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20화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할 상대다.
루카스는 이곳에서 최상의 컨디션, 본래 이상의 전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하다. 여기가 다름 아닌 그의 심상세계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러나 상대는 뇌존이다. 그가 이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감은 극히 한정되어 있는데도, 수많은 ‘루카스’를 온전히 받아들인 자신과 대등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수십 개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각 공간에 어마어마한 중력을 적용시킨 다음 뇌존을 향해 던졌다. 사라진 ‘루카스’들의 말은 옳았다. 이만한 연산을 한 번에 해냈는데도 부담의 크게 없다. 더 이상 연산보조가 필수는 아니라는 뜻이다.
뇌존은 자신에게 쇄도하는 소형 블랙홀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중력重力은 그에게 있어 가장 귀찮은 힘이다. 아마 녀석은 수많은 연전을 통해서 그 사실을 간패했을 것이다.
그래도 피할 생각은 없다.
꽈드득.
뇌존이 양손에 전류를 두른 다음 블랙홀을 맨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블랙홀을 천으로 만든 공을 대하는 것처럼 찢어발긴다.
“……!”
그 충격적인 행위엔 루카스마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중력의 덩어리가 나의 ‘우레’를 버틸 수는 없지.”
“…….”
저 미친놈은 지금 물리력으로 블랙홀을 찢어발긴 것이다. 물론 실제 블랙홀과는 그 원리도, 중력의 세기도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경악할 만한 행위인 건 분명했다.
루카스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상력이다. 저 압도적인 존재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만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쿠구구…….
일순 하늘이 확 밝아졌다. 먹구름 안에서 꿈틀거리는 뇌류 때문은 아니었다.
뇌존이 이죽이며 말했다.
“운석이라도 떨어뜨리려고? 그건 너무 흔한데.”
“그렇긴 하지. 그래서 좀 많이 준비해 봤다.”
먹구름이 걷히고 열댓 개의 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악할 만한 크기다. 하나하나가 소행성에 버금갈 정도다.
“아무래도 이런 마법은 현실에선 쓸 수 없는 스케일이거든. 자칫 잘못하면 행성에 반영구적인 악영향을 끼칠 테니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이만한 연산력은 루카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가는 모양이다.
“…크하하!”
뇌존이 웃으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쳤다.
파지직! 손에서 뻗어 나온 시퍼런 뇌류가 하늘을 향해 쏘아져 갔다. 운석과의 거리가 반쯤 좁혀졌을 때, 뇌류는 수천 갈래로 뻗더니 아주 거대한 그물의 형상이 되었다.
그리고 운석을 감싼다.
쿠우우, 느릿하지만 착실히 진격하던 운석의 움직임이 멎었다.
뇌존은 하늘을 향해 검지를 흔들었다.
“블랙홀 쪽이 좀 더 좋았다.”
콰지직! 감싼 뇌류가 그대로 운석을 완파시켰다. 열댓 개의 운석은 돌멩이, 혹은 약간 커다란 바위 정도의 크기로 잘게 부서져 하늘로부터 쏟아졌다. 물론 저딴 석우石雨로는 뇌존의 몸에 흠집 하나 만들 수 없다.
“그럴 거라 예상했다. 네가 가진 과시욕이라면.”
“뭐?”
“이게 평범한 운석으로 보이나?”
떨어져 내리던 돌멩이가 꿈틀거렸다. 뇌존은 그 모든 부스러기에서 각기 다른 기운을 느꼈다.
“루카스. 네놈 설마…….”
“운석을 구성하고 있는 건 마법이다. 운석 하나에 대충 수억 개쯤 욱여넣었지.”
수억. 농담 같은 단위지만 농담이 아니다.
애초에 그럴 상황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눈앞의 남자는 그만한 마법을 동시에 전개할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떨어지던 파편들이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그 돌조각은 모두 마법이 되었다. 그래. 왠지 고작 운석 열댓 개를 불러온 것치고는 상당히 부담이 간 꼬락서니를 보이기는 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건 깨달았지만, 설마 이딴 방법을 쓰다니.
뇌존은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한 가지 이해 가지 않는 게 있다.”
“뭐지?”
“왜 귀찮게 운석부터 시작한 거냐. 너라면 처음부터 이 정도 수의 마법을 전개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루카스는 픽 웃었다. 별 거 아닌 이유고, 숨길만 한 것도 아니다.
“연출.”
“연출?”
“이런 방식으로 마법을 써서, 널 아주 조금이라도 동요하게 만들었잖나.”
“…….”
“그것만으로 이 연출은 성공한 셈이다.”
“…큭. 크하하.”
뇌존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 군림자와 싸우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군.”
“칭찬인가?”
“극찬이다. 마음 깊이 새기도록 해라, 미치광이.”
