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84화
콰당, 제이콥이 쓰러지고, 루카스는 육체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이종학과의 거리는 한 발자국.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있는 컵을 끌어당긴다. 컵엔 미지근한 물이 출렁이고 있다. 촤악! 그걸 이종학을 향해서 흩뿌렸다. 물방울이 허공에 산개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다시 이어지며 몸집을 크게 불렸다.
픽.
이종학이 실소를 터뜨리며 검을 움켜잡았다. 파직, 이번엔 확실히 인지했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잊을 수 없는 전류.
이윽고 물방울이 검과 맞닿은 순간이다.
꽈앙! 물방울이 폭발을 일으켰다. 과연 예상한 상황은 아닌지, 이종학의 눈가가 살짝 좁혀졌다. 그 몸뚱이가 폭발의 후폭풍에 휘말려 뒤로 날아가더니 그대로 가옥의 벽까지 부쉈다.
이 건물, 운해각은 절벽의 거의 끝자락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었다. 공고룝게도 이종학이 날아간 방향은 절벽 쪽이었다. 그는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크윽…….”
“이게, 무슨…….”
루카스는 상황을 확인했다.
칠화 중 둘, 삼화 천종우와 오화 만설군이 죽었다. 그들의 목이 쓰레기처럼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스스로의 죽음조차 깨닫지 못한 듯하다.
사마령과 조상악은 양팔이 잘린 채였다. 특히 조상악은 눈앞에 벌어진 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두 명의 장로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언뜻 보기엔 그랬다.
루카스는 그들이 서 있던 장소의 지면이 까맣게 타들어 간 걸 보았다. 추측할 수 있는 건 하나. 검을 휘두르면서 뻗은 뇌전雷電이 그들의 전신을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멸시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제이콥은 죽어 가고 있었다.
“…….”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뚱이. 언뜻 보기엔 치명적인 상처지만 문제없다. 등뼈가 갈라졌고 출혈량도 심각하지만 이보다 더 심한 상처라도 살리는 게 가능하다.
살아만 있다면, 지금의 루카스는 누구라도 살릴 수 있다.
그랬어야 되는데.
제이콥의 등에 손을 짚고, 루카스의 표정이 굳었다.
“왜?”
살릴 수가 없다. 재생이 원활히 수행되지 않았다.
보이드의 힘이 먹혀들지 않는다.
제이콥의 육체가 회귀를 거부하는 건가?
…아니. 육체가 아니다.
몸뚱이에 스며든 뇌전의 힘이 보이드를 밀어내고 있다.
“…….”
방법이 없다. 치료가 불가능하다. 루카스는 이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 깊게 고찰할 시간조차 없었다. 제이콥의 목숨은 경각에 이르렀으니까.
“…──.”
제이콥의 입술이 달싹였다.
루카스는 그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우선적으로 주목한 건 그의 눈동자였기 때문이다.
지금 제이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눈동자에 들어 있을 감정이 궁금했다.
그리고 놀랐다.
제이콥의 눈동자엔 현 상황에 대한 절망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원망이 보이지 않았다.
“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아니, 애초에 제이콥은 그 스스로의 판단으로 루카스 대신 공격을 받았다. 그러니 원망이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 남자는 나를 구한 거지?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루카스는 제이콥과 각별한 인연을 맺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존재를 거추장스럽게 여겼고, 실제로 죽이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 뚜렷한 살기를 제이콥도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이콥은 결과적으로 루카스를 구해 냈다.
…차오르는 생각을 멈췄다.
현 시점에서 가장 명확한 건 한 가지다.
루카스는 제이콥을 살릴 수 없다.
그러니 최소한 그가 최후에 남길 목소리라도 들어줘야 된다.
“…….”
그러나 제이콥의 입술은 달싹거리기만 할 뿐, 도무지 목소리를 내뱉지 못했다. 그 대신 핏물 섞인 숨결만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눈동자의 안광이 점점 옅어졌다. 울컥, 피를 한 번 토해 냈다.
그리고 제이콥의 움직임은 완전히 정지했다.
[사라지기 전에 먹는 게 어때?]
꽈앙!
루카스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보이드를 쐈다. 당연히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뻗어 나간 힘은 건물 벽을 부순 채 창공을 향해 뻗어 나갔다.
