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17화
철창 너머에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방금 전, 용소한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작지만 분명한 소란이 일어났다. 비록 지친 상태라고 해도 이종학 정도의 실력자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희미하게 눈을 뜬 이종학이 양인현을 바라보고, 그다음 루카스를 바라본다. 무표정한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은, 어떻게……?”
스팍!
동시에 양인현이 발검을 마쳤다.
쇠창살과 함께 이종학의 허리가 잘려 나갔다.
“……!”
이종학이 부릅뜬 눈으로 양인현을 바라봤다. 잘린 사과처럼, 그의 몸뚱이는 허리 위부터 미끄러지기 시작하─
파지직!
─려는 순간, 상처 단면에서 뇌전이 꿈틀거렸다.
촥. 미끄러지던 허리가 갑자기 정지했다. 기괴한 광경이다. 마치 어긋난 사진처럼, 허리를 경계로 분단되어 있다.
[하하하! 크하하하!]
그리고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뇌옥에 울려 퍼졌다.
잘린 허리가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움직임을 거스르더니 다시 이어졌다. 상처를 재생시킨 게 아니다. 단순히 전자기력을 이용해 단면 부분을 흡착시켰다.
“알고 있는 사이였나?”
뇌존과의 관계를 묻는 게 아니다.
이종학. 양인현이 그의 허리를 베기 직전, 그는 루카스를 보고 안면이 있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루카스는 잠시 말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곧바로 질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양인현은 휘몰아치는 뇌전의 폭풍을 앞에 두고도 눈도 깜박하지 않고 있었다. 우선은 대답해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렇군.”
양인현은 더 이상 캐물어오지 않았다.
그건 루카스와 이종학의 관계에 별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부턴 더 이상 잡담을 나눌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루카스는 결론에 앞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양인현은 힐끗 자신의 검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 이종학의 허리를 양단했던 검이었지만 그곳엔 핏자국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내 공격이 얕았나?’
양인현은 스스로 물어본 다음 조용히 부정했다. 그렇지는 않았다. 그의 검은 확실히 이종학을 두 동강 냈다. 감촉 또한 확실했다.
그러니 의심해야 될 건 자신의 검이 아닌, 눈앞에 있는 존재 그 자체다.
“천둥우레의 뇌존.”
지식으로서만 접한 존재.
바깥 우주의 최강자, 마주하게 되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투쟁심이 꿈틀거린다.
‘부딪치고 싶다.’
이 존재에게, 자신의 매상검을 시험해 보고 싶다.
훅.
뇌옥 전체를 떨리게 만들었던 뇌전의 폭풍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단순히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 가공할 만한 힘은 모두 뇌존의 내부에 짙게 응축되었다.
[나에 대해 알고 있군. 반갑다, 쓰레기장의 주인이여.]
파지직, 꿈틀거리는 뇌류가 눈동자를 통해 흘러나왔다.
[방금 전 네가 선보인 검술, 대단한 수준이었다. 너 정도의 검사는 나도─]
당연하지만, 루카스와 양인현의 목적은 대화 따위가 아니었다.
뇌존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돌연 쏘아져 나간 마법이 그의 전신을 덮쳤기 때문이다. 꽈과광! 폭발음과 함께 뇌존의 형상이 흙먼지에 묻혀 버렸다.
물론 루카스가 쏘아낸 마법이었다. 그는 양인현을 보며 말했다.
“흠집도 못 냈을 거다.”
“그렇겠지.”
“진형은?”
“내가 앞. 너는 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군.
[루카스, 트로우맨─!]
뇌존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를 토해내며 흙먼지를 뚫고 비상한다. 일말의 환희마저 섞인 외침이다.
피부가 저릿할 지경이다.
왠지 모르게 첫 번째 데미갓을 토벌할 때가 생각났다. 양인현이 이쪽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루카스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토벌전, 어떻게 됐더라?’
그야 물론 성공했겠지.
루카스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짧은 뇌존전雷尊戰이 시작됐다.
* * *
‘극소시간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보이드엔 한계가 존재한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이드는 허의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에너지다. 당연히 수급엔 제한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극소시간대’에선 보이드를 보충하는 행위조차 더뎌지게 된다. 물론 그 밖의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일단 그 세계를 극소시간대라 정의 내리긴 했으나, 루카스의 해석이 틀렸을 가능성도 존재하니까. 어찌 됐든 루카스는 그 세계에서 입문자의 위치인 것이다.
‘보이드를 원래 속도로 수급하기 위해선, 한 번은 그 시간대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루카스는 그러한 행위가 수면에 잠수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느꼈다. 당연히 보이드의 역할은 산소이며, 오직 잠수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리엔 한계가 있다.
시간이 길든, 짧든 한 번은 수면 밖에 내밀고 크게 심호흡을 해야 한다. 산소의 보충은 선택이 아닌 필수란 뜻이다.
