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350화 (571/857)

외전 350화

장掌과 권拳이 충돌했다.

꽈르릉!

천둥소리 같은 폭발음과 함께 사방에 먼지폭풍이 휘몰아쳤다.

광산에서 탈출한 이들은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음에도 그 영향을 받았다. 대지의 흔들림과 금방이라도 몸뚱이가 날아갈 듯한 거센 바람을 느낀 것이다.

독고연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그러나 상처는 없었다.

“흥.”

오히려 보란 듯이 비웃음까지 짓는다.

방금 교전에서 분명히 이득을 보았다. 청년의 육체는 비록 독고연처럼 밀려나지는 않았지만, 오른팔이 보기에도 처참할 만큼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물론 일방적인 이득은 아니다.

오른쪽 이마가 깨졌는지 피가 철철 흘렀는데,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으나 출혈이 쉽게 멈출 것 같지는 않다.

독고연은 핏물이 눈동자를 물들임에도 눈꺼풀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몸 상태를 분석한다.

왼쪽 무릎엔 금이 갔고 복부와 가슴엔 타박상, 오른쪽 어깨는 골절에 왼쪽 손바닥은 찢어졌다.

치명상은 없지만… 귀찮아질 것 같으니 이쯤에서 사용할까.

흑운무黑雲霧, 모장포母掌包.

쿠와아─

독고연의 몸에서 여태까지와 비교할 수도 없는 흑기가 방출되었다.

청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세를 유지한 채 잠시간의 관찰, 그러다 뒤늦게 깨달았다.

놈의 목적은 공격이 아니다.

탓!

그제야 지면을 박찬 채 독고연과의 거리를 좁혔으나 한발 늦었다.

“느려 터졌다!”

어둠 속에서 독고연이 크게 웃었다. 그가 오른팔을 내뻗자, 여태껏 몸을 감싸고 있던 흑기가 탁류처럼 휘몰아치며 청년의 몸뚱이를 밀어냈다.

청년은 내기를 방출시키며 버티려고 했으나, 곧 그 물살에 휩쓸려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독고연은 그 꼴을 좌시하지 않고 그대로 추격에 나섰다. 날아가는 청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간 다음 새하얀 양손을 좌악 펼쳤다.

꽈과광!

번골십사장煩骨十四掌의 초식이 순서대로 전개되며 청년을 압박했다.

됐다. 흐름을 갖고 왔다.

독고연은 춤을 추듯 공세를 이어가며 이죽거렸다.

“무슨 일 있는가? 움직임이 많이 굼떠졌는데!”

청년은 수세에 몰리면서도 급소는 허용하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마공은 마공이군. 전신의 상처가 순식간에 치유되다니.”

“하하. 부럽다면 솔직히 말하도록 해라.”

“부러울 리가. 넌 그만한 수단을 갖췄는데도 처음부터 쓰지 않았다. 단순해. 아마 내력 소모가 상당한 비기일 터.”

청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그리 말했다.

“글쎄. 어떨까?”

독고연은 여전히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으나 내심으로는 놀랐다.

청년의 추측은 정확했다.

모장포는 웬만한 상처쯤은 순식간에 치유하는 게 가능했지만, 내력이 극심히 소모되는 단점이 있다.

‘피도 너무 많이 흘렸고.’

치유력을 한계까지 높여 외상 및 내상을 치료할 수는 있지만, 이미 흘린 피마저 보충할 수는 없다.

물론 이 사실을 상대가 눈치채도 독고연의 우위가 흔들리진 않는다.

휘청거리던 청년이 오른다리로 크게 바닥을 내려찍었다. 쩌저적! 바닥에 거미줄처럼 금이 가며 돌조각이 튀었다. 그사이 청년의 주먹에 막대한 힘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녀석.

시간이 끌면 점점 불리해진다는 걸 깨닫고 다음 일격에 끝장을 보려는 수작이다.

‘좋다. 받아 주마.’

정면승부에서 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고연 또한 자신의 진기를 한계를 한계까지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흑운무 오의, 흑령주黑靈駐가 전개됨에 따라 독고연의 양팔이 먹이라도 칠한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꽈드득, 청년의 주먹에 맺힌 웅혼한 내력도 서둘러 방출해 달라는 듯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 충돌이 끝나면, 둘 중 하나는 필시 죽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자신이 시체가 될 거라곤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승부의 행방은 영영 알 수 없게 됐다.

그들의 힘이 충돌하기 직전에 부드러운 바람 한 점이 불었다.

적어도 독고연과 청년은 그렇게 느꼈다.

