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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314화 (535/857)

외전 314화

“…청기사.”

마왕이 중얼거렸다. 여전히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페일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검을 붕붕 휘둘렀다. 뻐근한 관절을 푸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그로 인해 휘몰아치는 기류의 소용돌이는 심상치 않다.

“기분 나빠.”

입가의 곡선이 짙어진다.

“나랑 만난 적 있어요?”

“아니.”

“근데 왜 아는 것처럼 굴어요?”

“…….”

마왕은 침묵했다. 페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잇는다.

“아직 갑옷도 안 입었는데 날 청기사로 불렀잖아요.”

“피차 마찬가지지. 너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않나.”

“모르는데요.”

그러자 마왕이 손가락을 뻗었다. 그곳에서 뻗어 나온 검은 가시가 엄청난 속도로 페일을 향해 뻗어 갔다.

스칵, 페일이 검을 휘둘러 가시를 잘랐다.

“내 소개는 이걸로 충분하겠지.”

“검은 가시라?”

킥킥, 페일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 가시의 마왕.”

“그게 나의 진명이지.”

“당신 정체는 사실 관심 없고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못 들었어요.”

“끈질기군.”

마왕의 목소리에 미약한 짜증이 어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화제인가. 이토록 물고 늘어질 만큼?”

“그야 물론. 이딴 검은 가시, 보여 줄 필요도 없어요. 디먼시오를 뚫고 나온 가시를 바깥에서 봤거든요. 그걸 보는 순간 여기 누가 있는지 단숨에 깨달았죠. 게다가 지금도 봐요. 당신은 몸 주변에,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 힘을 두르고 있잖아요.”

“고작 그것만으로 확신을 한다……. 군림자가 어떤 존재인지 한 번도 접한 적 없으면서?”

페일과 마왕은 언뜻 언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그건 언쟁이 맞았다.

그러나 그들의 언쟁은 루카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그극-

이미 싸움은 시작됐다. 이들의 기 싸움은 공간 그 자체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다. 물론 루카스는 누군가 방출한 기로 공간이 어그러지는 걸 몇 번 본 적 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시각적 착각일 뿐이다. 사막의 아지랑이가 도시에 물결이 치는 것처럼 착각시키듯, 그들이 방출한 기 또한 실제 공간에 영향을 준 건 아니다.

이들은 다르다.

페일과 마왕이 방출한 기는, 정말로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기세를 조금 더 높이면 이 자리에 작은 블랙홀이 다수 생성될지도 모른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난 당신네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아주 옛날부터 관찰했거든요.”

“엿봤다는 말을 우아하게 포장하는군.”

“엿봤다, 라…….”

페일이 빙긋 웃은 순간.

“맞아요. 난 엿봤어요. 그런데요.”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당신은 그러면 안 되지.”

“…….”

“이봐요. 마왕. 아직 모르겠어요? 엿보는 건 패배자의 특권이라고요. 우리는 너희들이 있는 곳을 얼마든지 관찰해도 돼요. 분석하는 것도 자유예요. 그런데 그쪽이 그러면 안 되죠. 이건 중대한 룰 위반이라고요.”

마왕의 표정이 묘해졌다. 군림자인 그조차 페일의 막무가내엔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는 걸까.

“지금 당신 꼴을 봐요. 쓰레기통이라 업신여기던 곳을 철두철미하게 분석한 다음 살금살금 기어 들어와서, 우리 몰래 비열한 계획이나 짜고 있네요?”

“…….”

“난 잘 모르겠어요. 그런 모습 어디에서 군림자로서의 품격을 느껴야 하는지! 으음. 아님 여기랑 그쪽이랑 군림君臨이란 뜻이 좀 다른가?”

그리고 페일은 아마도, 전 우주를 통틀어 누구도 해내기 힘든 일을 달성했다.

마왕의 얼굴을 일그러뜨린 것이다.

“…신선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구나. 덕분에 한 가지 알게 됐다. 아무래도 난 모욕엔 내성이 별로 없는 모양이야.”

“아하하.”

루카스는 서로 마주 보고 선 두 명을 바라보았다.

‘어느 쪽이지?’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강하지?

개인적 판단으로는 페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종학의 몸을 장악한 뇌존과의 싸움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대는 뇌존이 아닌 마왕이며, 머물고 있는 존재 또한 이종학이 아닌 세디였다. 이종학과는 수준이 다른 존재, 당연히 마왕이 낼 수 있는 출력도 훨씬 더 강할 것이다.

