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27화
지글지글-
추방자는 잘 익어가는 고깃덩이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어느새 그곳엔 백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주변을 힐끗 둘러본 다음 물었다.
“모두 보낸 겁니까?”
[…….]
“그렇군요.”
대답이 없었지만 청년은 납득한 듯 홀로 수긍했다.
그리고 백기사, 혹은 아골렛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추방자의 바로 앞에 걸터앉았다.
한동안 둘의 시선은 익어가는 고깃덩이에 꽂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고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당연히 고기가 얼마나 잘 익어가는지에도 관심이 없었다.
한쪽 면만 가열된 고기에서 탄내가 풍기기 시작했을 때다.
제3자가 꼬챙이를 슬쩍 돌렸다.
“구울 줄 모르는군?”
새롭게 나타난 남자는 이죽거리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모든 면을 밸런스 있게 익혀야 맛이 좋아진다네. 즉 가장 맛있게 먹으려면 이렇게 쉴 새 없이 꼬챙이를 돌려 줘야 된다는 거지. …뭐, 그러기 귀찮기는 하지만. 팔도 저리고.”
따악-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꼬챙이는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혼자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만족한 얼굴로 모닥불 앞에 섰다.
뒤이어 그의 시선이 추방자를 향했다.
“왜 내 계획을 방해했나?”
남자.
비기닝 위저드의 말에 추방자가 대꾸했다.
[네가… 바라던 일이… 아닌가……?]
“내가 바랐다고? 그럴 리가. 지금 내 불쾌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네.”
실제로 비기닝 위저드의 목소리엔 점차 싸늘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는 준비를 마친 상태였네. 마성으로 왔다면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갔었을 터. 자네가 그걸 망친 게야.”
[나는…….]
추방자가 조용히 말했다.
[자네에게… 빚을 졌었지…….]
“…….”
[그걸… 갚고 싶었던 것뿐이네… 오랜 친구여…….]
아마 비기닝 위저드는 그 대답이 탐탁찮았음이 분명했다. 가면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골렛은 그 너머의 표정이 분명 일그러져 있다고 생각했다.
“…시시한 이유였군.”
[…….]
“식사를 방해했나? 미안하게 되었네. 불청객은 이만 떠날 테니 맛있게들 드시게나.”
그 순간 모닥불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순간적으로 화력이 수백 배는 강해진 것이다. 당연히 고기는 익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게 됐다. 화염에 집어삼킨 고깃덩이는 그대로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화염이 가라앉았을 때 비기닝 위저드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그를 화나게 만들었군요. 쉬운 일은 아닌데.”
아골렛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추방자. 당신은 정말로 그가 허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보다 훨씬 더, 까다롭게 왕을 선별하는 기사가 누구인지.”
[가장 처절하게… 왕을 찾아다녔지……. 그녀는 너와 달리… 허왕의 존재를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결국은 모두 죽었죠. 다름 아닌 그녀가 직접 죽였습니다.”
아골렛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삼천세계로 보낸다고 해도 그 혼자 보내는 편이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굳이 두 명을 동행시켰죠. 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 부분입니다.”
[…왕은.]
추방자는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모든 신하를… 한데로 뭉칠 수 있어야 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린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
“…….”
[기대되지 않나……. 4기사와 십이허주를 데리고… 익숙하지만 낯선 땅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지…….]
* * *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뇌존?’
[큭큭큭.]
뇌존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신神이 죽었다. 그와 동시에 우주의 절반이 사라졌다. 여파에 휩쓸리지 않은 우주들은 가까이 있던 우주와 합쳐지기 시작했다……. 자. 현상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면 되겠는가.]
‘…그게 가능하다는 거냐?’
[전례가 없던 일이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신의 죽음으로써 한 가지 확실시된 것도 있지.]
‘확실시된 것?’
[각각의 우주가 왕래하지 못하도록 경계선을 세운 건 신이었다.]
“……!”
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왜 그러십니까?”
“…조금 추운 것 같아서요.”
“하하. 확실히 따뜻한 나라는 아니죠.”
김상언은 너스레를 떨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실수했다. 뇌존과 속으로 얘기를 나누는 걸 내색한 적은 없었는데.
‘무슨 목적으로?’
[루카스 트로우맨, 이미 죽은 신의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네가 주목해야 할 건, 그리고 해야 할 일은 변함이 없지.]
‘…….’
[…디아블로를 만나라. 그럼 재밌는 일이 생길 거다.]
뇌존의 목소리가 점차 흐릿해졌다. 이 녀석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을 때 항상 이런 기색을 내비쳤다.
아마 지금부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목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루카스는 현재 상황에 대해 직접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
‘복수의 우주가 합쳐진 건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 가지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아마 루카스의 고향우주, 그리고 지구만이 합쳐진 게 아닐 것이다. 김상언의 일행, 처음 보았던 난쟁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천리안을 사용해 푹 눌러쓴 후드 너머의 얼굴을 살펴봤다.
