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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97화 (518/857)

외전 297화

사도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기 섞인 눈으로 세디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의 눈동자에선 딱히 적대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턱을 괸 채, 무심하기까지 한 태도로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은?”

대답하는 대신에 그리 물었다.

소녀는 빨간 눈동자로 카사진을 보았다. 사실은 문을 부수고 들어온 시점부터 그랬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소녀는 이곳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 넘기며 대꾸한다.

“세디 트로우맨.”

“…트로우맨?”

카사진으로선 반응할 수밖에 없는 성姓이다.

그의 눈동자가 꿈틀거린 순간 소녀, 세디는 그보다 훨씬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뭔데? 어디서 들어 보기라도 했어?”

“…마침 내가 알던 사람이 같은 성을 갖고 있긴 했지.”

세디의 눈이 반짝였다.

“호오. 그자의 이름은?”

“루카스.”

“──.”

세디와 가장 근접해 있던 사도 둘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일순간 냉기가 전신을 훑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현상이 세디의 기분이 변심하며 벌어진 것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그들의 얼굴엔 굴욕이 자리 잡았다.

“짜증 나는 여자를 뒤쫓다 여기까지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었네. 거기 앉아서 거들먹거리는 양반? 넌 알고 있는 걸 내게 다 불어 줘야겠어.”

“너, 루카스랑 무슨 관계냐?”

세디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고.

“딸내미.”

“──.”

반면 카사진은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 이후엔 자신이 들은 게 틀리지 않았는지 다섯 번 정도 곱씹었다. 물론 귀까지 멀어 버린 건 아니니, 들은 게 잘못됐을 리는 없었다.

…딸?

그 루카스한테 딸이라고?

다시 한번 세디의 외모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별빛 하나 없는 밤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가 확연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흑발적안은 루카스와는 손톱만큼도 연관성 없는 특징이다. 그럼 이목구비는?

…묘하게 퇴폐적인 분위기는 이리스 피스파인더와 흡사하지만, 생김새는 전혀 다르다. 이리스는 인상만 보았을 때는 제법 순한 편이었다. 눈꼬리도 쳐져 있고 입가는 항상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얼굴에서, 상대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화술이 쏟아지는 게 어떤 의미로 공포였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세디의 눈꼬리는 날카롭게 치솟아 있었다. 입가엔 비틀린 미소가 자리 잡았고 언뜻 드러난 송곳니가 그녀의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종합하자면 검은 마녀보다 다섯 배는 사나운 낯짝이란 뜻이다.

즉, 카사진이 생각하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루카스와 이리스의 자식은 아니란 건데…….

“엄마는 누구냐? 이리스냐?”

그래도 우선은 확인 차원에서 물어봤으나.

“누구야 그건.”

단번에 부정당했다.

…일단, 루카스를 이리스가 잡아먹은 건 아닌 듯하다.

그럼 누가 있지?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머리가 아파왔다.

물론 루카스가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눈치가 더럽게 없고 때에 따라선 루시드보다 훨씬 더 진지한 성격에, 연애 세포가 손톱 때만큼도 존재하지 않아서 그렇지, 얼굴도 나쁘지 않고 학술적 지식도 뛰어났다. 거기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러러볼 영웅적 면모까지 갖췄으니 몇몇 여자들에겐 동경과 환심 그리고 사모를 받기도 했다.

물론, 그들의 추파는 채 시행되기도 전에 검은 마녀의 어두운 미소와 함께 자취를 감췄으나, 아무튼.

카사진이 당황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넌 ‘바깥’ 출신일 텐데…….”

카사진도 십이허주가 되면서 우주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신이 살던 고향 우주가 ‘전체’로 보면 사막의 모래 알갱이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허의 세계가 가진 역할 또한 어렴풋이 이해했다.

“바깥이라. 그 여자랑 비슷한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 여자?”

“파랑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지. 그리고 난 파랑색을 좋아하지 않아. 보기만 해도 넌더리가 날 지경이라고. 그래서 지금 아주 기분이 더러워.”

