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56화
10월 8일의 새벽이 밝았다.
결전 전날, 혹은 전전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루카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1층에 있는 호텔 라운지의 풍경이 보였다. 그래. 생각을 정리하다가 잠시 눈 좀 붙였었지. 제법 수면을 취한 것 같은데 아직도 머릿속은 먼지라도 낀 것처럼 불투명하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귀찮은 일도 없었고.
하지만 그날 이후로 양인현과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녀석의 기척조차 느끼기 힘들었다.
‘물론 양인현이 작정하고 기척을 숨기면 내 쪽에서 꼬리를 잡기 힘든 게 당연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피할 줄은 몰랐다.
억지로라도 쫓아 볼까? 가령, 여태껏 아껴둔 보이드를 쓴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관두자.’
이쪽이 깨닫지 못할 만큼 기척을 숨기는 건 양인현 입장에서도 상당한 피로가 소모될 터.
즉 그 남자는 그만한 손해는 감수하면서까지 루카스와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너와 만나기 싫다.
그런 식으로 말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억지로 만나려 들었다간 상황이 악화될 것이다.
루카스는 자신이 어느 정도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녀석의 해석대로 양인현을 부하로 여긴 건 아니다. 마음껏 부릴 생각은 더욱이 없었고.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양인현이 자신의 태도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간다.
얘기를 나누면서 깨달았다.
양인현에겐 개과改過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과거를 후회하거나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 애초에 후회를 했다면 그토록 강해지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자를 만들라는 제안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스스로가 잘못됐다는 인지는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양인현이 정말로 바라는 건 뭐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理想의 제자를 키운 이후에, 녀석은─
“…….”
루카스는 불현듯 든 생각에 멈칫했다.
설마 양인현은…….
“일어나셨습니까?”
상념을 중단한다.
흐리멍덩한 목소리와 함께 독고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 며칠간 이 도시에서 가장 바빴을 게 틀림없는 남자다. 퀭한 눈동자와 푸석한 피부, 떡진 머리카락. 특히 머리카락은 독고연이 애지중지하는 걸 몇 번 봐서 더욱 안타깝다.
“어제도 못 잤나?”
“하하. 눈은 붙였습니다.”
“어느 정도?”
“오기 전에 일각 정도…….”
15분이라.
진짜로 눈만 붙였군.
“넥스트 스테이지로 갈 수 있는 수단은 모두 구비했지 않나? 뭐 한다고 잠잘 시간도 못 챙기는 거지?”
“수상한 동향이 느껴져서요.”
“수상한 동향?”
루카스가 되묻자 독고연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시기상조라 아직 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말해 봐.”
“음. 이 도시에 머물고 있는, 소위 말하는 권력가들 있지 않습니까. 제가 몇 번 리스트도 보여 드렸던.”
“대은하연합의 간부들 말인가?”
“그들도 포함해서, 다른 지역에서 온 권력가들까지 말입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들이 왜?”
“최근 그들 대부분이 실종됐습니다.”
“실종?”
“예. 누구의 소행인지까지는… 죄송합니다.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독고연이 꼬리를 못 잡을 정도의 존재라.
루카스는 독고연이 여태껏 이 일을 보고하지 않은 이유가 보였다. 보고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확실성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봤을 때, 이 실종사건은 전체적으로 애매하다.
[총평회]나 [넥스트 스테이지] 혹은 [VIP]와 관계가 있는지, 독고연은 아마 그 점에서 확신을 내리지 못한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묘해.’
사건 자체는 깊은 연관이 없어 보여도 장소와 시기가 절묘하다.
그렇다면 연관 짓는 편이 좋다.
언뜻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단어들 간에, 어떠한 필연성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게 낫다.
“실종자 리스트 있나?”
“네.”
“이리 줘. 가면서 훑어보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다니, 어디를요?”
“레이크 호텔.”
슬슬 한번 시찰해 볼 때가 됐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넌 호텔에 대기해. 웬만하면 페일이랑 나비 옆에서.”
“…음. 그건 수행하기 힘든 명령입니다만.”