분홍빛 피부, 하나밖에 없는 눈동자, 그리고 더듬이를 가진 괴이한 모습. 물론 괴이하다는 건 다분히 인간적 관점에서의 감상이다.
아무튼 이 종족은 루카스의 고향에도, 지구에도 없었던 종류다. 방금 하늘에 모습을 드러냈던 전함도 그렇다. 그가 보기에 저 우주는 성간비행星間飛行 또한 충분히 가능할 만한 하이테크놀로지의 집합체였다.
‘게다가.’
페일이 어느 정도 힘을 드러냈는데도 우주엔 아무런 영향이 가지 않았다. 전체적인 허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있다는 증거다.
기본적으로 군림자 하나가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우주를 ‘초대형우주’라고 부른다. 그리고 루카스가 알기로 그 정도 크기를 가진 우주는 삼천세계에서도 드물었다.
‘이곳은 초대형우주가 되었다.’
규모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하다.
‘…이거 난감한데.’
이토록 거대해진 우주에서 디아블로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비단 디아블로만이 아니다. 이곳이 지구이자 고향 우주라면 악마왕도 어딘가에 있을 터.
솔직히 놈들의 수색에만 집중한다면, 길어도 3개월 내에 찾아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페일과 양인현의 존재 때문이다. 이들을 내버려두고 자신의 볼일만 봤다간, 더 큰 재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순수 무력 면에서도 악마왕을 상회하는 존재들이니.’
그 잠재적 위험도는 우주구급임이 분명하다.
그때였다.
“나는.”
걸어 다니는 재앙 중 하나, 양인현이 말했다.
“잠시 이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다.”
“뭐?”
그리고 대답도 없이 휙 사라져 버렸다.
“잠깐…….”
루카스가 급히 뒤를 쫓으려고 했으나, 양인현의 신형과 기척은 이미 저 멀리까지 사라진 뒤였다.
어떡하지. 쫓을까? 아니. 그랬다간 페일을 혼자 놔두는 꼴이 되는데.
결국 혀를 차고, 반쯤 굽혔던 무릎을 다시 폈다.
…그래도 양인현은 페일보단 훨씬 이성적이니까 내버려둬도 괜찮지 않을까.
‘젠장.’
그럴 리가 있겠나. 루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 숲에서 느낀 햇볕은 따사로웠으나 이 지방의 온도는 결코 높은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늘한 편에 가깝다.
루카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했다.
스으으-
얼마 안 가 루카스의 앞에 곰의 형상을 한 서리 같은 게 피어났다. 얼음 같은 빛깔을 가진 녀석은, 인형으로 착각할 만큼 작았다.
역시 있었다. 정령.
이건 아마도 눈의 정령일 것이다.
정령은 호기심 섞인 눈으로 루카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에게서 자연 이상의 짙은 순도를 느끼고 당황 반, 흥미 반을 느끼고 있겠지.
‘계약하겠나?’
곧바로 본론을 꺼내자 눈의 정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루카스는 정령왕급과도 손쉽게 계약을 따낼 수 있다. 중하급에 불과한 정령이라면 귀찮은 절차도 필요 없다.
‘이름은?’
[──]
정령의 사념이 흘러들어왔다.
‘[메텔]이구나.’
[…….]
‘방금 사라진 남자를 찾아내서, 감시해 다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메텔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냉풍이 되어 양인현을 쫓아갔다. 물론 양인현이 메텔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다.
그래도 루카스의 마나를 조금 실어 두었으니 없애지는 않을 것이다. 가진바 힘이 얼마 되지 않으니 거슬려하지도 않을 거고.
루카스는 김상언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아, 하지만 사례를 아직 못 드렸는데…….”
“괜찮습니다.”
왕성에 있을 루아노블의 왕족이나 귀족, 혹은 기사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그런 장소에 발을 들이는 건 좋지 않다.
루카스는 한 번 더 붙잡으려는 김상언에게 정중히 거절의 뜻을 내비친 뒤, 그들 무리에서 이탈했다.
“가자, 페일.”
“음. 네에.”
페일이 터덜터덜 루카스를 쫓아왔다. 헤에, 흥미로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그 시선이 음식점에 꽂힌다.
“그런데 아저씨, 맛있는 건 언제 줄 거예요?”
“어?”
“아까 더 맛있는 거 먹여 준다면서요. 저 기억력은 나쁜 편 아니거든요.”
“…….”
“아님 설마 거짓말한 건가.”
페일은 여전히 히죽 웃는 얼굴이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장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쉽게 넘길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태도를 보아하니 저 근처 음식점에 가고 싶은 모양이다.
‘어떻게 사주지.’