“…….”

파랑색 머리카락의 여자.

…페일. 그녀가 세디를 이곳까지 인도했나?

카사진의 눈동자가 침체되었다.

그렇다면 세디와 자신의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희미하게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가 뭐라고 하던가?”

“여기서 제일 강한 놈을 쓰러뜨리면, 내가 원하는 게 이뤄질 거라던데.”

“…….”

“대문 박살 내고 할 말은 아닌데, 내가 혹시 속은 거야?”

세디가 힐끗 망가진 문짝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사진은 픽 웃었다.

“아니.”

“그거 다행이네. 그럼… 넌 언제까지 앉아 있을 거지?”

“…….”

“일어나. 네가 여기서 가장 강한 놈이잖아.”

세디가 주변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잔챙이랑 싸우는 건 관심 없다고.”

그 발언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둑을 부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섯 명의 사도는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협공한다는 사실에 굴욕은 없었다. 그들은 세디가 아득한 강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도 용인할 수 없었다.

자신들에 대한 모욕 그리고 카사진에 대한 무례를.

“뱀, 염소, 사자, 박쥐 그리고 말?”

세디는 혀를 찼다. 악마들의 생김새는 참으로 개성적이었고, 다르게 말하면 일관성이라곤 없었다. 위협적이진 않다.

오른쪽 발을 살짝 든 다음 그대로 내려찍었다. 단순한 발구르기였으나, 지면이 쿠키처럼 부서지며 금이 갔다.

무너진 바닥, 튀어오르는 돌의 파편. 세디는 그 파편 다섯 개를 낚아챈 다음 악마들을 향해 던졌다.

쐐액, 파편에 담긴 기세는 심상치 않았으나.

‘눈속임.’

다섯의 악마는 그 사실을 동시에 느꼈다.

그렇다면 진짜 노림수는 뭐지?

푹!

관통당하는 소리와 함께 악마들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세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희들로는 안 돼.”

[왜…….]

“시야가 좁거든.”

세디의 발끝에서 뻗어져 나온 검은색 기운이 악마의 육체를 꿰뚫고 있었다. 구덩이가 자랑하는 악마 다섯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킨 것이다.

“끄아악”

[이 무슨…….]

악마들이 허망한 목소리를 내뱉었으나 세디의 태도는 차가웠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걸. 죽기 싫다면.”

카사진은 세디가 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가장 처음 접근했던 두 사도도, 비록 내뻗은 팔은 처참한 꼴이 됐으나 분명 살아 있었다.

“이제 진짜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카사진이 공좌에서 일어났다.

“장소를 옮길까?”

“귀찮아.”

“이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이것만큼은 들어줬으면 좋겠군.”

“…좋아. 근데 어디로?”

“이 영지의 끝. 빛 한 점 들어올 수 없는 구덩이의 가장 밑바닥.”

구덩이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으나, 과거 [0번째 악마]였던 존재와 싸웠던 그 ‘밑바닥’만큼은 그대로 보존했다.

처음엔 그곳에 있는 수많은 조각상 혹은 그 조각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으나, 돌이켜 생각하면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때를 대비해 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굳이 거기서 싸우려는 이유는 뭔데.”

카사진이 대답했다.

“거기서 싸우는 게 관습일지도 모르니까.”

* * *

카사진이 설명을 멈춘 채 루카스의 뒤를 바라보았다. 문이 있는 곳이다.

뚜벅뚜벅-

그 너머에서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카사진의 눈동자에서 긴장된 기색이 느껴졌다.

“위험하군.”

“뭐가.”

“루카스. 우선 숨─.”

말이 끝마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

루카스는 순간적으로 멈칫하고 굳어버렸다.

열린 문 너머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그 소녀는, 세디 트로우맨은 처음 보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을 기초로 한 드레스였는데, 레이스가 거의 없어서 하늘하늘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꽁꽁 싸맨 듯한 느낌도 들었다. 팔뚝까지 감싼 검은 장갑이 그러한 감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낯선 복장이었으나, 그런데도 알아보는 건 무리가 없었다.