‘나만 해도 그래.’

지금의 루카스라면 뇌존 이종학을 상대로는 5할 이상의 승률을 가질 수 있으나, 마왕에게는 압도적인 격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마왕은 나와의 싸움에서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도 진짜 힘을 드러낸 건 딱 한 번.

루카스가 사용한 극대증폭마법을 꿰뚫은 ‘고통의 가시’를 사용했을 때다. 확실히 그때 체험한 위력은 여태껏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을 만큼 파괴적이었고, 그 후폭풍에서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고통의 가시’라는 수식어에 걸맞다. 지금 이 순간에도 루카스는 두뇌가 타버릴 것 같은 격통 때문에 깊게 생각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좋아요. 이제야 서로가 서로에게 적절한 증오를 갖게 됐네요. 그럼, 쓸데없는 얘기는 이쯤 해두고.”

촤르륵, 페일의 몸을 청색 갑옷이 감싸기 시작했다.

“시작할까요?”

투구가 덮이기 직전, 그녀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리고 둘의 형체가 사라지기 직전.

‘──.’

루카스는 자신이 중대한 기로에 섰음을 느꼈다.

선택에 앞서 우선 몸 상태부터 점검한다.

…여전히 좋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 체내 깊숙이 박힌 ‘고통의 가시’가 영 거슬리는 상태다. 이 가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루카스의 생명을 서서히 좀먹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뽑아내지 않으면 죽는다. 사실 이미 몸 상태는 엉망이라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긴 하지만.

남은 체력과 심력, 모두 쏟아붓는다면 이걸 뽑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하면 곧 펼쳐질 풍경을 보지 못하겠지.

“…….”

찰나의 갈등, 그러나 루카스는 결단을 내렸다.

‘봐야 된다.’

지금부터 펼쳐질 광경은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볼 가치가 있다.

루카스는 남은 모든 심력을 극소시간대에 진입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자 보이기 시작했다. [극소시간대]에 진입한 두 절대자의 싸움이.

페일이 검을 쥐는 게 보였다. 전신을 빈틈없이 갑옷으로 감싼 모습에선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한 기세마저 가둔 듯하다.

반면 마왕의 전신엔 까만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쏘아져 나갔다.

루카스는 그걸 느꼈다.

무지막지하게 가느다란 가시들, 첫 번째 일격을 당하기 직전엔 제대로 깨닫지 못한 그 가시들이 이번엔 페일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페일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딱히 막으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눈치채지 못한 건가?

아니다. 놀랍게도 가시는 이미 페일에게 닿았다. 루카스는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런데도 페일의 걸음은 여전하다. 조금도 막히는 기색이 없었다. 가시가 그녀의 몸을 둘러싼 갑올 꿰뚫지 못한 것이다.

마치 이쑤시개로 방패를 찌른 것처럼 부서지거나, 아예 휘었다.

‘어떻게 된 방어력이지.’

루카스로선 피할 수밖에 없었던 마왕의 가시를 순수 갑옷의 방어력만으로 막아냈다.

마왕의 눈가가 좁혀졌다. 마치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할 거냐.’

루카스와 세디가 싸웠을 때, 세디는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지금 상황은 반대다.

마왕을 향해 착실히 진격하고 있는 건 페일이고, 마왕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

마왕은 손바닥을 펼쳤다.

콰각, 펼친 손바닥에서 거대한 가시가 튀어나왔다. 그 가시는 분리되지 않고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그대로 고정됐다. 가시보단 송곳이라고 부르는 게 알맞은 모양새다.

그는 반대쪽 손바닥에도 동일한 가시를 생성한 다음, 그 두 개를 몇 번 마찰시킨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흠.”

만족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은 닫음 무릎을 살짝 굽힌다. 그리고 두 개의 가시를 창처럼 앞세워 페일을 겨냥한다.

“…….”

전투 자세로 보이지만 무언가 어설프다.

그러나 마왕이 손바닥으로 뽑아낸 두 개의 가시가 심상치 않다.

‘내게 날린 [고통의 가시]와 동급의 것이다.’

그걸 두 손에 쥔 채 무기처럼 사용하겠다는 저의다. 물론 루카스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카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마왕은 지금, 페일과 육탄전을 벌이려고 한다.

[신기한 모습이군.]

페일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청기사가 되면 그녀는 변화한다.