당연하지만 문명사회에서 거래 활동을 하기 위해선 화폐가 필요하다. 김상언에게 사례로 화폐라도 받아 둘걸 그랬나. 아니 거기서 갑자기 돈을 요구하는 건 조금 그렇고.
루카스는 힐끗 주변을 둘러봤다.
─루아노블.
기사들의 나라라는, 기품 있는 이명을 가졌지만 그리 깨끗한 나라라고는 볼 수 없는 국가였다. 게다가 지금은 다종족, 다문화가 섞였으니 치안이 더욱 불안해졌을 터.
마침 으슥한 골목길이 하나가 보인다.
대낮인데도 음습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풍기는 곳, 루카스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따라와, 페일.”
“히히히.”
페일이 타박타박 옆으로 다가왔다. 마음 같아선 손목을 꽉 잡은 채 끌고 다니고 싶을 정도다. …수갑이라도 채우면 안심이 좀 될까.
엉뚱한 생각을 접은 채 골목길에 들어선다.
처음엔 그리 지저분하진 않았는데, 조금 더 걸어 나가자 공기부터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뒹구는 쓰레기가 많아지고 고약한 냄새도 풍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선 앞에 다섯 명 정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레이디 앤 젠틀맨.”
“이런 누추한 곳까진 어인 일로 오셨을까.”
“뭘 물어? 뻔하잖아.”
남자들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고, 루카스는 그중 중간에 선 사내를 바라봤다.
근육질에 대머리, 양손엔 검과 총을 하나씩 들고 있다.
“어둡고 사람도 잘 안 와서 은밀히 그 짓 하기엔 여기만 한 데가 없으니.”
“킥킥킥. 진짜 신사셨군.”
뒤에서도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뻔한 전개다. 도망치지 못하게 뒤를 막는 거.
“그런데 여긴 우리 구역이라서 자릿값을 좀 받아야겠네.”
“호텔이라 생각하라고. 물론 유니크한 곳이니 좀 비싸긴 하지만.”
“어떻게, 손발 잘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즐겨 보시겠나? 진짜 방해는 안 할게.”
“우린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거든.”
천박한 웃음소리를 두고, 페일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예요?”
“양아치.”
“양도 없는데요?”
“양치기가 아니라 양아치라고.”
“무슨 차이죠.”
“…….”
루카스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양아치들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굳었다.
“여긴 데이트 코스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아가씨.”
“근데 취향 참 고약하네. 남자 친구가 너무 허약하게 생겼잖아.”
“데이트? 남자 친구?”
페일은 생전 처음 듣는 얘기를 접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루카스는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빠각
우선은 뒤에 선 두 놈의 얼굴을 작살냈다. 녀석들은 콧대가 뭉개진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꼬박 하루는 의식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
“뭐야.”
앞에 있는 녀석들이 멍한 소리를 냈다. 이들은 루카스의 움직임을 파악할 만큼 안목이 뛰어나지 않다. 아마 뒤에 있던 동료들이 갑자기 주저앉은 것처럼 보이겠지.
툭.
바닥을 한 번 발끝으로 건드린다. 그 순간 지면이 부서지며 돌덩이가 솟아오른다. 돌덩이들은 그대로 전방에 있는 놈들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빠바박
“아아악.”
제대로 된 마법은 아니지만 맨몸에 돌 세례를 맞았으니 제법 아플 거다. 놈들 대부분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남은 건 중간에 서 있던 검과 권총을 든 남자뿐이다. 녀석만큼은 날아오는 돌덩이에 당하지 않고 피하거나 쳐내는 데 성공했다.
최소한 다른 녀석들보다 조금은 더 강하다는 증거다.
“이 개자식이!”
철컥, 권총을 겨냥하더니 연속으로 쏘아냈다. 날아오는 탄환을, 루카스는 대충 손으로 캐치했다.
“으, 어?”
남자는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루카스는 손에 쥔 총알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런 작은 탄환으로는 부족하지.”
루카스는 탄환을 손바닥에 올려 둔 다음, 그걸 손가락으로 튕겼다.
꽈앙!
남자의 볼을 스치고 지나간 탄약이 뒤에 있는 벽을 박살 냈다. 9mm짜리 탄환이 아니라, 무슨 바주카포라도 쏘아낸 것 같다.
그 순간 남자는 깨달았다.
‘조, 조졌다.’
다른 건 몰라도 눈치만큼은 비상히 빨랐기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전례가 없는 위기를 인지한 것이다.
그리고 행동은 깨달음보다 더 빨랐다.
“사, 살려 주십쇼!”
개구리처럼 바싹 바닥에 엎드린다.
“…….”
상황은 대충 끝났고.
루카스는 어떻게 용건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루카스’의 기억 또한, 지금의 그에겐 내재되어 있었다.
남자의 앞에 무릎만 굽혀서 앉는다.
“있잖아.”
“예, 예.”
그리고 되도록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돈 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