어느 순간 양인현은 도포를 흩날리며 힘의 충돌할 지점에 표연히 서 있었다.

“……!”

무슨 짓을!?

독고연의 표정에 당혹이 스쳤다. 아무리 양인현이라고 해도 이 충돌의 중심에 선 채 사지 멀쩡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힘을 거두거나 억지로 방향을 틀면, 그 반동은 독고연의 몸뚱이로 돌아올 것이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게 보였다.

스릉

그사이 양인현은 검을 뽑고 서서히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휘둘렀다.

그에 따라 칼끝에 독고연이 방출한 흑운黑雲의 정수精髓가 걸렸다.

“……!”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부순 것도 흘린 것도 아니다.

마치 바늘 끝에 실이라도 단 것처럼, 양인현은 독고연의 필살기를 뜻대로 조종했다. 그에 따라 칼끝에 맺힌 흑운의 기세가 서서히 중화되기 시작한다.

검은 이윽고 반대 방향까지 이르렀다. 즉, 청년의 주먹이 쇄도하는 곳 말이다.

꽈앙!

천둥소리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그러나 청년의 몸뚱이는 수십 리를 날아가는 대신, 주춤거리며 몇 발자국 물러서는 선에서 그쳤다.

“…….”

청년의 표정도 처음으로 굳었다. 독고연은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공격을 흘리거나, 정면에서 박살 냈다면 저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양인현이 보여준 기술은 그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었다.

이정제동以靜制動의 묘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예, 동시에 상대의 자신의 사이에 아득한 수준 차이가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귀하는 누구십니까?”

청년의 말투에 예의가 깃들었다.

방금 이 남자는 훨씬 쉽게 싸움을 멈출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뺏기 위해 필살의 수를 꺼낸 순간 발생한 빈틈은 치명적이었다. 그가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그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오해요?”

“그래. 우린 이 광산에서 일어나는 악행과는 무관계하네.”

“…….”

청년의 눈살이 좁혀졌다.

“자네는 아마 광산 주위를 맴도는 흑무黑霧와 독고연이 사용하는 흑운무黑雲霧가 동일한 성질을 가졌다고 오해하는 듯하지만 그건 틀렸어. 두 힘은 전혀 다른 것일세.”

“…….”

“방금 교전으로 독고연의 흑운무는 충분히 겪었을 터, 이 주위를 뒤덮은 흑무를 분석하면 자네도 이해가 되겠지.”

청년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 말대로 했다. 독고연은 눈을 감은 채 집중하는 녀석의 몸뚱이에 초식을 때려 박고 싶었지만, 양인현의 눈치가 보여서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청년의 수려한 얼굴엔 당혹감이 일렁였다.

“…이럴 수가.”

“파악이 되었는가.”

“죄송합니다. 제가 큰 결례를…….”

그리 말하고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독고연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이봐, 사과할 상대를 잘못 고르지 않았나? 네놈의 기습에 피해를 입은 건 나다.”

그러나 독고연을 바라본 얼굴엔 다시 한번 싸늘한 기색이 되살아난다.

“자업자득이지.”

“뭐?”

“마공을 익히기로 결심했을 때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상 못 한 건가?”

청년이 귀찮다는 듯 말하자 독고연이 이를 갈았다.

“이런 싸가지를 봤나.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거냐?”

“모른다. 관심도 없고.”

“이 애송이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그만.”

양인현은 짧은 목소리로 중재한 뒤 청년을 보았다.

“…그보다 진정된 듯하니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입니까?”

“누구한테 무공을 배웠는가?”

* * *

“그…….”

이리스의 목소리가 살짝 엇나갔다. 표정에도 당혹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나타난 것보다 더 빠르게 감정을 수습하더니, 특유의 냉정한 모습으로 페일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루카스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리스와 페일, 두 사람을 한눈에 담고 있는 광경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전혀 다른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페이지를 뚫고 나와 만난 듯한.

‘닮았다.’

묘하게 닮았다.

물론 생김새도, 분위기도, 체격도 다르다.

그렇다면? 루카스는 그녀들의 어떤 점을 보고 공통점을 느끼고 있나.

루카스는 이리스를 보았다. 페일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기가 번지기 시작한다.

그 순간 루카스는 이리스를 보면서 줄곧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됐다.

“기근의 청기사,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응? 날 아는군요.”

“워낙 유명인이니까요.”

“이상하네. 이딴 도서관에 나에 대해 적혀 있을 리는 없는데.”

