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18화
[…….]
뇌존이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자 공기가 침체되었다. 상황을 관조하던 양인현이 슬그머니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빈사에 이르렀음에도 내보이는 기백엔 여전히 특유의 위압감이 도사리고 있다.
뇌존의 본체가 아무런 상처 없이 건재하기 때문인가?
단순히 내재된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군림자란 존재가 오랜 세월을 거듭하여 쌓은 풍모, 연륜, 그리고 존재 자체가 가진 내력. 그러한 요소가 아울러 자연스럽게 내뿜는 분위기.
그 결과 숙주의 표정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일대의 분위기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위험한 놈이야.’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양인현은 뇌존의 목을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줄곧 참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선 한순간의 충동보다는 약속이 우선이다.
[루카스 트로우맨.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인다. 지금의 나라면 뇌존의 정신장악에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만에 하나의 상황엔 머릿속에서 몰아내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러니 우선은 이종학의 몸에서 뇌존부터 빼내고 보자…….]
“…….”
[어설프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싸늘한 목소리에 루카스는 얼굴의 웃음기를 지웠다. 내심을 정확히 읽힌 것인가? 모르겠다. 그래서 흥미롭다고, 양인현은 생각했다.
이 두 명은 아주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고, 지금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몸에 들어오라고 도발하는 수수께끼의 마법사, 루카스.
그 태도에 어처구니없음을 보이는 천둥우레의 뇌존.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수 싸움에선 승자와 패자가 뚜렷하게 나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이 패자가 될 거라곤 손톱만큼도 의심하고 있지 않다.
‘궁금하군.’
둘 중 정말 우위에 서 있는 건 누굴까.
“답지 않게 혓바닥이 길어. 확신이 서지 않는 거냐? 내 위에 군림할 수 없을까 봐.”
[어설픈 도발이지만, 그래. 응해 주겠다. 그 또한 강자가 갖춰야 할 품격이니까.]
그 말에 루카스는 다시 미소를 지었으나,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자.
일단 미끼는 물었다. 여기까지는 계산대로다. 군림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결코 도발을 무시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앞은 미지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함정을 판 루카스조차도 알 수 없었다.
루카스는 양인현을 바라봤다.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만, 우선은 첨언 없이 관조의 태도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듯하다.
“이제부터 뇌존을 내 몸 안으로 부를 거다.”
“그런 것 같더군.”
“만약 내가 놈에게 지배당할 것 같으면 죽여 줘.”
양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었다.”
화산에 산적한 모든 위협거리를 배제하는 게 양인현의 역할이다. 양인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뇌존이 루카스란 숙주를 손에 넣으면 얼마나 끔찍한 존재로 변모할지. 호랑이에 날개 수준이 아니다. 아마 대등하게 싸우려면 최소 십이허주 셋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존재가 활보하도록 놔둘 생각은 없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보인다면, 양인현은 망설임 없이 루카스의 목을 벨 생각이다.
[대놓고 말하는군.]
“뻔한 이야기잖나. 숨길 가치도 없지. 아니면 군림자 나리 앞에선 밀담을 나누는 게 예의에 맞는 거였나?”
[…변했군.]
뇌존이 중얼거렸다.
[넌 정말 다변적인 존재다, 루카스 트로우맨……. 신기해. 절대자가 되고서도 너만큼 격렬하게 변화하는 존재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
[세디 글라스턴, 아니. 세디 트로우맨도 그랬지. 비록 격락당했어도 그녀의 의식은 여전히 절대자에 머물러 있었을 터. 그런데도 너와 관여된 이후에 그녀는 변했다.]
“어쩌면.”
루카스가 조용히 말했다.
“너도 변할지도 모르지.”
[…….]
“이제부터 나와 연관될 테니까.”
[…크. 크하하.]
뇌존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그럼 난 너를 고정시키겠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존시켜 주지. 자, 그럼.]
뇌존이 말했다.
[준비해라.]
후우……. 루카스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신의 방벽을 느슨히 만들었다. 다른 누군가의 침입을 쉽게 허용하도록.
파지직!
