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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87화 (508/857)

외전 287화

[이 능력, 아직 지속되고 있는 건가]

[제법 신기한 현상이군 그래]

“…….”

목소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로써 한 가지 확정된 사실은 루카스가 포식하여 얻은 무언가는 단순히 육체肉體에 쌓인 게 아니란 것이다.

정신. 혹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무언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

‘…마치.’

떼어 낼 수 없는 저주와도 같다. 이 목소리는 어디까지든 루카스를 따라오겠지. 질척질척하고 끈질기게. 그 사실이 구토가 나올 만큼 거북하다. 하나 만약 루카스에게 이걸 떼어 낼 수단이 갖춰졌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내해야 됐다.

“몸은 괜찮아요?”

방긋방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청발, 청안의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에 허름한 차림새, 검 한 자루 쥐는 것조차 힘겨울 비쩍 마른 몸뚱이였으나, 이제 루카스는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다.

기근饑饉의 청기사.

허왕虛王의 가장 충실한 수하 중 하나.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군림자, 뇌존과의 일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불가해의 괴물.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비쩍 마른 여인의 진면眞面이다.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십이허주 양인현. 처음부터 그 남자가 페일만을 경계하고 있던 이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채 경의를 표한 이유. 그리고 시귀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까닭까지.

…그러나 여전히 짐작가지 않는 점도 있다.

페일은 왜 이 시점에서 내 옆에 있었던 거지?

우연인가? 아니, 그리 단순히 생각하기엔 그녀가 가진 출신이 너무나도 범상치 않다.

“…….”

루카스가 대답을 망설이자 페일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불현듯 죽기 직전 들었던 ‘페일’의 말이 떠올렸다.

─다시 한번 ‘나’를 만나면요, 지금 아저씨 상태에 관해선 숨기는 게 좋을 거예요. 왜냐면 지금 아저씨는 솔직히 말해서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이거든요. 사정을 모르는 ‘나’는 못 참을 수도 있어요.

…다시 한번 나를 만나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던 거지? 페일은 루카스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가 다시 회귀回歸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궁금했어요. 그리고 기대했어요. 그 기만자가 마지막 남은 찌꺼기를 갈아 가면서까지 부른 자가 어떤 존재인지요. 그리고 그 기대는 충족됐네요.

페일은 또한 신에 대해 언급했다.

다시 말해서 루카스가 허의 세계에 오게 된, 그 자신조차 모르는 속사정 또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회귀에 관한 건 나중에 알게 되었을지 몰라도, 이 사실만큼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결론적으로.

이 여자는 이 시점에서 이미 모종의 목적을 가진 채 루카스를 기다리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 내 상태에 관해서 숨겨라.’

다시 한번 그 말을 떠올렸다.

사정을 모르는 페일. 즉, 눈앞에 있는 페일이 참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말에 담긴 진의를 완전히 깨닫게 된 건 아니다.

그러나 방금 전, 루카스는 페일의 눈동자에 담긴 빛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페일은 결코 나의 아군이라고 할 수 없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강한 확신이 되어 뇌리에 박혔다.

그래서 루카스는 스스로에 대해 숨기기로 했다. 아마 ‘페일’의 충고가 없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단순히 숨기는 걸로는 부족할지도.’

이미 페일은 루카스를 의심하고 있다. 다른 태도,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보이드의 기척 혹은 그밖의 요인.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여기서 갑자기 힘의 기척을 감추는 건 오히려 의심을 부추기는 꼴이 될 거다. 그래선 안 된다.

…떠올려라.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어떤 몸 상태였는지. 그리고 그때를 흉내 내라. 조급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느려서도 안 된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루카스에게 그건 벌써 4,000년도 더 이전의 일이었고, 지금은 정신력 대부분을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는 데에 사용해야 됐으니까.

그래도 가능했다.

[좀 더 힘을 가라 앉혀라.]

[텅 비는 게 아니야. 그렇게 보이도록 가장하는 거지.]

[호흡, 시선, 맥박에도 신경을 써라. 그녀가 가진 안목의 날카로움은 네 수십 배야.]

우습게도 ‘루카스들’이 도움을 주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페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강하게.

“…….”

페일은 말없이 루카스를 내려다봤다. 고개만 살짝 기우뚱한 무표정한 얼굴이다. 단지 그것뿐인데 심장을 부여 잡힌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러한 압박감은 페일이 의도한 게 아니다.