특유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만큼은 그대로였다.

“─아.”

루카스는 순간적으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번이고 들었다.

세디가 새로운 십이허주, [0번째 악마]가 됐다는 얘기는.

그렇다면… 세디도 카사진처럼 대부분의 것을 잃었나? 아니, 그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스스로를 ‘세디 트로우맨’으로 자처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 세디는 카사진에게 몇 번이고 패배한 거지? 애초에 패배하고, 잃어버린 것들은 카사진이 갖게 됐을 텐데, 그럼 녀석이 다시금 돌려줬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저 꼬맹이가… 딸인가?]

[뭔가 눈빛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군.]

[무슨 소리지? 피는 안 이어졌다고 했잖아.]

생각과 의문은 끊이지 않았고, 거기에 ‘루카스들’의 목소리까지 섞여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어쩌면 루카스는 허의 세계에 온 이례 가장 큰 혼란을 겪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은 다음 순간 뚝 끊기고 말았다.

포옥.

약간 묵직한 느낌, 조금 서늘한 천의 감촉,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온기.

루카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뒤늦게 이해했다.

세디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자신의 품으로 안겨든 것이었다.

“…….”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루카스는 굳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먼저 움직인 건 세디였고.

“…한 번만 더.”

먼저 말을 한 것도 세디였다.

얼굴은 숙이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디의 목소리는 쥐어짜는 것처럼 가냘팠고 희미했다.

“…한 번만 더 말없이 사라지면, 그땐 진짜 끝장이야.”

뭐가 끝장인지는 모른다. 사실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루카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당황의 종류는 그가 여태것 느낀 적 없는 생소한 형태의 것이었다.

우선 루카스는 세디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루카스의 기억대로라면 세디는 ‘글라스턴’이라는 성을 가졌을 때에 죽음 앞에서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비록 그게 연기나 거짓된 모습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로 인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세디가 스스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죽기보다 더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루카스는 자신의 품에서 느껴지는 이 소녀가 유리로 만든 공예품처럼 느껴졌다.

“죽었을 거라 생각 안 했어. 뭣도 모르는 놈들은 그렇게 떠들어 댔지만, 난 믿지 않았다고.”

“…….”

“나한테 그딴 말을 지껄인 주제에 멋대로 죽었다면, 그땐 내가 진짜 죽여 버렸을 거니까.”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떠들어 댔다. 그런 모습도 익숙하진 않았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건가?”

돌이켜 생각하면 재회한 직후에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세디가 고개를 홱 들었고 덕분에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평소와 다른 의미로 눈이 빨갛고, 코끝도 빨갛다.

“그럼 내가 잊길 바랐어?”

날 선 목소리에 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아니, 난 그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겠다. …젠장. 예상했던 것보다 더 동요가 심하다. 아마도 얼굴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을 것이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지금의 루카스는 이 동요를 통제할 여유가 없었다.

뜻밖의 구원자가 등장한 건 그때였다.

“세디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카사진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

“당연히 너에 대한 것도 모두 기억하고 있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왜냐면…….”

카사진은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대답했다.

“난 저놈한테 한 번도 안 졌거든.”

세디가 불쑥 말했고, 카사진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그 말대로다.”

“…그 말대로라니.”

내가 멍청해진 건가? 이해력이 떨어진 건가? 아니면 이것도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때문인가?

루카스가 선뜻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와중에 카사진은 설명을 이어 갔다.

“첫 번째 싸움에서 난 세디에게 패배했다. 당연히 그녀는 하나도 잃지 않고 새로운 [0번째 악마]가 될 수 있었지.”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전개에 루카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품속의 온기를 느끼고 고개를 내렸다.

세디는 코끝을 훌쩍이다 마침 시선이 마주치더니 툭 내뱉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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