“대체 이건…….”
사마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사고가 쫓아가지 못해서 정보와 현실과의 괴리가 발생하고 있었다.
물론 사마령은 방금 전, 이 참상을 만든 주범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종학.
비교적 최근에 허의 세계로 온 인물이며 화산의 제자를 대량 학살한 죄인. 뇌옥의 죄수 중 가장 위험한 남자.
물론, 사마령은 그의 살해 현장을 직접 보진 못했다. 그 시기에 그녀는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얼굴을 맞대고 얘기한 적은 있었다.
철창 너머에 좌선한 채, 청렴한 기백을 내뿜고 있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솔직히 말하면 그 광경을 보고, 사마령은 이 남자가 정말 학살자가 맞는가 의문을 가졌었다.
게다가 그가 죽인 학살이 진실이라면, 왜 곧바로 처형하지 않고 굳이 수감시킨 거지? 사마령이 알고 있는 양인현은 그렇게 자비로운 남자가 아니다.
“큭.”
아니.
지금은 그딴 게 문제가 아니다.
“너, 저 남자와 무슨 관계지?”
사마령은 루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름 아닌, 이종학을 이 자리까지 끌고 온 게 바로 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제이콥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넋이 나간 듯한 모습에 사마령은 거센 분노를 느꼈다.
“내가 묻고 있지 않나!”
그러자 루카스가 반응을 보였다. 몸을 돌린 채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봐. 너…….”
그 앞을 사마령이 가로막았다. 비로소 루카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비켜.”
짤막하게 선고했다. 그건 부탁이 아니었고, 명령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곧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이었다. 사마령의 몸이 옆으로 쭉 밀려나더니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억…….”
비록 목숨은 부지하고 있었어도 양팔이 잘리고 치명적 내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사마령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은 채 혼절했다.
“사, 사저!”
조상악이 사마령에게 달려갔다. 루카스는 그 모든 광경을 무시한 채 양인현에게 걸어갔다.
상처투성이가 된 몸. …그래. 루카스는 방금 전, 그에게 응급처치를 했다. 그때도 효율이 최악이었다. 최소한 운신할 수 있을 정도는 치료하려고 했는데, 양인현은 의식을 찾고 희미한 목소리를 내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 이해가 간다.
누가 양인현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종학.”
“…….”
“아니, 잘못 말했군.”
루카스는.
이종학에게 깃든 채, 화산을 부수고 양인현을 사경으로 몰아간 존재에 대해 말했다.
우주에서 가장 지고한 존재.
신이 만들어 낸 최강의 송곳니.
아득하게 높은 곳에서 만물을 굽어보며 군림君臨하는 자.
“천둥우레의 뇌존.”
꽈르릉!
천둥 번개 소리.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투둑, 툭, 쏴아아.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루카스는 영지에 날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천둥과 비바람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누군가 불러온 것이었다.
“뇌존이 너보다 강했나?”
루카스로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양인현은 잠시 묘한 시선을 보내더니, 이윽고 기력이 다했는지 눈을 감고 말았다.
결국,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단 건가?
[정말 반갑군.]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재회하니까 더.]
이상한 일이다.
분명 낮은 중얼거림이었는데, 목소리가 쩌렁쩌렁할 만큼 귓전을 울렸다. 머릿속에 울리는 ‘루카스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옆에 있던 조상악의 고막은 터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만약 두 팔이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귀를 막았을 것이 분명했다.
[완전히 소멸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 루카스 트로우맨.]
“…….”
[전보다 더 과묵해졌군. 재미있는 힘도 손에 넣었고… 자, 어떻게 하겠는가?]
뇌존이 말했다.
[내가 다시 그리로 갈까. 아니면 네가 오겠나?]
루카스는 후자를 택했다. 뇌존이 추락하며 만든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공기를 가르며 언제까지고 추락하는 듯한 감각. 이럴 때면 다시금 자살 욕구에 시달렸다. 온몸에 힘을 뺀 채, 머리부터 떨어져 죽고 싶었다.
탓.
그런 충동에 휩싸이지 않고, 루카스는 발끝부터 가볍게 착지했다.
이곳은 대체로 피해가 적은 곳이었다. 불길이 번지지 않아서 그럭저럭 숲의 형상을 갖추고는 있었던 것이다.