굳이 말하면 그녀의 진면목을 깨달았기 때문에 느끼고 있는 혼자만의 감각이다.

…슬슬 무언가 말해야 되나.

“넌 누구냐?”

아마도 처음 그녀를 조우했을 때, 이 비슷한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페일은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는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페일.”

“…….”

이 반응은… 처음과 다르다. 루카스의 기억으로는 분명 이때 페일은 루카스의 정체를 역으로 물었었다.

이미 과거와는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건 좋지 않은 일이다. 다시 한번 긴장감이 차오른다.

그걸 내색하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름을 물은 게 아니야.”

─이름을 물은 게 아닌데!

이 말을 하는 순간, 루카스는 과거 페일과 자신의 대사가 뒤바뀌었단 사실을 느꼈다.

페일은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아저씨 혹시…….”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이다.

루카스는 대부분의 주의를 그녀에게 쏟고 있었으나 전부는 아니었다.

갑자기 바닥에 나타난 음영, 하늘에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왔군. 이제는 세 번째 보게 된 악어를 닮은 괴물이다. 루카스는 그 괴물을 향해 본능적으로 손을 펼치려다 그만 움츠리고 말았다.

과거 이 순간. 루카스는 마법을 사용했다. 지금도 가능하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이드의 힘을 응용하여 마도학을 구사하는 것, 마법을 쓰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흉내 내는 것쯤은 가능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쩍 벌린 아가리가 바로 앞까지 치달았다. 물론 지금의 루카스라면 웬만한 일로 죽을 일이 없겠지만, 이대로 놈의 위장 속에 순순히 발을 들이는 것도 상책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죽음에서 되살아나거나 상처가 수복되는 모습을 페일에게 보여 주기 싫었다.

이를 악물며 최대한 숨긴 채 보이드를 쓰려는 순간이다.

빠악!

괴물의 거체가 일순 흔들리는가 싶더니 입을 쫙 벌린 채로 날아갔다.

페일이다. 그녀가 괴물의 옆구리를 걷어찬 것이다. 그 작은 몸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괴력이다. 괴물은 심지어 허공에서 산산이 박살 나 피육을 흩뿌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페일의 차가운 눈동자는 그쪽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뭐 해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루카스는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섰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대응해야 되지?

고민과 대답을 병행한다.

“몰랐어.”

“뭘요?”

“저 괴물의 존재를.”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이고 들었던 맑은 폭소였으나 그때와 다르다.

“내가 바보로 보여요?”

분명 웃으면서 한 말인데도 가슴이 술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딱히 자신이 동요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또한 ‘다른 루카스’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의 재난 사태에 직면한 시민들처럼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다.

[잘 대답해! 이 멍청아!]

[그녀를 화나게 만들 생각인가?]

[너는 모른다… 기근이 얼마나 두려운지… 청기사가 어떤 존재인지…….]

“…….”

루카스는 그중 마지막 목소리에 주목했다.

희미한 목소리다.

하지만 ‘그 루카스’에게선 무언가 다른 이들보다 페일에 대해 깊게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 난 ’모든 루카스‘를 흡수하지 못했어.’

녹여내지 못한 건 힘이나 존재력, 자아 그리고 보이드만이 아니다. 그들이 가졌던 기억 또한 드문드문한 형태로 흡수되었다.

‘그럼 넌 알고 있단 말인가? 청기사가, 페일이 어떤 존재인지?’

루카스가 ‘겁에 질린 루카스’에게 좀 더 자세히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알고 있었잖아요.”

페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눈치채고 있었잖아요. 그런데도 망설였고.”

그녀는 킬킬 웃으며 말했다. 여태까지와 다른 표정이었는데, 적어도 이 시기에 나타나선 안 될 냉소적인 태도였다. 페일은 이미 경계심을 숨길 마음이 없어 보였다.

눈치가 너무 빠르다.

완벽히 속여 넘길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감은 과할 정도로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뭘 망설인 거예요? 어떻게 죽일지?”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내 공격이 효과가 있을지 몰랐어. 망설이는 게 당연하잖아. 난 이런 괴물은 처음 보니까.”

“…….”

“…넌 대체 정체가 뭐지? 어떻게 저 괴물을 한 번에 날린 거야?”

“내가 누군지는 이미 말했는데.”

우선은 추궁하기를 그만둔 걸지도 모른다.

페일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페일이라니까.”

* * *

사막의 풍경엔 적막감보단 정지감停止感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마치 멈추어 버린 세상 한가운데 홀로 놓인 것만 같다.