루카스는 마주 웃으며 손바닥을 휘저었다.
그리고 사상 최대의 마법폭격이 시작됐다.
* * *
운석 하나에 수억 개.
열댓 개의 운석이라면 수십 억.
가능한 일인가? 억億이란 단위의 마법을 혼자 다루는 것이.
─물론 가능하다.
루카스는 수십억 마법 너머에 있는 뇌존을 직시했다. 그는 사방에 뇌류를 방출하며 주변에 접근하는 마법을 지워 나가고 있다. 1초에 수십 개의 마법이 사라진다. 의미가 없는 행위다. 말했다시피 전개된 마법의 단위는 억이다.
뇌존은 무언가 다른 걸 노리고 있을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말을 알고 있나?]
녀석이 돌연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뱉은 목소리는 몰아치는 마법의 폭음을 뚫고 루카스에게까지 닿았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사물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변함없는 자아란 없고, 항구적으로 정해진 본성 또한 없다… 라는, 철학가들의 시시한 주장이지.]
“…….”
[넌 그야말로 그 단어에 어울리는 존재다, 루카스 트로우맨.]
뇌존은 애초부터 루카스의 변화에 계속 주목하고 있었다. 루카스란 존재가 가진 다변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허무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은 삶이 가지는 무상함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걸 언제가 되었든 잃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일체一切가 가지는 무상함에 대해선 너도 알고 있을 터.]
“…….”
[재밌는 건, 그렇게 깨우친 자일수록 오히려 절대絶對에 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억겁이 넘어도 변치 않는 것, 영원한 것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크큭… 절대자들의 그것과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핏!
뇌존의 몸에 상처가 일어났다. 방출하는 뇌류를 뚫고 마법이 그의 몸에 생채기를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뇌존의 전신에 상처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결정타는 없었으나, 경상으로 치부할 만한 것도 점점 적어진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 사실에 기뻐하는 것보다 뇌존의 말에 주목했다.
[불변의 존재는 실재한다. 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바로 그러하다. 인因과 연緣 없이 독립적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게 바로 나다.]
“…….”
[그러니 이건 변화의 대행자와 불변의 존재 간의 피할 수 없는 승부라고 할 수 있겠지.]
콰드득, 뇌존의 오른손이 뒤틀린 다음 떨어져나갔다. 여태까지 입힌 상처 중 가장 유효한 것임은 분명하다.
[난 이 마법이 끝날 때까지 널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힘을 충전하겠다. 미리 얘기하지. 관뢰貫雷가 꿰뚫지 못하는 건 없다.]
“…….”
[만약 이 마법이 모두 끝났는데도 내가 서 있다면… 루카스 트로우맨, 넌 패배할 것이다.]
* * *
양인현은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생기가 없는 것, 그리고 간간이 몸을 움찔움찔 떠는 걸 빼면 그저 가만히 서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남자의 내면에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스케일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움찔-
루카스의 어깨가 들썩였다. 여태까지처럼 미약한 움직임이 아니다. …무언가 내부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스릉.
양인현은 검을 뽑았다. 매화검법으로는 안 된다.
언제든 절기 매상검을 쓸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뒤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사실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체감으로는 10분 전후.
그리고 짧다면 짧고, 길면 긴 사투가 곧 끝나려 하고 있─
츠즛-
루카스가 반쯤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엔 뇌류가 아른거렸다. 양인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매상검梅常劍 제이초식第二招式 재화栽花.
─를 쓰기 직전.
파앗!
반쯤 뻗어나간 양인현의 검을 누군가 붙잡았다. 아니. 누군가라고 말할 게 아니다.
이 자리엔 단 세 명만이 존재했고, 저기 기절해 있는 이종학으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이 초식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양인현은 루카스를 바라봤다.
“무슨 조화를 부린 거지?”
“…….”
루카스는 칼날을 잡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표정을 보니 아직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이 남자는 내면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냈을까?
양인현은 의문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이긴 건가? 뇌존을?”
“…일단은.”
루카스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럼 넌 뇌존의 힘을…….”
“나에 대한 건 아무래도 좋아. 아무튼 뇌존은 더 이상 화산에 위협이 되지 않을 거다.”
“…….”
“그것보다 여기 시간은 얼마나 흘렀지?”
“약 10분 정도.”
의외로 많이 흘렀다.
그만큼 루카스와 뇌존의 싸움이 길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루카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이종학은… 무사한 것 같군.”
비록 기절한 상황이긴 하지만 목숨엔 지장이 없는 듯하다.
“허리를 벤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치료가 필요하겠지. 제자들에게 맡기고 오겠다.”
“고맙다. 그럼 이종학만 맡기고 바로 출발해도 되겠나?”
“난 상관없지만 그대는? 후유증이 있을 것 같은데.”