투두둑… 떨어지는 빗물이 머리를 적셨다. 루카스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지 않은 채, 물에 젖은 꼴이 되서 누군가를 노려봤다.
뇌존은 한 송이 핀 모란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제법 강한 친구더군. …양인현이라고 했나?”
“…….”
“그만한 검사는 전 우주적으로도 드물겠지. 나도 까닥 잘못하면 갈 뻔했어.”
“이종학이 죽어도 네겐 아무런 영향이 없을 텐데.”
“피해는 있지.”
뇌존이 무릎을 펴며 일어섰다. 그러면서 모란을 꺾었다.
“기껏 잡은 기회를 놓치는 게 되잖나? 빙의체와의 동조율도 처음부터 다시 맞춰야 하고. 그게 얼마나 귀찮은데.”
그는 꺾은 모란의 향기를 맡더니 이윽고 인상을 찌푸렸다.
“…텅 빈 강정 같은 세계야. 지배할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느껴지는군. 이곳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우리와 섞일 수 없겠어. 큭큭. 아무리 생각해도 [용]은 잘못된 선택을 내렸단 말이야.”
“어떻게 이곳에 현계 한 거지?”
루카스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넌 절대자로서의 위치를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잊힌 것도 아니지. 허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조차 충족시키지 못했을 텐데?”
뇌존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경계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신’이 떠나며 쓰레기장의 뚜껑을 툭 건드렸다고 할까? 그 때문에 틈새가 생겨났지.”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어려운 말을 했나?”
“…네 목적은 뭐지?”
뇌존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쏴아아, 잠시간 빗물 소리만이 울렸다.
파직-
순간 뇌존의 정수리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전격이 루카스를 덮쳤다. 루카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드득, 솟아오른 지면이 전격을 막아 냈다.
“호…….”
루카스는 뇌존이 쏘아 낸 전격이 공격의 의미보단, 견제의 의미가 더 강하단 사실을 느꼈다. 실제로 그는 더 이상 공격을 이어 가지 않았다.
“전보다 더 강해진 건가. 하하. 대답해 주지 않겠나? 넌 이곳에서 뭘 버리고, 뭘 얻은 거지?”
“내 의문은 무시하고 네놈이 궁금한 것만 물어보는군. 이기적인 화법은 변하지 않았어.”
“불변은 군림자에게 가장 중요한 소양 중 하나지. 우리에게 변화란 필요가 없어. 태어날 때부터 완전하기 때문이지… 가변적인 존재여.”
루카스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어쨌든 네겐 빚이 있기도 했지. 일단 이 몸뚱이도 치료해 줬으니.”
“알고 있는데도 날 죽이려 한 거냐?”
“결국 안 죽었지 않나?”
“대신에 다른 자가 죽었지.”
“그래. 널 감싼 녀석이 있었는데… 그건 뭐였지? 제자였나?”
“…….”
어째서?
어째서 나는 방금 전, 순간적으로 뇌존을 죽이고 싶어진 거지?
그것만이 아니다. 슬슬 그와 대화를 나누는 상황 자체가 불쾌해지고 있었다. 저 히죽히죽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내심을 터뜨린 기폭제는 이어지는 뇌존의 말이었다.
“그럼 그에 대한 사죄까지 더해서 제안해 볼까. 루카스 트로우맨, 완전한 존재가 되지 않겠나?”
“완전한 존재?”
“군림자 말이다.”
뇌존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의 너라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때 루카스 필생의 염원을 입에 담았다. 그가 모든 걸 걸고 추구했던 목적을 입에 담았다.
한없이 가볍고, 경박한 목소리로.
루카스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빗물이 턱선을 타고 흐른다. 차갑다. 그 이상으로 불쾌하다.
뭐라고 대답해야 되나.
어떻게 해야 이 더러운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릴까.
긴 침묵.
드문드문 천둥이 세 번 정도 내려쳤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뇌존이 다시 물었다.
“대답은?”
그때쯤 루카스는 ‘어떤 루카스’에게서 제법 근사한 대답을 추천받았다.
루카스가 고개를 들었다.
“…까.”
“응? 뭐라고?”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X이나 까라고. 이 개새끼야.”
“…….”
뇌존의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