페일은 반쯤 흘리듯 내뱉었지만, 루카스는 그 말로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카식 레코드, 즉 허공록엔 ‘허의 세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곳에 기록된 우주 만물에 대한 기록. 그러나 ‘허의 세계’는 그 ‘우주 만물’에 해당되지 않는다.

오직 버림받은 가능성이 흘러오는 쓰레기장. 그것이야말로 허의 세계의 정체성이다.

“저도 그쪽에 대해선 알아요. 검은 마녀!”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어요. 음, 루카스가 옛날에, 제법 신세를 진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푸흡. 페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았으나, 그게 비웃음이란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다 잊어버린 것 같지만요. 아, 가여워라.”

“…….”

분위기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다.

이건 분명 루카스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당신은 맹세에 대해 잊었어요. 그거 알아요? 약속을 어기는 것보다 망각하는 게 훨씬 어렵고 잔인한 일이라는 거! 그런데 당신네는 한 명도 빠짐없이, 루카스를 배신했어요.”

“…그건 신이 만든.”

“법칙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요? 아. 물론 그렇죠.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당신 스스로가 그런 핑계를 납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음. 괜한 말을 했네. 어차피 모두 잊어서 별 감흥도 없을 텐데. 내 말은 한 귀로 흘려들어요!”

페일이 빙긋 웃으며 말을 마쳤다.

이리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청기사 페일, 당신이 신의 법칙에 대한 말을 꺼낼 줄은 몰랐는데요.”

“음?”

“당신이야말로 신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글쎄요. 여기서 말해도 될까요? 기근의 청기사가 되기 전, 페일이란 소녀의 삶에 대해서. ─잊으셨나 본데.”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목련처럼, 이리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이 허의 세계에 흘러 들어가기 전까지의 기록은, 여기 다 있답니다?”

뚝.

페일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상하네.”

그리고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바깥사람들은 목숨이 몇 개씩 여벌로 있는 건가요?”

그리고 손을 뻗었다.

검을 부르기 위한 그녀 특유의 자세, 콰가각! 지면을 가르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만……!”

뒤늦게 루카스가 제지하려 들었으나, 페일은 디아블로 때와는 달리 멈출 생각이 없었다. 순식간에 검을 낚아챈 페일이 이리스를 향해 쇄도했다.

“큭!”

위험하다.

이리스로선 페일의 일격조차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루카스가 급히 보이드를 끌어 올리려는 순간이다.

“이봐요, 청기사. 난 당신도, 당신의 무장한 차림새도 처음 보지만요.”

이리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검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던가요?”

“……?”

페일의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쥐고 있는 검이 특유의 창백한 색이 아닌, 우스꽝스러운 무지개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을.

“어?”

“그거 당신이 소환한 거 아니에요. 내가 구체화시킨 거지.”

그리고 칼끝이 젤리처럼 뭉클대더니 페일의 전신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페일은 뒤늦게라도 검을 놓으려 했으나, 이미 칼자루까지 뭉클뭉클한 형체로 변해 있어 쉽게 떼어낼 수 없었다.

페일의 몸이 들러붙는 점액에 일순 휩쓸리는가 싶던 찰나다. 파앙! 응축된 공기가 터뜨려지는 소리와 함께 점액이 튕겨 나갔다.

이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곳에선 청기사가 될 수는 없을걸요.”

“…아하. 그런 것 같네요.”

페일이 쭉 찢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뭐, 당신을 먹는 데 검까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그 말이 맞다.

청기사가 되지 않더라도, 페일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강자다. 아마 극소시간대에 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리스는 여전히 여유로운 기색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난 당신을 못 이겨요.”

“잘 알잖아요.”

“그래도 여기라면 영원히 도망치는 건 가능해요. 당신을 계속 귀찮게 만들면서요.”

“…….”

“여기서 나랑 영원히 술래잡기라도 하시겠어요?”

두 여자는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건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녀들 사이에 쩍쩍 갈라지고 있는 균열이 보이는 것 같았다.

“…흠.”

먼저 고개를 돌린 건 페일이었다. 그녀는 흥이 식은 목소리로 말하며,

“그만 가요.”

루카스의 팔뚝을 잡았다.

왠지 모르게 뿌리칠 수 없었다. 루카스는 페일에게 이끌리며,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이리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재차 깨달았다.

이리스는 항상 본심을 미소로 숨기는 여자였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혹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때도.

그녀는 항상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이 이리스 피스파인더란 여자의 처세법이다.

…즉, 그러니까.

만약 이리스가 정말로 루카스에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녀는 웃었어야 했다.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

떠나기 직전까지, 이리스는 무표정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