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41화
“넥스트 스테이지로 가는 방법은 총 세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는 거지요.”
독고연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하자 페일이 감탄했다.
“우와. 진짜 긴 철도네요.”
루카스의 시선도 마찬가지로 지도로 향했다.
“아직 철도가 있다는 게 놀라운데.”
“재건했다고 합니다. 물론 완벽하게 수복한 건 아니라 한 번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사실 저렴하고 비교적 안전하단 것 이외엔 장점이 없지요.”
그러나 루카스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굳이 재건할 이유가 있나? 이 세계엔 고위 마법사들이 수없이 있을 터. 그들이 설계한 워프 시스템을 사용하는 게 훨씬 효율적일 텐데.”
그러자 독고연이 고개를 기우뚱했다.
“그 마법사란 자들이 공간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수단을 갖춘 건 알고 있지만, 지금 세계는 무슨 값이 꼬여 있어서 장거리 이동이 불가능하다더군요. 게다가 단거리 이동도 무척 까다로운 공정이 뒤따르는 것 같은지라…….”
그렇군. 납득이 간다.
루카스조차 공간값이 이토록 복잡하게 꼬인 세계를 접한 적이 없을 정도다. 웬만큼 실력에 자신 있는 마법사들도, 이 세계에서 워프를 사용할 용기를 내진 못할 것이다.
눈가가 절로 좁아진다.
‘뇌존.’
[뭐지?]
‘혹시 이곳만이 아닌, 다른 우주도 대융합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거냐?’
[그렇다.]
뇌존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줬다. 루카스는 혀를 차고 말았다. …삼천세계 전부가 이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다.
신이 죽어서 이런 사태가 번진 것인가, 이런 사태가 번졌기에 신이 죽은 것인가?
그렇다면 이 사태를 의도한 건 허의 세계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직까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군림자들인가.
혹은.
군림자도, 허의 세계의 존재들도 아닌.
전혀 또 다른 누군가가…….
‘과한 생각이다.’
루카스는 자신의 의혹을 망상으로 일축했다.
군림자, 4기사, 그리고 십이허주보다 더 강한 존재가, 여태껏 모습도 그 낌새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러기엔 루카스는 인지를 벗어난 일을 너무나도 많이 겪었으니까.
‘아무튼, 지금 우주 간의 경계선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어느 정도냐면, 일반적인 고위 마법사도 함부로 공간에 간섭했다간 다른 우주로 빨려 들어갈 가능성이 있을 정도다.
─즉 절대자가 아닌 존재도 우주 간 이동이 가능해졌다. 이 또한 신의 부재로 인해 생긴 영향일 확률이 높다. 허의 세계와 삼천세계, 여태껏 전혀 다른 선상에 놓여 있던 두 세계의 경계선이 허물어진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막 말씀드리려 했던 두 번째 방법이 바로 그 워프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루아노블에도 워프 시스템이 존재하니 그걸 이용해 조금씩 거듭 이동하는 건데… 이것도 그리 괜찮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죠. 그러니 제가 추천드리는 건 세 번째 방안입니다.”
“세 번째?”
“예. 개인기를 이용하는 겁니다.”
“개인기?”
페일이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개인기라면…….
“비행기를 쓰자고?”
“평범한 비행기로는 안 됩니다. 소리가 크고 이목도 많이 끌리는 데다 전투 수단도 없으니, 하늘에서 적과 조우했을 때 대응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안전지역을 벗어난 하늘은 갖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독고연이 말을 이었다.
“마교가 소유한 개인 전투기가 있습니다. 천마가 대은하연합의 원수元帥에게서 받은 친선 선물인데, 제법 쓸 만한 기능이 여럿 갖춰져 있습니다. 그걸 타면 되겠죠.”
“난 조종하는 방법을 몰라.”
당연히 함께 가야 할 양인현이나 페일도 그럴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동조종 기능이 탑재되어 있습니다만, 비상시엔 제가 운용하겠습니다.”