이종학의 몸에서, 문자 그대로 번개처럼 무언가 튀어나왔다. 푸른색 뇌전은 창 같은 형태가 되어 루카스의 몸을 관통했다.
“……!”
전신이 뇌전에 꿰뚫린 듯한 감각, 이 아니라 실제로 꿰뚫렸다. 실없는 생각과 함께 루카스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 * *
루카스는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초원 한가운데 있었다. 발목까지 자란 풀잎이 기분 좋게 살랑거리고 있다. 시간은 밤이었고, 하늘엔 무수히도 많은 별빛이 일렁였다.
“…과연.”
이곳이 심상세계인가.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번엔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다른 존재가 서 있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대뜸 물었다.
“이건 무슨 장난이지, 루카스 트로우맨?”
당황한 건가? 평소와 달리 표정으로 파악할 수 있어서 좋다. 이제야 대등해진 느낌이랄까.
루카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눈높이를 맞춘 거지, 뇌존.”
육신을 갖게 된 뇌존은 그 말에 침묵했다. 사실 겉모습은 사람보단 뇌신, 번개를 부리는 신에 더 가깝다. 평범한 인간보다 체구가 3배는 컸고, 눈매는 흉맹하다. 번개처럼 뻗친 머리카락, 한 손에는 손도끼를 쥐고 있다.
“이곳은 나의 심상세계다. 어쩌면 퍼스널 스페이스 이상으로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곳이지. 그래서 너의 모습도 바꿨다. 긴 싸움이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 편이 보기 좋을 것 같더라고.”
“…….”
“음.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뇌존’의 이미지는 대강 그런 느낌인 모양인데.”
“…과연.”
뇌존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픽 웃었다.
“유니크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군.”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야.”
“큭큭큭…….”
뇌존이 숨죽여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다. 쿠르르, 하늘에 먹구름이 몰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에서도 확연히 포착될 만한 변화였다.
루카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뇌존은 더욱 짙게 웃었다.
“너의 세계에서, 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에 놀랐나.”
“…….”
“주도권을 네가 쥐고 있다고 착각한 모양이군. 날 육신이란 그릇에 가뒀다고 여긴 모양이고. ─모두 틀렸다.”
우르릉……. 몰려온 암운에 뇌전이 꿈틀거렸다. 그건 마치 뇌존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깟 육신, 지금 당장이라도 찢고 나갈 수 있다. 내겐 어렵지도 않은 일이지.”
“…….”
“하지만 그러지 않겠다. 딱히 네가 준 선물이 마음에 든 건 아니야. 그저 이 모습으로 널 짓누르는 편이 좀 더 효과적이라 생각이 들었을 뿐. 자, 루카스 트로우맨. 네가 상상한 나의 싸움 방식은 어땠나?”
루카스가 무언가를 떠올린 순간이다. 뇌존이 픽 웃었다.
“만뢰萬雷라. 빈곤한 상상력이군. 하지만 채택해 주지.”
꾸욱. 뇌존이 뻗은 손을 쥐었다.
그리고 만 줄기의 번개가 내려쳤다.
꽈과광!
폭음이라고 부를 만한 스케일이 아니다. 아마 세상 반대편까지 들리지 않을까 싶었다.
어둠에 잠겨 있던 초원이 순식간에 확 밝아졌다.
“큭…….”
루카스는 자신의 안구가 타 버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직접 당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바라본 것만으로 이 지경이 되었다. 의지력으로 타 버린 안구를 재생시켰다. 심상세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뒤 오롯이 서 있는 뇌존을 향해 마법을 무더기로 쏘아댔다.
“저런 건 시간벌이도 못 돼. 이제 좀 다른 전법을 쓸 때가 되지 않았나?”
기척이 사라졌다고 여긴 순간, 목소리가 배후에서 들려왔다.
