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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99화 (520/857)

외전 299화

그 악몽 같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영면에 드셨어.”

“뭐……?”

분명 그렇게 반문했을 것이다.

세디는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바라셨던 일이고, 그분 자신의 의지였어. 아무리 제자라도 그 선택을 막을 자격은 없어.”

자신과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그렇게 싫은 녀석은 아니었다. 솔직히 마음에 드는 구석은 별로 없었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접점이 분명 존재했다. 게다가 되돌아 생각해 보면, 세디는 그 여자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을 들었을 때, 세디는 순간적으로 그 여자 민하린을 죽여 버릴 뻔했다.

“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울컥하고 분노가 차오른 이유는 여럿 있었을 것이다.

초탈한 듯한 얼굴과 높낮이 없는 어조. 그 모든 게 민하린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제정신인가?

정말로 이 여자는, 스승의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 이딴 태도를 내비치는 건가?

민하린의 얼굴이 앞으로 확 다가왔다. 다름 아닌 그녀가 그리되도록 만들었다. 세디는 어느새 자신이 민하린의 멱살을 낚아채 끌어당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아버지 어떻게 됐어.”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현실을 부정했다. 예상하는 것과 다른 대답이 나오길 애타게 바랐다.

“죽었어.”

“──.”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꽉 옥죄는 듯한 기분이었고, 머리는 하얗게 물들었다.

그러는 중에도 입은 떠듬떠듬, 반문하고 있었다.

“…죽었다고?”

“응.”

“그래서, 너는… 그걸 그냥 내버려 뒀고?”

민하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아마도 무언가 사정을 떠벌댔을 것이다. 그러나 세디는 납득하지 못했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에 맞춰 시야가 흔들렸다. 어느새 주변이 새까맣게 보이며, 고막이 터진 것처럼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래. 결국 너희들은 살았으니까, 목숨을 건졌으니까 괜찮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입 닥쳐.”

정말로 그랬다면 그딴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심으로 죽음을 바랐다고?

그럼 난?

그 사람한테 있어서, 나와의 인연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던 건가? 죽음을 앞에 두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이었나?

…알고 있다. 결국 딸이란 입장을 강요한 것도 세디였고, 가족이란 타이틀에 목을 매는 것도 세디였다.

그래도 루카스는 그 억지를 받아줬다.

“난 납득 못 해.”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었을 것이다.

드러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아서.

* * *

…머리가 차가워지니 한 가지 알게 되었다.

민하린이라고 해서 슬퍼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분명 세디와 비슷한 통증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리고 부끄럽게도 그 필멸자는 소중한 이의 죽음 앞에서 세디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비록 그게 연기나 가장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분명하다. 세디에겐 그럴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난 스승님의 선택을 존중하고, 납득했어.

기억 속의 민하린은 마치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네가 내린 정답이란 건가?”

루카스의 선택과 죽음을 모두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일이란 말인가?

‘…….’

아니. 그건 아니야.

민하린에겐 정답일지 모른다. 베니앙이라는 여자한테도. 그 외의 다른 제자란 녀석들한테도 그 선택이 올바른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디 트로우맨에겐 아니다. 결코 아니었다.

딸은 아비의 죽음을 이토록 쉽게 납득해선 안 됐다.

“어차피 아버지가 살려 준 목숨이야… 라는, 유치한 소리는 지껄이지 않겠어.”

세디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

그거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그녀가 취할 행동은 철저한 독선이었다. 세디는 우선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루카스를 다시 만나려고 치는 발버둥은, 어떤 속사정이 존재하든 루카스의 선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 * *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포기했다.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으나 목적을 향한 열망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게 기뻤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만약 이 열망이 완전히 사라지면 스스로가 어떻게 되어 버릴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두려웠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목적을 떠올리며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염원하던 걸 이룰 단서를 찾게 되었다.

* * *

따끔하다. 딱 그 정도다.

루카스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앞선 것들보다 아프지 않았다. 그래야 됐는데, 얼얼한 턱이나 욱씬거리는 복부보다 이 뺨 한 대가 가장 사무쳤다.

“트로우맨이야.”

세디는 여전히 변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그런 말을.”

“몇 번이고 말해 주지. 그리고 말이야. 아버지는 연기는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으니까 집어치워.”

“내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시시한 문답도 집어치우고.”

세디는 자신의 손을 매만졌다. 루카스의 뺨을 때린 그 손이었다.

“많은 일을 겪었다는 거 알아. 분명 힘든 일이었겠지. 지금도 그렇게 보이긴 해.”

“…….”

“아까 물었지? 나한테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물론…….”

“날 보고 말해.”

단순히 눈에 담지 말고.

바로 방금 했던 말. 그리고 세디가 삼킨 뒷말.

그 말이 들리는 듯했다.

“고작 말하는 것도 어려워서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거야? 뭐 얼마나 대단하신 일들을 겪었길래?”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세디는 입 끝을 말아 올렸다. 다시 말해 비웃음을 지었다.

“아. 뭐 그냥 작은 의구심이 들어서. 아버지 입장에선 정신이 갈릴 정도의 일이, 사실 그렇게 대단찮은 걸지도 모르잖아.”

“내가 엄살을 부리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진 않았는데.”

머리로는 이해했다. 이건 유치한 도발이다.

