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337화 (558/857)

외전 337화

“큭큭큭.”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감정 없는 목소리를 뱉어 내던 위지길이었다. 양인현은 오히려 지금이 그의 본모습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위지길이 바닥에 칵 침을 뱉었다.

“모든 걸 우리가 이뤄 내? 하하. 이봐, 양인현. 저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우리가 아니야. 대부분을 너 혼자 이뤄 낸 거지. 실제로 사파십대고수邪派十大高手 중 셋을 네가 죽였다. 나머지 하나는 우리 셋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든 끝에 간신히 죽일 수 있었고.”

위지길은 슬그머니 차가운 미소를 보였다.

“알겠나? 장로님의 무모한 계획이 실효를 거두고 있는 이유는 별것 없어. 그냥 너 때문이다. 양인현, 네가 있기 때문이라고.”

나머지 둘도 그에 동의하는 듯하다. 위지길이 자리를 떠나자 동조하듯 함께 사라진 것을 보면.

홀로 남은 양인현은 그들이 내보인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우선 그는 방금 느낀 삐딱한 적대감이 열등감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조성추에게 만족감을 안겨 주는 것, 때문에 고난이도 임무를 연이어 성공하며 조성추의 편애를 독차지하는 양인현에게 불만을 품는 건 당연지사라고 볼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나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그저, 그런 삶의 방식밖에 배우지 못했다. 조성추가 그렇게 키웠다. 세뇌… 란 말도 완전히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나는?’

나는 왜 조성추의 칭찬이나 격려에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거지? 모르겠다.

양인현은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의 주의는 자연스레 다음 임무의 목표로 향했다.

‘사파제이인자, 혈군 당천극.’

사파의 하늘이라고 불리는 파천군破天君의 바로 다음 가는 실력자. 정파 최고 고수로 꼽히는 무당武當의 태극진인太極眞人과 소림少林의 백학대사白鶴大師의 협공에도 끝내 승리를 차지한 일화는 무림인들 사이에서 이미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당천극이 이끄는 흑마련黑魔聯은 사파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세력이다. 사파에서 내로라하는 정예 고수가 포진하고 있을 것이다.

조성추는 이번에 임무를 내리면서 기한을 입에 담지 않았다. 양인현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임무만큼은 기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 *

하지만.

“쿨럭……!”

그럼에도 이겼다.

임무를 완수했다.

당천극은 부릅뜬 눈으로 양인현을 바라보았다. 심장을 정확히 관통당했음에도 아직 살아 있다니.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양인현은 반쯤 질린 얼굴이 되었다.

“혈매단… 과연 그랬군. 십대고수 절반을 죽인 건, 너였나.”

“…남길 말은?”

주변은 피바다다. 이미 당천극의 유언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양인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당천극은 핏물을 한 번 게워 낸 다음, 흐릿한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서쪽에 태량太良이라는 마을이 있다.”

“뭐?”

“그곳에 나의 딸이 있다. 변덕으로 태어나게 된 아이지. 아마 내 존재조차 모를 거다. 나도 지금까지 그 아이를 잊고 살았고.”

“…….”

“…죽음을 앞둔 순간, 왠지 모르게 그 아이가 떠오르는군. 화련華憐. 내 유일한 혈육…….”

당천극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푹 떨궜다.

양인현은 멀뚱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유언을 듣는 건 언제부턴가 생겨난 습관 중 하나였다. 양인현이 맡은 대부분의 임무는 암살이었다. 암살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목격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목표가 죽음 직전에 남기는 말을 들을 존재는 그밖에 없었다.

그래서 죽인 이들에게서 유언을 들었다. 그리고 결코 잊지 않았다. 속죄나 죄책감 같은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럼 뭐지? 검을 맞댄 상대에게 가지는 최소한의 예의? 이것도 인간의 도리와 관련된 일인가? …모르겠다.

양인현은 당천극의 시체를 보았다. 그가 죽인 사파인들은 대부분 죽기 직전 저주를 퍼부었다. 적어도 혈육에 관한 얘기를 꺼낸 건 당천극이 처음이었다.

“…….”

머리가 조금 아파 왔다.

양인현은 지친 발걸음을 움직였다.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 * *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마치 햇볕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은 감각이다. 양인현은 안갯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의 손.

그 사실을 느낀 순간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콱 움켜쥔 손목은 놀랄 만큼이나 가냘픈 느낌이었다. …여인의 손목, 억지로 눈을 뜨자 꾸물거리는 시야가 보인다.

큼지막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

“정신이 드셨나요?”

“…….”

“마을 근처에 쓰러져 있었어요. 열이 엄청 올랐고 전신이 피투성이였는데… 어, 지금은 벌써 다 아물었네요? 지혈제만 좀 발라 놨었는데.”

양인현은 여인의 말을 무시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허름한 집의 내부 모습, 온갖 약초나 약재 도구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다.

기절했던 건가.

양인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정신을 잃은 건 이상하지 않다. 당천극과의 싸움에서 양인현은 목숨을 걸었으니까. 문제는 그 이후다.

‘스스로의 몸 상태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살귀 실격이다.

이 순간 목숨을 잃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과오를 범한 것이다.

하면, 어째서? 왜 난 이런 미련한 짓을 저지르고 만 거지? 무엇이 내게 하여금 충동적인 판단을 내리게 만든 것인가.

“저기요?”

여인의 목소리에 그녀를 바라봤다.

“고맙소.”

그리고 짧게 묵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잠깐만요, 아직 상처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단 건 분명하다.

당천극의 죽음은 얼마 안 가 사파 무림 전체에 알려질 터. 그리고 이번에도 양인현은 붉은 매화 한 송이를 현장에 놔두고 왔다.