“전투기를 조종할 수 있는 건가?”
그러자 독고연이 쓰게 웃었다.
“아뇨. 기초도 안 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비상시에나 조종기를 잡겠죠.”
“…….”
“언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지금 당장. 빠를수록 좋아.”
“알겠습니다. 기기를 점검하고 간단한 인수인계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30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지.”
“감사합니다. 옥상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떠나기 직전, 독고연이 말했다.
“전 딱히 살육을 즐기지 않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이미 뒤를 돌아본 채였기 때문에 독고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루카스는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 저의를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지만.
“알아.”
우선은 그리 대답했다.
“예?”
“그저 재능이 비범해서 천마란 놈이 널 잡아 온 거 아닌가? 아주 어렸을 때 말이야. 그런 다음 억지로 자신의 대역을 시켰겠지. 무공도 전수하면서.”
“…어떻게 그걸.”
“애초부터 정신머리가 썩은 놈이었다면, 양인현이 널 죽이려들 때 막지 않았을 거다.”
“…….”
“지금부터라도 마음 가는 대로 살아 봐. 남한테 피해는 주지 않는 선에서.”
“너무 늦었습니다. 벌써 반백년을 살았는데…….”
“그래? 아직 젊군.”
루카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엇나간다면 조언 정도는 해주지. 옆에 있는 동안은 말이야.”
독고연은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자신의 삶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기구한 인생이었다. 만에 하나 천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놈의 강요가 있어서든 없어서든 독고연 또한 천마를 흉내 내며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
독고연은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청색 머리카락의 여자와 사담을 나누는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에게 있어 언제나 최우선적인 사항은 스스로의 보신이었다. 그저 오래 살고 싶다는 게 독고연의 유일무이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천마의 압도적인 위용에도 압도되고, 공포는 느꼈으나 그 이상의 감정은 가지지 않았다. 가령 천마의 죽음에도 털끝만큼의 슬픔도 들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독고연은 여전히 강자 앞에서 빌빌 기는 신세다. 루카스의 명령에 잠자코 따라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러나 천마에게 복종할 때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 * *
루카스가 옥상으로 올라가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양인현이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말했다.
“누구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나?”
그제야 양인현의 시선도 루카스를 향한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루카스에게 던졌다.
“…이건.”
검은색 카드. 바로 방금 보았던, 천마의 시체에서 수거한 것과 똑같이 생겼다.
즉 이것 또한 VIP의 회원임을 증명하는 카드라는 건데.
“이걸 어디서?”
“젠틀맨이란 자가 주더군.”
“그에게 무슨 말을 들었지?”
“VIP에 들어오라는 제안.”
루카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양인현의 얼굴을 살펴보며 물었다.
“뭐라고 대답했나?”
양인현의 기색이 바뀐 건 그 순간이다. 마치 공기의 흐름이 반전된 듯한 기묘한 낌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나에 대해 몰라.”
서늘한 목소리였다.
“아무도 나에 대해 모르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서늘한 시선이다.
“나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해도, 넌 양인현이란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루카스는 양인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놈들은 마치 나와 자기들이 동족인 것처럼 떠들어댔다. 웃긴 일이지 않나?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지 이제 막 하루가 되었다. 놈들이 본 것이라고 해봐야 내가 마교의 찌꺼기들을 청소하는 게 전부였을 터. 그것만 보고 날 동족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내 입장에선 벌레가 꼬인 것보다 고약하지.”
양인현이 검을 뽑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알고 있었나. 루카스. 하늘보다도 더 높은 곳에 존재하는 저 진공공간에서, 어떠한 관측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모양이야. 놈들은 그걸 통해서 우리의 전투 광경을 엿본 것 같고.”
진공공간의 관측기구, 인공위성을 말하는 건가.
그리고 양인현이 하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제대로 자세도 잡지 않았다. 검술보다는 마치 막대기를 휘두르는 듯 투박한 동작이었다.