“…만전은 아니지만, 동행인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라서 서둘러야 돼.”
“알겠다.”
양인현이 이종학을 둘러업었다.
“곧바로 오겠다.”
루카스는 양인현이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홀로 말했다.
“…닥쳐. 좀.”
* * *
양인현은 금방 돌아왔고, 루카스는 그와 함께 사막으로 이동했다. 양인현은 처음 보는 힘에 조금 놀란 듯했으나, 공간의 틈새로 발을 내딛는 걸 주저하지는 않았다. 그 발걸음엔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다는 담담한 자신감이 드러나 있었다.
“공간이동이라……. 허의 세계에서, 그 남자 말고 이 힘을 다루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그 남자?”
“추방자.”
“…….”
“처음엔 그대를 그 남자로 착각하기도 했었지.”
추방자. 전 우주의 추방자.
루카스는 그 이름을 들은 적 있었다.
분명 십이허주 중 한 명이다.
‘그러고 보니 양인현은 뇌존과 싸우기 전 이미 추방자와의 일전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했었나.’
그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 시간대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둘의 관계라도 캐물어 볼까 고민했으나 추방자란 단어에 담긴 울림이 심상치 않아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추방자에 관한 건 양인현의 역린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공간이동을 끝낸 뒤 루카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찾는 이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여전히 팔자 좋게 누워 있는 페일의 모습을 본 것이다.
루카스가 먼저 그곳을 향해 걸어가자, 양인현이 뒤늦게 따라오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었군.”
역시 양인현은 한눈에 페일을 알아봤다. 전생에서도 한 번 겪었던 일이니 놀랄 건 없었다.
마성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청기사를 언급하긴 했으나, 양인현의 성격상 한 줌 의심을 버리진 못했던 모양이다. 그에게서 느껴지던 경계가 좀 더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닌 듯하지만─
물론 루카스도 그가 완전히 자신을 동료처럼 대할 걸 기대하진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필요관계에 따라서, 서로에게 허락된 범위 내에서 도움을 주는 관계. 그게 가장 바람직하다.
“난 그녀가 청기사란 걸 모르는 설정이야.”
“음?”
“…아직 서로를 시험하고 있는 관계라고 할까. 설명하자면 복잡해.”
“그런가.”
양인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는 따지고 묻는 법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양인현의 첫인상은 루카스에게 잊고 있던 공포를 되살릴 만큼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낯설었다.
‘어쩌면 이게 좀 더 그의 본질에 가까운 모습일지도.’
실없는 생각을 하며 페일에게 걸어갔다. 그녀가 고개를 좀 더 젖혀 루카스를 바라보고, 뒤에 있는 양인현을 바라보았다.
“누굴 데려오나 했더니.”
그리고 히죽 웃었다.
“아저씨 정체가 뭐예요?”
“…글쎄.”
이젠 진짜 나도 모르겠다.
“응?”
그때 페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루카스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 페일은 무심히 가라앉은 청안으로 루카스를 들여다본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으으음?”
페일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머리를 긁적인다.
“왜.”
“아─뇨. 잘못 봤나 봐요.”
특유의 긴장감 없는 목소리를 내뱉더니 빙글 몸을 돌린다.
그리고 루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참았다.
[크하하… 숨기는 거냐? 그것도 재밌겠지.]
‘제발 닥쳐.’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따갑게 쏘아붙인다.
숨겨야지. 당연히 숨겨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말할 수는 없다.
뇌존과의 싸움에서 비겼고, 결국 놈의 자아가 머리 한구석에 남게 되었다는 말은.
양인현은 그렇다 쳐도 페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저 여자는 무조건 검을 뽑아든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루카스의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어째서 겁먹은 거냐? 지금의 너라면 청기사와도 싸워 볼 만할 텐데.]
…긁어 부스럼 일으킬 필요 없다는 거다. 루카스의 주적은 4기사나 십이허주가 아니니까.
“자. 그럼 다 모였으니 이만 마성으로 가볼까요!”
페일이 방긋 웃으며 착착 걸어 나가기 시작했고 양인현이 그 뒤를 따랐다.
루카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선두엔 4기사인 페일, 그 다음엔 십이허주 양인현, 마지막으로 몸뚱이 내부엔 천둥우레의 뇌존이라니.
우주 멸망이 목적이어도 납득이 갈 만큼 경악스런 구성원이다. 일시적으로 맺어진 무리긴 하지만, 이만한 파급력을 가진 존재가 한자리에 모인 건 전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도 전무후무한 일이지 않을까.
“…….”
그러다 문득, 루카스는 이들 모두에게 자신을 죽인 전과가 있다는 사소한 공통점을 깨닫고 말았다.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군.’
루카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발짝 늦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