면.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되는 거지?

─생각이 뚝 끊겼다.

루카스는 뛰는 걸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에서의 뒷걸음질, 저질러선 안 될 행위였으나 별수 없었다.

콰가각!

지면에서 뼈로 이루어진 손바닥 수백 개가 튀어나왔다.

한데 뭉친 채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손바닥들은, 마치 하얀 구더기가 꿈틀대는 것처럼 혐오감을 일게 했다.

“─대체 뭐냐, 네놈은.”

루카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깃들었다.

그에 대답하듯 하늘에서 흑포로 몸을 감싼 어떤 존재가 떨어졌다.

루카스의 스산한 시선이 그쪽을 향한다.

“지금 상황에서 나를 방해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그것까지 상세히 알려 줘야 되는 거냐? 디아블로.”

[아니.]

디아블로는 짧게 대답하며 착지로 인해 굽혔던 허리를 폈다.

[청기사의 폭주가 마음에 걸리겠지. 우선은 괜찮다. 당신보다 훨씬 나은 전문가를 보냈으니까.]

루카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이리스 피스파인더에게 설명을 듣길 바랐다. 내가 직접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나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내 예상보다 훨씬 생각이 많은 것 같더군.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얘기할 수밖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정말로 궁금해져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흑기사를 페일에게 보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뻗은 손가락이 디아블로를 가리켰다.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는 데 1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나?”

디아블로는 완전한 무방비였다.

그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 몇 초간 디아블로를 관찰했다. 물론 몸을 지킬 수단을 몇 개 정도는 갖추고 있겠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에 젖은 종이보다도 얄팍한 방어기제들이겠지.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디아블로는 무방비하게 모습을 드러낸 거지?

루카스가 보이드를 깨우친 걸 몰라서?

마지막에 봤을 때 루카스가 약했으니까, 만에 하나의 상황이 되어도 자신의 몸뚱이를 지킬 수는 있다고 판단한 건가?

아니. 어설픈 생각이다.

디아블로는 루카스가 ‘허의 세계’에 갔다 온 걸 알고 있다.

[당신은 내 죽음이 될 자격이 있다.]

이윽고 들린 목소리엔 기꺼운 기색마저 묻어 있었다.

납득이 가지 않아 침묵한다.

…이대로 이 남자와 대화를 이어가는 게 옳은 일인가.

그냥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츠즛, 뻗은 손가락에 검붉은 에너지가 맺혔다.

불사자의 왕, 엘더리치, 언데드.

죽음을 거역하는 여러 이명을 가진 존재지만, 루카스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들어라.]

그때 뇌존이 말했다.

…평소와 어조가 다르다.

잠시 후 루카스는, 뇌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이 갈림길이다.]

‘뭐?’

뇌존의 목소리가 끊겼다.

루카스는 입술을 깨물며 디아블로를 바라봤다.

“직접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나와 너 사이에, 이 이상 무슨 대화가 필요하다는 거냐.”

[죽음에 관하여.]

콱 입술을 깨물고 싶은 발언이었다.

죽음, 죽음, 죽음.

디아블로는 그 단어에 집착하고 있었다. 얽매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녀석은 항상 그 말을 입에 담았다. 대륙에 죽음을 퍼뜨리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데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주제에, 일말의 숭고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숭고함이 느껴진다는 건 본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완전히 정의正義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루카스는, 디아블로가 비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릇된 정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 생각에 금이 갔다.

그렇다면 왜.

루시드는, 이리스는, 과거의 동료들은.

디아블로에게 동조하고 있는 거지?

[죽음과 소멸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뜬금없는 화두가 던져졌다.

루카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영혼도 사후세계도 없다는 가정하에서, 나의 관점은 이렇다. 소멸은 아무도 관측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무슨 소리를.”

[이 세상에 완전한 소멸이란 한 번도 없었다. 한 번이라도 존재했던 건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남게 된다. 즉 언제나 ‘다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루카스는, 어느새 뻗었던 손가락을 내린 채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필멸자의 죽음 이후엔 영혼이 남는다. 그리고 사후세계, 부활, 혹은 윤회와 같은 ‘다음’을 보장받았다. 힘을 다한 절대자에게도 알고 보니 ‘허의 세계’란 ‘다음’이 있었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루카스 트로우맨. 고향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가 당신을 잊었을 때에도, 몇몇의 절대자와 다른 우주의 존재들, 무엇보다 허공록이 당신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디아블로의 등 뒤에서 초록색 사기死氣가 뻗어져 나왔다.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기는 곧 허공에서 뭉치더니 형상을 이뤄냈다.

제법 커다란 항아리였다.

[사라지는 건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도 새로운 생명은 계속 태어나며 우주를 채워 나갔다.]

항아리 안으로 조르륵, 물의 형태를 한 사기가 흘러내렸다.

[채워졌다. 채워졌다. 느릿하지만 확실히, 계속 채워졌다. 세계는 쭉 채워져만 갔다. 이게 핵심이며, 세상의 진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창세創世 이후 단 한 번도 ‘빼기’가 없었다.]

꽉 찬 항아리.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는 장소.

[전부 채워진 공간에 무언가를 억지로 욱여넣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일반적으로는 넘치겠지. 바깥으로 삐져나가거나. 하지만 이 항아리엔 바깥이 없어. 마찬가지로, 삼천세계에도 바깥이 없다.]

그극, 극.

항아리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무한無限이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쨍그랑─

항아리가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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