파팟-
아주 작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양인현은 검을 다시 꽂았다.
“─불쾌감 때문에 머리가 아파 올 지경이야.”
루카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해가 중천까지 떠올라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하늘보다 더 너머에 있는 새까만 공간에서 작은 불빛이 튀는 광경을 목격했다.
“대충 얘기는 들었다. VIP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었지. 나도 동행하겠다.”
“…….”
어쩌면 VIP는 루카스도 쉽게 달성하기 힘든 위업을 달성한 걸지도 모른다.
매상검 양인현을 완전히 적으로 만드는 위업을.
* * *
황금으로 조각한 듯한 거인巨人.
그게 닐 플란드란 사내를 처음 보고 지우다드가 품은 감상이었다.
강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하다.
천마에게서 느낀 게 끝없는 심연이라면, 닐에게선 황금과도 같은 찬란함만이 느껴졌다. 시선을 뗄 수 없지만, 계속 바라보면 두 눈이 멀 것만 같은.
“그러니 대공의 말씀은 이것이오?”
묵직한 목소리가 지우다드의 정신을 일깨웠다.
“누군가가 이 신 루아노블에 침입했고, 그가 단신으로 마교를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고.”
“그렇소.”
“천마는?”
“행방불명된 상태요.”
“…….”
이렇게 말해 줄 것을 루카스가 요구했다.
그리고 지우다드는 직접 말했다시피, 루카스가 원하는 것을 대부분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잠시 닐은 속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지우다드를 들여다보았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으나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턱을 괴는 척한다.
이윽고 닐이 말했다.
“즉, 우리 트로우맨 링즈가 루아노블에 올 이유는 없었다는 거군.”
“헛걸음하게 해서 미안하오.”
“이런 종류의 헛걸음이라면 환영이오.”
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사과할 필요가 없는 문제지, 오히려 좋은 일이오. 만약 마교와 싸우게 됐다면 우리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으니.”
“그리 생각해 준다면 고맙소. 그럼 어떻게, 루아노블까지 왔으니 한번 이 나라를 둘러보기라도 하지 않겠소? 아직 명소라고 부를 법한 곳은 없지만, 그럭저럭 눈요기쯤은 될 것이오.”
“제안은 감사하지만 일정이 빠듯한지라. 마음만 감사히 받겠소.”
닐은 그리 말하며 망설임 없이 왕성을 나섰다.
뒤에 따라붙은 부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대공의 말이 사실일까요?”
“사실이라니?”
“마교가 괴멸당했다는 것 말입니다. 정보대로라면 루아노블은 이미 천마의 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즉 대공이 천마의 협박에 넘어가서, 마교가 괴멸했다고 위장한 걸지도…….”
“우리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예.”
“그럴듯하군. 하지만 아니야. 천마가 택할 전법치곤 너무 소극적이다.”
트로우맨 링즈와의 충돌이 두려워서 마교의 괴멸을 위장하는 것. 천마가 실행하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계획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대공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까지 억지로 파고들 생각은 없다. 트로우맨 링즈는 이곳에 전쟁을 하러 온 게 아니다. 협박을 당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괜히 역린을 건드려 경계를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천마가 행방불명이라니, 좋지 않군요.”
“음.”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군.”
잠시 고민하던 닐이 말했다.
“[카드]를 손에 넣고 [VIP]에 잠입하고 싶었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움직일 수밖에.”
“마스터에겐 그리 보고합니까?”
“그래. 그리고…….”
잠시 닐의 시선이 거대한 빌딩, 마천의 옥상으로 향했다.
“더 보고할 것이라도?”
“아니. 보고는 여기까지다. 너희들은 먼저 돌아가도록.”
“예? 그럼 아너 플란드께선…….”
“나 혼자 간다.”
파직.
일순 닐의 푸른색 눈동자에 일순 뇌전이 꿈틀거렸다.
“넥스트 스테이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