“왜?”
독고연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모르셨습니까? 페일 아가씨는 방에 안 계시던걸요.”
* * *
젠틀맨은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풀대는 청색 머리카락, 목표물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덩치만한 거대한 보따리를 안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무방비하고 불안정한 모습.
젠틀맨은 혀를 찼다. 그리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소리 없이 우아한 착지를 마친다. 눈치채게 만들어 괜한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기절시켜서 끌고 가면 되는─
“좀 비켜 주실래요?”
“……!”
젠틀맨이 움찔했다.
내 존재를 깨달았다고? 어떻게?
그녀의 시야는 스스로 안고 있는 짐보따리가 완전히 차단하고 있을 텐데?
젠틀맨은 일순 긴장했으나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목표물, 페일의 전신은 빈틈투성이다. 지금 당장 손을 뻗는 것만으로 목을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이목은 밝다는 건가.’
그만한 괴물들이 데리고 다니는 거라면, 그 정도 특징쯤은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젠틀맨이 속으로 납득하며 말했다.
“당신 일행에게 빚이 있어서 말이죠.”
“네?”
“순순히 따르신다면 위해는 가하지 않겠습니다.”
“…….”
* * *
만주리시의 최고층 건물인 레이크 호텔.
지상 77층에 높이 303.7미터.
가장 싼 객실도 하루 숙박비가 미화로 1만 달러를 넘어가며, 그 가격은 층수가 높아질수록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최상층인 로얄 스위트룸은 재계에서 이름 높은 거부들조차 장기간 투숙을 부담스러워할 정도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머무는 이들에게 금전이란 큰 문제가 되지 못한다. 애초에 숙박비는 명분에 불과할 뿐, 호텔의 주인 또한 금전욕이 전혀 없는 존재다.
또 하나의 비밀.
레이크 호텔에서 가장 귀한 손님에게 제공되는 공간은 최상층이 아니다.
호텔 건물을 기준으로 뻗은 지하 50미터의 공간. 실내 구조는 넓고 캄캄했다. 인테리어도 없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건 길쭉한 직사각형 테이블과 열댓 개 정도 되는 의자가 전부다.
유령들의 집회장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 그곳에 가장 유령 같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을 흑포로 감싼 자는 유령보단 사신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언뜻 드러난 흑포 속엔 살점 하나 없이 앙상한 백골만이 보였다.
디아블로는 거리낌 없이, 테이블의 가장 끝단에 앉았다. 귀화처럼 일렁이는 안광은 이윽고 맞은편에 앉은 존재에게 향한다.
[직접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악마왕.]
스륵, 바닥에서 검은색 액체가 치솟았다. 마치 까만 분수대처럼 꿀렁꿀렁 솟아오르던 액체가 곧 악마의 형상을 이뤘다.
혼자가 아니다.
디아블로는 악마왕의 뒤에 있는 자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들인가? 소문 자자한 오공작이란 존재가.]
[정보가 많이 늦군.]
악마왕의 목소리가 지하공간을 무겁게 잠식했다.
[작위 시스템은 폐지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지금은 이들이 나의 새로운 수족이다.]
디아블로는 그들을 하나씩 집중해서 주시했다.
총 다섯 명이었고, 모두가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디아블로 단독으로선 저들 중 한 명과 싸워도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압도되진 않는다. 왕에게 필요한 건 무력이 아니다.
디아블로는 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뼈밖에 없는 손가락으로 깍지를 끼웠다.
[수족이라 함은 팔다리라는 건데, 넌 팔도 두 개고 다리도 두 개지. 저들 중 넷이 팔다리라면, 나머지 한 명은 무엇인가?]
[혓바닥.]
[…….]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나를 부른 건 아닐 텐데, 디아블로.]
악마왕이 따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VIP. 제법 재미있는 집단이긴 하다. 구성원들도 흥미롭고 창립자는 자는 더욱 그렇지.]
[흥미로워? 그 정도가 아닐 텐데. 이 단체의 몇몇 인물은 당신조차 쉽게 여길 만한 존재가 아니다.]