이는 분명 커다란 제약이고, 약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명이라도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앞에 있다면, 루카스의 싸움은 몇 배는 편해질 것이다.
양인현은 빗발치는 뇌류를 흘려내며 뇌존과의 거리를 좁혔다. 우선은 매화검법을 중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전히 굉장한 몸놀림이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건 검 끝을 마치 피뢰침처럼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심한 컨트롤과 한 점 흐림 없는 집중력, 무엇보다 심대한 배짱이 없다면 시도조차 못 할 기예다.
‘그럼 나의 역할은?’
후방지원인가?
검사가 전방, 마법사는 후방.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그딴 정형화된 전법으로 상대할 존재가 아니다.
루카스는 수십 개의 마법을 동시에 전개했다. 속성과 경지에 따른 분류는 의미가 없다. 어차피 보이드를 원천으로 사용하는 마법이라면, 그 위력은 대동소이하다. 증폭마법을 쓰거나, 혹은 한 개의 마법만을 시전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그러니 신경 써야 할 건 질이 아닌 양이다.
쏘아져 나간 수십 개의 마법이 분수대의 물처럼 나뉘었다. 마법은 애초에 전개된 수보다 몇 배는 많은 갈래로 흩어진 다음, 제각각 다른 위치에서 뇌존을 향해 쏘아져 갔다.
[하하! 이건 마법이더냐?]
뇌존이 웃음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방출된 뇌전이 갈라진 마법과 거세게 충돌했다. 속성이나 위력은 관계없었다. 대부분의 마법은 뇌전과 맞닿은 즉시 얼음처럼 부서졌고, 부서진 파편은 사방으로 튀겼다. 그 경로엔 양인현도 있었다.
양인현은 검을 휘두르지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 마법은 그의 육체에 닿기 직전 사라졌다. 은연중에 뿜어대는 무형의 강기罡氣만으로 파훼한 것이다.
그리고 뇌존과 양인현의 검이 충돌했다.
꽈앙!
시간이 흐릿한 세계에서 분명 거대한 폭발음이 들린 듯했다. 그건 공간이 부서지며 나온 폭음이었다. 절대자는 두 자루의 검으로 수십 차례 검격을 교환했다. 그에 따라 화산이 내지르는 비명도 점차 커져 가고 있었다.
‘오래 끌어선 안 된다.’
이 싸움의 여파가 영지를 손상시키기 전에 끝내야 된다. 애초에 양인현과의 거래 조건이 그랬다. 어기게 되면 양인현이 어떻게 나올지 미지수다.
계산한다.
절대 좌표, 그리고 상대 좌표를 동시에 머릿속에 욱여넣는다. 양인현과 뇌존은 쉴 새 없이 교전을 이어 가고 있다. 웬만한 수준의 절대자도 읽을 수 없는 수 싸움이 암중에서 난무하고 있다.
루카스는 그걸 읽어야 된다.
얼마 전까지의 자신이라면 헛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이 싸움을 읽으라고?
십이허주 양인현과, 군림자 뇌존의 싸움의 흐름을?
무리다. 두뇌가 백 개는 더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루카스는, 백 개 이상의 두뇌가 있었다.
그러니 읽을 수 있다. 계산할 수 있다.
그들의 검이 어떻게 움직일지, 시선은 어디로 향할지, 발이 내디딜 장소가 어디인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리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강해졌으니까.
그리고 ‘루카스’들의 연산 보조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뇌존이 한 발자국을 내디딘 순간이다.
쑤욱!
돌연 그의 오른발이 밑으로 푹 꺼졌다. 지면이 사라진 게 아니다. 루카스가 그곳에 만들어둔 공간의 입구를 만들어 놨다.
뇌존은 자신의 움직임을 읽혔다는 것보단, 이토록 은밀히 공간을 전개해 놨단 사실에 놀랐다. 급히 발을 빼려고 했으나 늦었다. 콱. 공간은 순식간에 턱을 닫으며 뇌존의 철수를 방지했다.
그리고 양인현은, 당연하게도 그러한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푹! 검이 뇌존의 단전을 꿰뚫었다. 순간적으로 몸에 힘 쭉 빠졌으나, 뇌존은 탈력감과 고통을 무시한 채 양인현을 향해 검을 뻗었다.
그 공격 또한 빗나갔다.
양인현이 피한 게 아닌, 허공에 나타난 공간이 그의 검과 오른손을 삼켰기 때문이다.
[음…….]
뇌존이 침음을 흘린 순간, 남은 팔과 다리에도 공간이 나타났다. 그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육체로 허우적대며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반신半身이 마비당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다. 전력은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깎였다.
