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19화
둘, 셋, 넷, 다섯…….
루카스는 스스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셈을 이어가는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음에도 무시하고, 계속 센다.
…열, 스물, 마흔.
“그래도 응했지. 어떤 경우에도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게 우리의 역할이니까.”
…백, 이백, 오백, 천.
…….
…….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어졌다.
뇌존의 담담한 목소리가 루카스의 근간까지 닿아 그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함정이 있다면 부순다. 빈틈없이 계략을 짰다면 그것도 모두 부순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어도 상관없다. 개의치 않는다. 어떤 때에도 우리는 비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을 것이다.”
“…….”
“그래서 묻는데, 루카스 트로우맨.”
루카스는 이제 셈을 그만뒀다. ‘죽은 루카스의 수’를 세는 건 더 이상 의미 없는 행위가 됐다.
“네가 준비한 장난질은 이게 끝인가?”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루카스’가 패배했다는 현실을.
“…….”
루카스는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로부터였다.
타악, 이제는 형상조차 남지 않은 마른 초원에 착지한다.
그 모습을 보고 뇌존이 쭉 찢어진 미소를 지었다.
“과연. 넌 내가 알던 ‘루카스’군. 여태껏 싸운 반푼이들이 아닌, 진짜 루카스.”
“…….”
“표정이 말이 아니야. 이런 결과를 예상치 못했나? 흠……. 발안은 괜찮은 편이라고 해두지. 정신력 대결로 몰고 가는 게 네 입장에선 더 높은 승기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정면승부보다는 승산이 몇천 배는 더 높았겠지.”
뇌존은 마치 곡예를 하듯 손도끼를 던졌다 받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콰직! 손도끼는 손에 쥐어지는 대신 으스러졌다.
“어설프기 짝이 없다.”
뇌존의 목소리에 노기가 아른거렸다.
“지루함이란 감정에 대해 알고 있냐고? 그딴 질문을 네가, 내게 하는 것이냐? 루카스 트로우맨……. 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대체 언제부터 존재해 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네가 여태껏 겪었던 모든 시간이 찰나로 느껴질 만큼이다. 내가 아는 모든 존재의 세월을 더해도 내게 미치진 못한다.”
물론, 군림자는 제외하고.
뇌존은 말에 담긴 노기를 거두며 웃음기를 더했다.
루카스는 그 모든 말을 가만히 들으며 생각했다.
상대는 괴물이다. 뇌존에 대해선 그리 규명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싸움을 관측하며, 뇌존의 힘을 분석했다. 패턴을 분석하고,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켰다.
혹시 자신에게까지 차례가 왔을 때를 대비해서, 모래알만큼이라도 좋으니 승산을 올리기 위해서.
의미가 없었다.
왜냐면 뇌존은 모든 싸움에서 각기 다른 방식을 보였고, 각기 다른 패턴을 보였으며, 각기 다른 습관을 보였다. 그는 끝없이 변화했거나, 혹은 무한에 가까운 싸움의 가짓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 한쪽에선 오싹한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 싸움에서, 뇌존 또한 진화하고 있는 게 아닐까.
“뇌존.”
“뭐냐.”
“넌 정말 수다쟁이야.”
루카스는 우선 솔직한 감상부터 밝혀 뒀다. 뇌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보통 말이 많은 녀석이 진국인 경우는 거의 없더라고. 내 경험상.”
“어설픈 세월로 쌓은 편견이겠지. 그리고 넌 내가 수다쟁이란 사실에 감사해야 할 텐데. 아니면 진작 죽었을 테니까.”
“─내가 짠 작전은 두 개다.”
“음?”
“내 표정에 대해 말했었지. 난 딱히 절망하고 있는 게 아니야. 슬퍼하는 것이지.”
뇌존은 문득, 여태까지 죽인 반푼이 루카스들이 모두 웃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왜 그런 사실이 떠오른 거지?
“무슨 뜻이냐.”
“난 두 번째 작전까지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
뇌존은 루카스의 말이 허세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진상을 깨달았다.
“너, 설마……! 하하하!”
뇌존이 희열에 찬 광소를 터뜨렸다.
* * *
이 계획은 혼자서 짜지 않았고, 혼자서 결정하지도 않았다.
“정말로 괜찮겠나.”
루카스는 분명 의사를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망설였다.
[몇 번이고 물을 시간은 없을 텐데?]
[망설이는 이유를 모르겠군.]
‘루카스’들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으나, 루카스로선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뇌존이 심상세계에서 발휘할 힘은 미지수다. 물론 내가 포식한 ‘루카스’의 수는 별의 수보다 많지만…….”
단순히 인해전술로 군림자의 정신을 굴복시키는 그림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물론 우리 중에서 군림자를 직접 대면한 건 너밖에 없다.]
[뇌존의 전력을 가장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도 너겠지.]
[그래도 군림자와의 승부에서 승리를 도모할 수 있다는 건, 우주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기적이 아니겠나?]
“이해가 되지 않는 건가? 난 지금 승기를 따지는 게 아니야. 작전대로 된다면… 설사 승리해도 너희들은 전부 소멸한다.”
루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 그냥 사라지게 돼 버린다고.”
심상세계에서, ‘루카스’들은 뇌존과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패배는 자아가 소멸하는 걸 의미한다. 루카스는 이미 그런 경우를 몇 번이고 보았다.
[우리가 사라져도 네겐 나쁠 일이 없잖아.]
[처음엔 오히려 그걸 바랐지 않았나.]
‘루카스’들은 오히려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태도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루카스는 이들의 초탈한 듯한 태도가, 그리고 스스로의 자아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태도가 거슬렸다.
“효율의 문제다. 너희들이 없으면 극소시간대에 진입할 수 없어.”