변화하는 건 단순히 말투인가. 아니면 인격 그 자체인가. 루카스로선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청기사로서의 페일은 말수가 부쩍 적고, 감정 표현도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마왕에게 흥미를 표하고 있다.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고, 관심을 보였다.

‘틀린 선택이 아니란 건가?’

거리를 벌리며 싸우는 것보다 육탄전으로 가는 게 마왕에게 유리하다는 건가.

알 수가 없다. 싸우기 전까지는 그렇다.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둘의 거리는 불과 두 발자국.

생각하지 않아도, 곧 결과가 눈앞에 드러날 것이다.

[…….]

“…….”

마왕과 페일.

군림자와 4기사.

두 명의 절대자가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사상 최대의 육탄전이 시작됐다.

그들의 움직임에 형形은 존재하지 않았다.

검술, 검법, 무술. 그리 부를 만한 유려한 동작은 그곳에 없었다.

지극히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다. 마치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를 헐뜯는 것 같다.

극에 이른 싸움은 가장 원초적인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루카스가 언젠가 했던 어렴풋한 생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초난타전超亂打戰.

피하지 않는다. 물러서지 않는다.

불과 반발자국 거리에서, 두 개의 가시와 한 자루의 검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들의 무기는 서로 맞닿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무기보단 상대의 신체에 닿는 일이 잦았다. 그건 페일과 마왕, 양측 모두가 수비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청색 갑옷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겼고, 그보다 배 이상의 피육이 바닥을 적셨다.

‘이 싸움은…….’

수준이 높은 것인가. 낮은 것인가.

그걸 알 수가 없다.

그들은 근본적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격전에 몰입해 있었다.

그 한 번의 공경게 담긴 거력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인가?

‘아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루카스로선 이 싸움에 담긴 모든 걸 파악할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순하다.

이 광경을 눈에 담아 두는 것. 사소한 거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두는 것.

──.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대에서, 싸움은 점차 가열되어 갔다. 이 싸움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종류가 아니다.

결판은 순식간에, 그리고 허망하게 날 것이다─.

스걱

─란 생각을 한 순간, 마왕의 목이 높이 치솟았다. 분리된 몸통에서 핏물이 뿜어졌다.

결착.

또다시 청기사의 승리.

[…….]

페일은 여전히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절제된 태도로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승부가 났다.

루카스의 예상대로 청기사, 페일이 승리했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갑옷의 파손율이 뇌존 때보다 심각하기는 했지만, 핏물을 보이진 않았고 지친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

루카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마왕은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 패배가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궁금했으나,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잘린 그의 목은 다시금 세디로 돌아가 있었다.

자신의 육신을 바쳐 허의 세계로 왔고, 디먼시오에서 모든 걸 버린 세디 트로우맨은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곧 그녀의 시신은 형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겠지.

“시시해.”

페일이 중얼거렸다.

“마왕과 제법 거창하게 싸웠나 봐요.”

“…….”

“방금 싸우니까 알겠더라고요. 마왕은 적어도 힘의 절반을 아저씨한테 썼다는 거.”

…그건 몰랐다.

그래. 자신에게 쏘아낸 고통의 가시에 절반 정도의 힘을 담았던 건가.

이 사실에 기뻐해야 되나, 아니면 분노를 해야 되나.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얼굴을 보니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린 것 같네요? 뭐, 이미 늦었지만.”

페일이 히죽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직까지 검을 들고 있었다.

그 순간 루카스는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위험하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아무 말이라도 상관없으니 뭔가 대화를 나눠야…….

“페일.”

“네.”

“…….”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페일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픽 웃었다.

“뭐, 말할 필요 없어요. 변하는 건 없거든요.”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 뒤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그그극, 칼끝이 지면에 긁히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히 들린다.

페일은 지금 루카스를 죽이려고 한다.

…죽음은 각오했다.

하지만 이대로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좀 더 발버둥 쳐야 한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좋으니 더 얻는 게 있어야 한다.

“잠깐만. 날─.”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베인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스걱

‘…젠장.’

목이 베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의식이 흐려진다.

원래라면 목이 베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사실 페일로선 루카스를 죽이는 게 쉽지 않을 일이리 것이다. 그녀가 가진 힘의 근원은 허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보이드를 사용하는 루카스에게 결정타를 입히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 루카스는 마왕이 남기고 간 고통의 가시 때문에 보이드를 사용하는 데 차질을 겪고 있었다.

애초에 체력과 심력도 이미 한계였고.

“잘 자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암전했다.

그리고 루카스는 다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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