즉 이 소식은 얼마 안 가 화산에도 닿는다.

그러니 그 전에 태량이라는 마을에 가서…….

‘마을에 가서?’

양인현은 문득 상념을 멈췄다.

마을에 가서, 난 뭘 어쩌려는 거지?

화련이라는 여자를 만났다고 치자. 그 여자를 내가 보살피기라도 할 수 있단 건가? 그건 불가능하다.

살귀의 삶에 인간적인 부분은 필요 없다. 철저히 배제해야 된다.

자신의 손으로 인연을 만드는 건 어불성설이다. 오직 땅에 떨어진 의 그리고 협을 곧추세우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

갑자기 허무해졌다. 이 모든 행동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당천극의 유언이 잠시간 그의 심금을 흔들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이제야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다.

‘…돌아가자.’

내가 있어야 될 곳으로.

화산으로.

“약값을 치르리다.”

그러자 여인이 픽 웃었다.

“당신, 무림인이죠?”

“…….”

“놀랄 필요가 뭐 있어요? 단련된 육체에, 검 한 자루, 눈가엔 힘이 팍 들어가 있고 고지식하기까지 한데.”

양인현은 더 이상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속에서 은전 주머니를 꺼내 책상 위에 두었다.

“그거면 책상 위에 있는 약초들 다 사고도 남겠는데요.”

“목숨값으로 치겠소.”

“…뭐, 좋아요. 나도 항상 쪼들리니까.”

속물적인 얼굴로 혀를 쏙 내밀고는 그대로 돈을 챙긴다. 집을 나서기 직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치면 또 와요. 이만큼이나 받았으니까, 몇 번은 무상으로 봐줄게요. 이래 봬도 제법 실력은 있는 편이랍니다.”

그냥 떠나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양인현은 그녀의 다음 질문에 멈칫했다.

“그런데 그쪽은 이름이 뭔가요?”

“…그건 왜 묻는 거요?”

“다음에 여기 왔을 때 혹 내가 없으면 들렀다고 서한에 이름이라도 써 둬야 될 것 아니에요? 안 헷갈리게.”

“됐소. 이제 여기 올 일은 없을 테니.”

“아. 그래요? 그럼 생명의 은인으로서 물어볼게요.”

“…….”

“웃긴 얼굴도 할 줄 아시네.”

양인현의 찌푸린 얼굴을 보며 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여자는 알고 있는 걸까? 내가 허튼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로 자신의 두개골을 부술 수 있다는 것을.

“…양인현이라고 하오.”

그리 대답한 순간, 양인현은 왠지 모를 감회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한 게 언제였더라.

“양 소협이셨군요.”

여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당화련唐華憐이라고 해요.”

* * *

그날 이후로 양인현은 때때로 태량에 들르게 되었다.

당천극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 당화련이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가진 의원이어서, 내놓은 은자가 아까워서…….

…누군가 이유를 물어본다면 댈 핑계는 여럿 있었으나, 그중 어떤 것에도 스스로가 납득하진 못했다. 즉 양인현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태량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화련은 당찬 여인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태량이라는 마을엔 노인과 아이가 많고 젊은이는 거의 없었다. 양인현이 판단하기에, 이 마을의 활력은 당화련이 혼자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양인현은.

저물어 가는 노을 아래로, 아이들과 뛰노는 당화련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아졌다.

“또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거예요?”

당화련의 걱정 섞인 목소리는 듣기 좋았고,

묘하게 억세지만 꼼꼼한 손길이,

부드럽지만 분명할 정도로 강직한 눈동자가,

그럼에도 가끔 보이는 어벙한 모습이.

양인현은…….

“내가 담근 백화주는 좀 써요.”

당화련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몸에 좋은 약초를 많이 썼거든요.”

달빛이 유난히도 밝은 여름밤.

기분 좋은 풀벌레의 노랫소리처럼, 당화련의 목소리가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어디 가서 이런 맛은 못 볼 걸요?”

잔을 건네받고, 천천히 백화주가 채워진다. 그에 따라 쌉싸름한 냄새가 콧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확실히 약재의 냄새가 난다.

술잔 안에 맺힌 별빛을 조용히 내려다보는데 당화련이 끼어들었다.

“달이 밝은 날엔 이렇게 별빛을 담을 수 있어요. 근사하죠?”

“그렇군.”

“나도 따라 줘요.”

내민 술잔을, 이번엔 양인현이 채워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들이켠다. 안주도 없이.

“…….”

확실히 쓰다. 하지만 끝맛은 중독될 정도로 달콤하다.

한동안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차츰 술병이 쌓여만 갔다. 평소 얘기를 주도하는 건 언제나 당화련이었으나, 그날은 유독 조용했다.

이윽고 술병 두 개가 비워졌을 때.

“양 소협.”

당화련이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무슨 소리요?”

“무상으로 치료해 주는 거요. 처음 제게 주셨던 은화 기억해요? 그게 오늘 치료로 딱 맞게 떨어졌거든요.”

“…….”

그런 걸 세고 있었던 건가. 양인현은 조금 씁쓸해졌다.

“걱정 마시오. 대금은 치르리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 말은…….”

당화련은 몇 번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슬쩍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치러도 되는데.”

항상 당찬 모습을 보이던 당화련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양인현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냥 와요. 언제든지. 대, 대금 같은 건 안 받을 테니까.”

“…하지만.”

“양 소협은 그러기 싫나요?”

“…싫지 않소.”

“그래요?”

당화련이 웃었다.

“다행이다.”

그 미소를 본 순간 심장박동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양인현은 눈이 부셔 그녀를 마주 볼 수 없었다.

27살,

평생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봄이 왔다.

그리고 봄은,

빨리.

너무나도 빨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