[거짓말이군. 중요한 건 첫 경험이다. 넌 이미 감각을 깨우쳤지.]
[우리의 역할은 단순히 연산의 보조에 불과했다. 지금의 네겐 더 이상 우리가 필요 없어.]
“확신하지 마. 너희들은…….”
[너희들이 아니야. 우리들이지.]
[네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루카스니까.]
그들이 동시에 미소 지었다.
“왜 웃을 수 있는 거냐. 사라지게 되면, 내가 너희들의 숙원을 이뤄내는지도 알 수가 없게 되잖아.”
애초에 그런 계약이었지 않나.
그들은 루카스에게 힘을 보태고, 루카스는 그들의 숙원을 이뤄주기로 한 계약.
“안 돼. 난 납득 못 해.”
[까불지 마라, 루카스.]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모두가 동등하다. 이곳에선 네가 내는 의견도 그저 ‘루카스 하나’가 내는 의견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결론을 낼 때 다수결을 선호하지.]
[너를 제외한 모든 ‘루카스’가 찬성했다.]
[그러니 네가 우리를 존중한다면.]
[정말로 우리 모두를 ‘한 명의 루카스’로 대하고 있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면 안 되겠나?]
“…….”
물러설 곳이 없다. 반박할 거리조차 없었다. 마치 절벽 끝에 내몰린 것 같았다.
루카스는 그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미 자신을 제외한 ‘모든 루카스’가 선택했고, 찬성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목소리라고 해봤자 고작 ‘루카스 한 명’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니 루카스에겐 이들의 결정을 막을 명분도, 권리도 없었다.
고맙다, 는 말을 삼킨다.
스스로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건 자아도취에 빠진 얼간이나 멍청이뿐이다. 루카스는 어느 쪽도 아니다.
다만 깊게 새길 것이다.
[우리는 실패자였다.]
[다름 아닌 우리의 출생지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허의 세계.
실패자, 낙오자, 버림받은 가능성이 쓰레기처럼 떠내려 오는 세계.
루카스는 그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섣부른 위로 따위를 전하지 않았다. 이들은 지금 자학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 모두를 흡수한 너는, 루카스로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실패’를 학습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잊지 않을 것이다.
이들을, 나의 모든 실패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게 늦었는데, 우리들의 숙원은 이미 바뀌었다.]
[이것도 네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군.]
[네가 우리를 합일시켰다. 크큭.]
일순 즐거움을 품은 목소리들은, 다시금 진지함을 품었다.
[성공해라.]
[너만큼은 실패하지 마라.]
[그것이 우리의 바뀐 숙원이다. 대마도사 루카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뇌존이 없앴던 반푼이 루카스들. 그러나 부서진 건 자아뿐이며, 그들이 갖고 있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힘을 눈앞의 루카스가 흡수했다. 모두 온전히 받아들였다.
“백, 천, 만. 아니. 그런 단위 수가 아니야. 하하하!”
뇌존이 환희에 찬 광소를 터뜨렸다.
“이 미치광이 녀석! 대체 얼마나 되는 ‘자신’을 삼킨 거냐? 그런데도 자아를 유지하다니! 부서지지 않았다니!”
“…….”
“그래! 네놈은 날 이용한 거였구나! 나를 이용해 수많은 ‘루카스’를 죽이고, 주인 없이 떠도는 힘을 네가 흡수하려는 거였어! 크하하! 이거 기분 좋게 당했군!”
루카스가 주먹을 억세게 쥐었다.
“그래서 어떤 기분이지? ‘모든 루카스’를 내면에 받아들이고, 그들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뇌가 녹을 것만 같은 쾌락… 아니. 이런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중독적인 충만감을 느끼고 있겠지! 이거 부러운데! 나로선 느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일 테니까!”
“…나는.”
루카스가 짓씹듯 내뱉었다.
“이걸 충만감으로 느끼지 않아.”
물론 여태까지 느낀 적 없는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건 분명하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한 ‘녹여내지 못한 힘’. 루카스는 항상 그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녹여내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것이, 다음 단계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는 전제조건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모두 녹여냈다. 뇌존의 말대로 그의 힘을 역이용했고, 결국 온전히 흡수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지금 기분을 충만감이 아닌 상실감이라 부르고 싶었다.
…조용했다.
엄청난 활력이 감도는 몸뚱이와 달리, 머릿속은 지독하리만큼 조용했다.
합일 때와는 명백히 다르다. 그때도 소란스럽진 않았으나 ‘루카스들’의 기척은, 존재감은 분명 느껴졌다.
지금은 아니다.
목소리도, 기척도, 존재감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그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아마 막 폐기장에서 나설 때의 루카스라면 결코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겠지.
뇌존도 마찬가지다. 그는 루카스를 이해 못 한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보여야 할 건 말이 아닌 행동이다.
알량한 잣대로 ‘우리’를 모욕한 절대자의 콧대를 철저히 뭉개 버리는 것이다.
모욕을 감내하지 않는 건 모든 루카스의 공통점이니까.
“…호오.”
뇌존이 바뀐 태도를 보며 감탄했다. 루카스는 천천히 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수많은 루카스를 죽이고도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실제로 만전의 상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티를 내지 않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여태껏 내가 죽인 모든 ‘루카스’보다 네놈 하나가 더 까다롭겠군.”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이러한 판단도 정확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마지막 싸움인가?”
“그래. 그러니 이번엔 한번 가려 보자.”
“뭘?”
“위, 아래를.”
뇌존이 멍한 얼굴을 하더니 크게 광소를 터뜨렸다.
“…크크큭! 크하하하!”
뇌존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늘에 다시금 먹구름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꽈르릉!
망가진 초원에 벼락이 내려친 순간, 마지막 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