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49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목구멍에선 무언가 걸려 있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루카스는 문득, 지금 이 순간 입을 열면 자신이 어떤 말을 내뱉을지가 궁금해졌다.
감상에 잠겨 있는 사이 이리스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한 번 깜박인 뒤 말했다.
“일단 앉으시겠어요?”
어디에?
그리 내뱉기도 전에, 하늘에서 탁자와 의자 한 쌍이 떨어졌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로 된 가구들이 박살 나기에 충분한 높이였던 건 분명하다.
그런데도 가구들은 놀라울 정도로 우아하게 착지를 마쳤다. 소음조차 나지 않았고, 덜컹대는 기색도 없었다. 마치 접착제가 가득 발린 벽면에 붙은 것 같은 꼴이다.
탁자는 식탁이었다.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메뉴들은 아니었다.
갓 구운 빵과 스프, 베이컨, 그리고 우유 한 잔이 전부다.
이리스가 먼저 앉았다. 그런 다음, 방금 입에 담은 말을 이번엔 시선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마주 앉는다.
물론 그게 전부다.
이 자리에서, 더군다나 이리스 앞에서 태평스럽게 식사를 들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끄러미 루카스를 바라보던 이리스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이번엔 하늘에서 커피가 한 잔 떨어졌다.
“…….”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잔을 내려다본다.
커피.
루카스가 선호하는 음료.
그러나 물론, 이 사실을 이리스는 모른다. ……몰랐어야 했다.
알지 못해야만 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안 것인가. 뻔하지. 허공록에서 읽은 것이다.
“…….”
추억에서 색채만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방금 그녀가 했던 말이 이제야 확실히 실감 났다. 루카스와 겪었던 일들 전부를 ‘기억’이 아닌 ‘정보’로 알게 됐다는 것. 그로 인해 느껴야 할 괴리감은, 앞으로 무수한 추억을 쌓아도 채워지지 않겠지.
알고 있다.
커피를 대접한 건 분명 그녀 나름대로 루카스를 배려한 것이란 걸. 하지만 지금은 그 배려가 독으로 다가온다.
고작해야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루카스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 천 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는 듯했다.
그런 느낌을 지우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예상 외로 효과는 있었다. 방금까지 느껴졌던 가슴의 욱신거림이 조금은 희미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루카스는 이 건에 대해 크게 흔들려선 안 됐다.
이미 인연因緣에 관한 해답을 내놓았다. 물론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단순히 결론을 낸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스스로 궁리하여 내놓은 것이니만큼 납득할 수 있다. 납득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동요해 버린 이유는, 단순히 루카스가 이러한 전개를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리스는 ‘루카스’에 대해 알게 됐다. 그런데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두 가지 사실이 맞물려 루카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됐어.’
다시 한번 커피를 마신다.
그윽하게 가라앉은 향이 혀끝을 타고 식도로 넘어간 순간, 가슴의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극명한 변화였다.
루카스는 차분한 눈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뭘 한 거지?”
“네?”
“이 가구들, 단순히 소환한 걸로 보이지는 않는데.”
“…과연. 냉철하고 상황판단이 빠르시군요. 책에서 본 대로예요.”
“…….”
“당신은 ‘이리스 피스파인더’란 존재에게 상당히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었을 터. 하지만 지금 제 얼굴을 직시하는 눈동자엔 이미 동요의 빛이 사라졌군요.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정을 정리했다는 거겠죠.”
“…….”
“이야기가 샜네요. 제 힘에 대한 질문을 했던가요?”
이리스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스윽 훑었다.
“맞아요. 이건 소환 같은 게 아니에요. 이동시킨 것도 아니고.”
“창조한 건가?”
루카스는 가장 비현실적이지만, 확률은 높은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창조는 결코 필멸자에게 허락된 권능은 아니지만 이리스는 예외다. 어찌 됐든 그녀는 과거 로드가 권능을 나눠줬던 어포슬이 아니었나. 루카스의 탈출을 돕기 위해 최소 수천 년은 그 힘을 단련했고, 로드의 사후에도 공간에 대한 권능을 상실하지 않았다.
물론 창조, 유에서 무를 만드는 단계는 전성기의 로드조차 이룩하지 못한 경지다. 단순히 그에게 힘을 나눠 받은 이리스가 닿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조금 달라요.”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냥 이곳에 있는 기록을 복사한 것에 불과하니까. 구체화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려나.”
“구체화?”
“지금 이곳에 소환된 식탁은 ‘두마르 체이스터’란 남자가 마흔일곱 살 칠월 여드렛날에 먹었던 아침 식사예요. 아, 두마르란 남자는 딱히 제 지인은 아니랍니다.”
루카스가 멈칫했다.
“…허공록에 적힌 걸 구체화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단 건가?”
“지극히 한정적이지만요.”
이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그리 담담하게 말할 내용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일, 지극히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리스는… 허공록에 접속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런 게…….’
필멸자의 그릇으론 이 허공록,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를 극히 일부라도 담아낼 수 없다.
너무나도 당연하다.
지금 이리스가 보인 묘기는 초월적인 경지의 초입初入에 불과하다. 만약 그녀가 이 힘을 뜻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녀는 전 우주의 만물을 원하는 순간에 꺼낼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신에 가까운, 아니. 신의 것이라 해도 무방한 권능을 손에 넣는 것이다.