루카스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어설프게 자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정도는 루카스도 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는 거냐?”

입술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엔 분명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언제나 가장 원하지 않는 선택만을 강요받는 느낌을 알고 있나? 죽고 싶을 때 죽지 못하고, 살고 싶을 땐 살지 못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상상이라도 할 수 있나?”

“그러셔? 참 힘들었겠네.”

세디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럼 아버지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어? 잊은 건 아니겠지. 전초전에서 멋대로 죽어 버린 일.”

순간적으로 루카스는 말문이 막혔다.

“후련하게 죽을 생각이 들었겠지. 그래. 뭐. 아버지한테 억지로 역할을 강요한 것도 나였으니까. 죽기에 앞서서 나 같은 건 생각조차 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니. 그런 게…….”

“조용해.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아.”

루카스는 입을 닫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죽고 내가 뭔 생각을 한 줄 알아? 그 사람한테 나랑 맺은 인연은 뭣도 아니었구나. 죽기 직전 한 마디 말도 안 남겨 줄 만큼 같잖은 거였구나.”

“…….”

루카스는 그때를 떠올렸다.

노디에소프와 싸우러 떠나기 직전, 이제는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그때, 민하린과 최후의 이별을 마쳤던 순간.

홀가분함만을 느꼈다. 지긋지긋한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 했었다.

세디에 대해선 깊게 고려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이것에 관해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세디의 인상이 더욱 찡그려졌다.

“제길. 그딴 걸 듣고 싶어서 꺼낸 말이 아니야. 감정을 토해 내면 왜 이렇게 유치해지는지. 그냥 난…….”

“…….”

“…옛날에 아버지가 말했잖아. 지금부터 생각하겠다며. 아버지가 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한테 할 수 있는 게 뭔지. 이상적인…….”

세디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이상적인 부녀관계란 어떤 것인지.”

분명 루카스는 그런 말을 했었다.

“난 말이야. 아버지 말대로 했어. 진지하게, 진짜 태어나서 한 번도 없었을 만큼 진지하게 고심했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죽었단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든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

“…….”

“그리고 이게 내 답이야.”

세디는 반 발짝 더 걸어왔다.

그리고 어쩔 틈도 없이 루카스를 감싸 안았다.

“……!”

그건 루카스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온기였다.

“대신 싸워 줄게.”

울컥하고.

목구멍부터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게 뭐든 간에 아버지를 괴롭게 만드는 것들은 내가 다 없애 주겠어.”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 누구도 루카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모두가, 가장 친애하던 벗들마저도 루카스를 기대어야 할 존재로 여겼다. 유일하게 다른 태도를 취했던 카사진마저, 서로를 받쳐 주는 지지대 같은 관계를 원했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업무를 대신 짊어지려고 한 사람은.

루카스는 언제나 누군가의 그늘이었다. 그늘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잊었던, 잊고 말았던 딸이란 존재가 그의 그늘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었다. 대신 싸워 준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그 한 마디에 목이 메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만 해. 그것만큼은, 그 말만큼은 아버지가 직접 날 보고 해줬으면 좋겠어.”

머릿속에 수많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 순간이었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 루카스.]

[왜 망설이는 거지? 설마 저 여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들을 생각인가?]

[안 될 일이다. 우리가 뭐 때문에 네놈에게 순순히 흡수당하고, 힘을 줬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의 책무다. 못 이룬 숙원을 네가,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진 ‘루카스’가 수행해 줬으면 했으니 맡긴 거다.]

여태까지처럼 뇌리를 바늘로 쿡쿡 찌르는 고통이 조금은 희미해졌다. 마치 군중의 웅성거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럼 들어주겠나?”

루카스가 말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러자 세디가 처음으로 헤실거리며 웃었다.

“말해 봐.”

* * *

얘기했다.

루카스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세디에게 말했다.

아까와는 상황이 반대였다. 세디는 드문드문 간결한 물음만을 던질 뿐, 결코 흐름을 끊지 않고 루카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표정에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방에선 루카스의 목소리만이 조용히 울렸으나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맺어졌을 때, 세디가 툭 말했다.

“미안해.”

“…어?”

갑작스런 사과에 루카스가 당황했다.

“아버지가 겪은 일들, 진짜 말도 아니었네. 나까지 생각이 안 끼친 것도 이해는 가. 그럴 여유가 거의 없던 거였어. …젠장. 신이란 놈, 아직 살아 있으면 흠씬 두들겨 패고 싶을 정도야.”

“…….”

“아무튼 오케이. 아버지 요구사항은 잘 접수했어.”

“접수했다니?”

그러자 세디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페일이란 여자가 거슬리고, 비기닝 위저드의 정체가 궁금하며, 왕성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싶다. 더 있어?”

“…….”

루카스는.

스스로가 좀 더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이뤄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중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세디의 입을 통해 정리된 목적은, 생각보다 그리 대단할 게 없어 보였다.

“그렇긴 한데…….”

“좋아.”

세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하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어디 가려고?”

“가장 가까운 거부터 처리해야지.”

“가까운 거?”

“페일. 디먼시오에 아직 있잖아?”

세디가 사납게 웃으며 손가락을 뚜둑거렸다.

“그 여자랑 담판부터 짓자. 마침 나도 신세 진 게 있는 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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