당황하지 않았다. 놈이 초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단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으스대듯 후방을 점할 거란 확률이 높다는 사실도. 빠악! 뇌존의 고개가 하늘을 향해 쭉 올라갔다. 순식간에 허리를 숙인 루카스가 뒷발로 놈의 턱을 발로 차올린 것이다. 물론 3미터를 가볍게 넘는 몸뚱이라 루카스의 몸은 잠시 공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뇌존이 팔을 뻗으려고 할 때, 그대로 몸을 회전시킨 다음 옆구리를 걷어찼다. 좌아악, 뇌존의 몸이 반쯤 타버린 들판에 미끄러졌다.
“핏물을 내뱉는 감각은 어떠신가?”
“…크큭.”
뇌존은 흐르는 코피를 닦지도 않은 채 거리를 좁혔다. 츠즛, 다시 한번 초고속이동.
꽈앙!
뇌존의 손도끼, 그리고 루카스의 검이 충돌했다. 뇌존은 갑자기 드러난 루카스의 검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뒤늦게 그의 허리춤에 칼집이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육신을 뇌류雷流로 변환시키는 거군. 뒤에 남은 뇌전의 잔상은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인가?”
“서비스다. 이런 전조마저 없다면 넌 내 공격을 못 읽을 테니까.”
“아직 여유가 있군, 뇌존.”
루카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전력 차이는 명백하지. 하지만 명심해라. 질척대고, 물고 늘어지는 건 루카스의 특징이야.”
“뭐?”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루카스가 표정을 굳히고,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 * *
루카스의 선언은 진실이었다.
녀석은 끈질겼다. 상상보다 훨씬 끈질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승기는 이쪽에 있었다. 그런데도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질척대는 게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하지만 결국 이거다.
루카스의 발버둥은 정해진 결과를 아주 조금 늦추는 것에 그쳤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않나.”
뇌존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나를 이길 거라 여긴 건 아니겠지, 루카스 트로우맨.”
하얗게 타 버린 루카스가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으나 그게 전부다.
결국 루카스는 뇌존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루카스의 육신은 재가 되어 흩날렸다. 완벽히 박살 난 정신은 다시 재생하지 못했다. 이러한 풍경은 뇌존의 힘이 그의 의지력을 완전히 부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예상 밖이었다. 뇌존은 루카스를 손대중할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녀석은 필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그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다.
정신이 산산조각 났으니 이종학 같은 방식으로 의태하는 건 불가능하다. 군림자의 기척도 완전히 숨기진 못할 것이다.
어쩌면 냄새를 맡은 4기사, 혹은 또 다른 십이허주가 귀찮게 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종학 같은 필멸자가 아닌, 루카스 트로우맨이란 그릇이다. 이 몸이라면 자신의 힘 또한 어느 정도 버텨내는 것이 가능하다.
즉 사용할 수 있는 힘의 한계치가 아득하게 늘어난다.
뇌존의 계산대로라면, 의식을 회복한 직후 자신의 목을 베려는 양인현의 검격을 막는 것 또한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휘오오─
바람이 한차례 불었고, 루카스였던 잿더미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제 이 심상세계는 붕괴할 것이다. 그리고 뇌존의 사념은 루카스를 구성하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뇌존은 한 가지 위화감을 느꼈다.
바람?
왜 바람이 불었지?
이곳은 루카스의 심상이 구현된 세계다. 당연히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루카스의 의식이 소멸함에 따라, 이곳도 자연스레 붕괴해야 한다.
뇌존이 주변을 둘러봤다. 세계는 무너질 전조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방금 전 태연하게 바람 한 줄기까지 불었다.
[네가 이겼다.]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다.
“루카스 트로우맨?”
[적어도 1회전은.]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 거냐? 어떻게?”
[다음을 준비해라, 뇌존. 휴식시간 같은 건 필요 없겠지?]
“다음이라고?”
뇌존이 반문한 순간이다.
꽈앙!
옆에서 마법이 날아왔다.
“…음.”
갑작스런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다. 뇌존은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채 비틀거렸다.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말했잖아. 긴 싸움이 될 거라고.”
루카스가 빙긋 웃으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 지루함이란 감정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른다면 지금부터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자. 그럼.”
가벼운 손짓,
그에 따르듯 수십 개의 마법이 발현되었다.
“2회전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