콱. 출현한 공간이 나머지 팔다리를 삼켰고, 뇌존은 눈 깜박할 새 사지 전체가 속박당한 꼴이 되었다.
‘자른 게 아니군.’
양인현이 눈가를 좁혔다. 공간은 다만 뇌존의 팔다리를 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외견적으로는 마치 팔다리가 모두 절단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공간 너머엔 멀쩡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즉 루카스의 목적은 뇌존의 죽음이 아니다.
“포획 완료, 인가.”
루카스가 그리 중얼거리며 뇌존 옆에 착지했다. 양인현이 힐끗 그를 보았다. 이미 승부는 결정 났다. 의외로 손쉽게 결판이 난 듯하지만, 양인현은 루카스에게 크게 감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수, 즉 뇌존의 오른발이 공간에 집어삼키게 됐을 때 이미 승부는 결정 났다. 그 첫 수가 가장 중요하고, 또한 말도 안 되게 까다로웠다.
뇌존과 양인현은 요란한 싸움을 이어 갔다. 당연히 한자리에서 오래 싸울 일도 없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좌표, 그런 상황에서 뇌존의 다음 동작을 예측하기 위해선 뇌존은 물론이고 양인현의 심계까지 완전히 엿봤어야 됐다.
한 번으로 성공해야 된다. 두 번은 없다. 실패하게 되면 뇌존의 주의는 루카스에게도 뻗게 되니까.
어처구니없는 일, 실소가 나올 것만 같다.
이 남자는 제3자의 입장에서 싸움의 흐름을 완벽하게 읽어냈다.
[흠.]
뇌존은 가라앉은 눈으로 루카스를, 그리고 양인현을 바라봤다.
[사지를 속박당했고 단전을 꿰뚫은 검 때문에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군……. 이 상태로 ‘우레’를 쓰는 건 안 되겠어.]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 싸움은 내 패배군.]
순순히 인정하는 듯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는.
루카스는 뇌존을 바라봤다.
줄곧 생각했다. 이종학에게서 뇌존을 떼어낼 방법을.
아마도 지금부터 할 짓은 분명 미친 짓에 가깝겠지. 그래도 가장 성공할 확률이 높은 미친 짓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루카스는 결심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이종학을 해방시켜 줄 수는 없나?”
[…….]
“너의 계획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 허의 세계에 영향력을 행세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걸 수행하기에 이종학은 너무 약해.”
[그렇지.]
뇌존이 히죽 웃었다. 핏물이 새하얀 이를 물들인 광경이 보였다.
[하지만 거절하겠다.]
“이유는?”
[깊은 이유는 없어……. 그냥 이렇게 나오는 편이 널 좀 더 절망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종학의 죽음으로 일그러진 네 표정이 보고 싶다고 할까. 그리고 루카스 트로우맨…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르다고?”
[네가 강해진 건 분명하지만, 난 뇌존이다. 천둥우레의 뇌존이라고.]
뇌존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아직 넌 내게 협상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어쩌면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루카스는 뒤늦게 자신의 제안 자체가 뇌존에게 있어 큰 모욕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일반적인 관점에선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으나, 진실이 그렇다.
사실 이러한 흐름은 양인현 때와도 흡사하다. 만약 루카스가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했을 때 양인현에게 협력을 제안했다면 그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이종학과 함께 날 죽이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난 결코 이 몸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왜? 그편이 더 재밌을 테니까. 큭큭큭.]
“…….”
[그냥 죽이라고, 루카스 트로우맨. 너와 이 남자는 별거 아닌 인연이잖나? 내가 알기로 둘 사이엔 모종의 갈등도 있었던 것 같고.]
그 말이 맞다. 이종학은 루카스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선 증오했다.
그리고 과거의 루카스는, 그의 증오를 이해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종학은… 대단한 남자였다. 비록 그는 자신을 싫어했지만, 루카스는 그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선 일종의 존경심마저 가지고 있을 정도다.
“멍청하군, 뇌존.”
[흠. 어떤 점이?]
“이종학보다 더 강한 숙주가 있는데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득을 포기하려 들고 있지 않나.”
[양인현 말인가? 확실히 이종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겠지만 안 돼.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 또한 바깥 출신이지만 육체가 이미 허의 세계에 너무 깊게 물들었지. 억지로 지배하려 들었다간 육체가 붕괴할 것이다…….]
“그렇게 두지도 않을 테지만.”
양인현이 조용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뇌존은 루카스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었다.
“양인현을 말하는 게 아냐. 눈앞에 있지 않나? 바깥에서 막 도착했고, 네놈들 군림자가 끝없이 탐을 내던 존재가.”
[…네놈, 설마.]
마왕은 루카스의 육체를 탐냈었다. 즉, 군림자가 루카스의 몸뚱이에 들어오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 제안도 가능할 것이다.
“내 몸에 들어와라, 뇌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