[글쎄…….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벌이는 일이 시시하다는 사실까지는 변하지 않지.]
디아블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담이 크군. 분명 듣고 있을 텐데.]
[들으라지. 총평회라는 것도 그렇다. 구성원들이 알고 있는 모든 강자들의 데이터를 취합, 해석한 다음 100명의 후보를 뽑고 일일이 서열을 매긴다……. 최종 목적을 위해선 필요불가결한 과정이라는데, 나로선 그런 귀찮은 방법을 선택한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음식입니다.”
때마침 턱시도를 입은 남자 한 명이 음식을 내왔다. 악마왕은 그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는 시야가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있지 않나.]
우드득, 악마왕의 오른손은 마치 호두알처럼 남자의 머리를 부쉈다. 두개골, 뇌수 섞인 핏물이 토마토 즙처럼 흘러내렸다.
[싸우면 된다. 일대일이든, 다대일이든, 다대다든 상관없다. 치열한 싸움이 끝나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두 발로 서 있는 놈이 가장 강한 자고, 모든 걸 취할 권리 또한 갖게 된다. 심플하지 않나?]
[루카스 트로우맨을 보았다.]
[…….]
악마왕이 침묵했다.
그러나 그의 수족들의 몸에선 검붉은 기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넌 그 남자와의 재전을 원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무엇을?]
[루카스에게 접근하지 마라.]
그 말에 악마왕이 실소를 터뜨렸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군. 너는 물론, 너의 수족들도 루카스 근처에 얼쩡대지 마라. 몰래 엿보거나 그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것도 자제해 줬음 하는군.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 시간부로 일절 루카스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다.]
[디아블로.]
악마왕이 여전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죽고 싶은 건가?]
[너는 내 죽음이 될 수 없다.]
[시시한 표현은 집어치워라.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건지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아니면 여기서 나와 싸우고 싶어서 나를 부른 거냐?]
악마왕은 홀로 중얼거리더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편이 더 일리가 있겠군. 날 자극할 생각이었다면 계획은 성공적이야.]
[너와 힘 뺄 생각은 없지만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겨뤄 볼 텐가? 너의 수족과 나의 검. 어느 쪽이 더 단단한지.]
[…….]
그 말에 악마왕의 시선이 디아블로의 뒤편을 향했다.
그곳엔 전신을 흑갑으로 감싼 한 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고요하고 절제된 흑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다.
악마왕은 알고 있다.
저 흑기사가 누구인지, 그리고 투구 안에 있는 얼굴까지도.
[재밌는 꼴이 되었군, 루시드.]
[…….]
[이런 식으로 재회하니 퍽 감회가 깊어. 투구를 쓰는 건 별로 선호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간 변한 건가?]
[그 목소리로 내게 말 걸지 마시오.]
루시드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왕은 다시금 비죽 웃었다.
[날 카사진으로 여기지 않는 건가? 그것도 좋지. 하지만 그러는 네놈은 어떤가. 넌 지금 어떤 존재인가? 내가 알던 검호제 루시드라면 저지르지 않을 일을 숱하게 벌였지 않나.]
악마왕의 웃음이 짙어졌다.
[모든 존재는 변한다. 골렘의 몸뚱이에 갇힌 슈하이저도, 전생轉生을 반복하며 육신을 바꾸는 이리스도, 그리고 루카스 트로우맨까지. 삶이 길면 변화도 잦아지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던 걸 왜 인정하지 못하는가.]
만약 혓바닥이 있었다면, 이 순간 디아블로는 틀림없이 혀를 찼을 것이다. 지금 악마왕이 꺼낸 발언은 루시드의 역린을 정면에서 찌르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악마왕과 충돌할 생각은 정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두 존재의 싸움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 나타남으로 중단되었다.
저벅─
금발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왕과 디아블로, 그리고 루시드까지. 이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가 ‘어떤 이름’을 대며 활동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주시했으니까.
하지만 직접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디아블로는 당황했다.
왜 이자가 ‘루카스 트로우맨’을 자처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