그런 감상이 드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장소엔 아무런 자연 현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은 불지 않고 기온마저 균일하다.

그나마 가변적인 건 때때로 그 색채를 바꾸는 하늘이었다. 그래서 루카스는 고개를 올린 채 생각에 잠겼다. 깊은 이유는 없었다. 고심할 거리가 있을 때 마차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거나, 하는 그런 시시한 이유다.

루카스가 떠올리는 건 화산에서의 일이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뇌존. 그 매개체는 이종학의 육체.

어째서 뇌존이 이종학의 몸에 깃들 수 있었던 거지? 루카스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그들 사이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전초전.

필드에서 이종학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고, 그 영혼은 막대한 재능을 가진 아리드조차 찾을 수 없었다.

뇌존이 간섭한 틈이 있다면 그 순간이겠지.

여전히 납득가지 않는 게 있다면 이종학이 허의 세계에 흘러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지만, 그에 관해선 깊게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화산의 뇌옥에 갇힌 이종학의 몸뚱이엔 뇌존의 사념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내버려둬도 돼.’

루카스는 그리 판단했다.

뇌존은 양인현과 양패구상했다. 그대로 놔뒀다면 피를 흘리다가 결국 죽어 갔을 것이다.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건 루카스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종학의 육체를 치료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뇌존은 되살아날 수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큰 문제는 없겠지.

비록 이종학은 죽겠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루카스는 그에 관한 생각을 지웠다. 딸려 오듯 떠오른 지구의 인물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리던 검은색 머리의 소녀에 관해서도 잊기로 했다.

‘이종학은 뇌존이 허의 세계로 보낸 준비물 중 하나.’

허의 세계에서 얼리게 된다는 본격적인 위대한 게임을 위한 대비책일 확률이 높다.

군림자를 가리는 전쟁이 왜 하필 이 세계에서 열리는가에 대한 의문은 둘째 치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대충 아귀가 들어 맞는다.

“…….”

복잡하다.

아주 복잡한 인과 관계가 얽혀 있고, 그 중심에 자신이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화산으로 가는 건 보류다. 지금 루카스는 양인현을 이길 확신이 없었고, 그곳에 있는 뇌존이 가지는 불확실성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럼 다른 십이허주를 노려야 된다는 건데, 루카스가 직접 만나 본 건 폐기장에 있는 시귀뿐이다.

‘목표를 시귀로 바꾸는 건.’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 또한 확신이 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십이허주보다 약했다.

더, 더 녹여내야 된다.

폐기장에서 먹은 셀 수도 없는 루카스의 시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좀 더…….

‘─정말 그걸로 될까?’

비록 십이허주는 아니었지만, 뇌존이 가진 우레는 루카스에게 거대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마치 갑옷처럼 전신을 둘러쌌던 그 힘을 뚫어 내는 게 보이드로 가능한 일인가? 이 힘을 좀 더 갈고 닦아서 위력을 높이고, 응용력을 높이는 걸로 정말 뛰어넘을 수 있는 난관인가.

“…….”

불현듯 떠올린 건 자신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한 남자였다.

제이콥.

그 오만한 남자가 왜 나 대신에 죽음을 택한 거지? 루카스는 맹세코 그럴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는 제이콥을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런 기색을 비치기까지 했다.

‘이 상태를 치료할 수 있다고?’

이 광증의 증세를 없앨 수 있다.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는 모른다. 앞서 말했 듯이 어쩌면 더 약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성魔星.

마법사 그리고 구도자란 존재들이 모이는 장소.

그곳의 주인인 십이허주, 비기닝 위저드.

─스스로를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마법사라고 생각하나? 너보다 깊이 진리에 대해 깨우친 존재가 없다고 여겼나?

이제는 알겠다.

─아니, 아니야.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한 분야의 주인을 자처하기에 너는 아직 부족하다. 만약 네가 이 세계에 오지 않았다면, 넌 그게 착각이란 사실도 몰랐겠지.

양인현이 언급했던 루카스를 넘어서는 마법사.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깨닫지 못한 건가. …마법사다. 너보다도 아득히 강한 어떤 마법사.

그 존재가 바로 비기닝 위저드일 것이다.

“…….”

제이콥의 말을, 한 번쯤 믿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변덕일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한 번은 믿어 주는 게 도리란 생각이 든 걸지도 모르고.

그보다 중요한 건.

루카스가 마성으로 가야 될 듯한 느낌을 받았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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