“안 먹어요?”
이리스가 다시 말했다.
“입맛이 없어.”
원래도 없었지만 방금의 대화로 더욱 뚝 떨어졌다.
“그래도 먹는 편이 좋지 않아요? 제법 허기진 상태인 것 같은데.”
“…….”
정확한 분석이다.
광산에 들어오고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그동안 먹은 거라곤 페일을 위로하기 위해 먹었던 살점 한 조각이 전부였다. 실제로 조금만 집중력을 죽이면, 위장이 공복을 호소하는 게 느껴졌다.
루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식기를 들었다. 커피를 마신 직후라 입맛이 없었으나, 수프를 몇 번 떠먹으니 식욕이 돌아왔다.
단출한 식사는 금방 끝났다.
그동안 이리스는 루카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표지를 보니, 여전히 그건 루카스에 대한 것이 기록된 서적이었다.
문득, 루카스도 저 서적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말인데요.”
이리스가 여전히 책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대부분이 디아블로의 의견에 동조하게 됐어요.”
“…뭐?”
“그가 내세운 사상을 이해하게 됐거든요.”
루카스는 침묵했다.
“삼천세계에 죽음을 퍼뜨리자는 미친 주장 말인가?”
“네.”
잠시 침묵하며, 디아블로의 주장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해가 되지 않아.”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단 걸 느낀다.
“그건 궤변조차도 못 된다. 내가 알던 너희들이라면 수긍할 리가 없어.”
그래. 단체로 미치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은 그럴 텐데.
그러나 이리스는 오히려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가 아, 하고 무언가 납득한 듯 끄덕였다.
“디아블로에게 모든 얘기를 들은 게 아닌가 보군요?”
“나머지 얘기는 너한테 들으라더군.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고.”
“…저한테, 라.”
이리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그녀가 무언가 생각에 잠겼을 때 드러나는 습관이다.
“여긴 정말 대부분의 것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리고 루카스를 바라보며 말한다.
“모든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것이.”
했던 말을 강조해서 반복한다. 그리고 루카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마치 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루카스로선 보여 줄 반응이 없었다.
이리스는… 그러길 원한다면 자신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여자였다. 원래도 만만치 않았지만, 지금은 특유의 눈빛이 몇 배는 더 깊어져 있었다. 그 속내를 억지로라도 엿보기 위해선 그녀에게 동요나 혼란을 안겨 줘야만 했는데, 지금의 루카스에겐 그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루카스는 이리스가 이런 말을 꺼내는 저의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여기 엄청나게 거대해 보이죠? 보이는 대로에요. ‘대융합’으로 초대형 우주가 된 작금의 세계보다 훨씬 더 거대한 도서관이 바로 이곳입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고른다. 기세를 가다듬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루카스는,
이제부터 입에 담을 말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느꼈다.
“그런데 거대할 뿐이지, 무한無限한 건 아니에요. …그게 바로 세상의 진리였어요.”
이리스의 눈동자가 일순 새카맣게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영원한 건 없었어요.”
…무언가.
이런 느낌을 전에도 한번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였지?
그건 분명 루카스가 아닌, 프레이로 활동했을 시절에.
꼭 지금과 닮은 이리스의 눈빛을 보았던 듯한─
“─그럼 이제 그만 가도 좋아요.”
“뭐?”
“아니면, 혹시 제게 다른 할 말이라도?”
이리스가 고개를 살짝 기우뚱하며 되묻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물론 루카스 쪽에서 이리스에게 볼일은 없었다. 왜냐면, 루카스는 이 자리에서 그녀와 만날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디아블로는 확신을 가진 채 날 여기 보냈어. 내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고.”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게 안 됐다.”
루카스가 복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여전히 디아블로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어. 놈을 여전히 위험인자로 여기고 있고, 조우하게 되면 죽여야겠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지.”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해줄 말은 이게 전부인걸요.”
“이리스, 너 뭘 숨기고 있는─”
그 순간이다.
루카스의 옆에 있는 공간이 죽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누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페일이었다.
“너……?”
당황한 루카스를 본 체도 하지 않은 채, 페일은 빼꼼 내민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더니 특유의 방긋 웃는 미소와 함께 전신을 드러냈다.
“하도 안 와서 데리러 왔어요!”
“어떻게 온 거야?”
“입구가 안 사라지고 계속 열려 있던데요? 아. 해골바가지는 도망쳤어요. 음침한 녀석. 난 그 녀석이 싫어요.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려야지.”
대수롭지 않게 말한 다음 팔짱을 낀다.
그리고 건물처럼 높이 솟은 책장을 올려다보더니,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흐음. 과연. 여기가…….”
“…….”
“루카스는요? 볼일 다 봤어요?”
그때였다.
주변을 바라보던 페일의 시선이 뒤늦게 이리스와 마주쳤다.
아주 잠시, 두 명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미소를 지은 건 페일이었다. 특유의 만개한 듯한 미소를 만들더니, 갑자기 루카스의 팔을 덥석 잡으며 이끌었다.
“볼일 다 끝났으면 이제 가요. ‘위’가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더라고요.”
“잠깐만. 아직…….”
“빨리요.”
갑자기 서두르는 페일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쯤 잡혀 이끌리던 루카스가 무의식적으로 이리스를 돌아봤고,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여태껏 무표정하기만 했던 이리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파문이 번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