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82화
“난 들러야 될 곳이 있다.”
“들러야 될 곳?”
루카스는 사마령의 반문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당황한 건 제이콥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가십니까?”
루카스는 대답하지 않고 걸어갔다. 제이콥과 페일이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 뒤를 따라갔다.
천종우가 그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대로 놔둬도 괜찮겠습니까?”
“…원칙대로라면 안 되지.”
사마령이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야.”
저들의 행동을 제지하는 것보단 사태 파악을 더욱 우선시해야 된다.
“한 명은 마성 출신으로 보이는데, 나머지 둘은 정체를 모르겠군요. 저들은 대체 누굽니까?”
조상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검법은 다른 칠화에 비해 떨어졌으나, 머리가 명석하고 분석력이 뛰어난 게 조상악의 장점이었다.
“…….”
사마령은 대답을 망설였다. 반쯤 협박당해서 이곳까지 안내하게 된 거라고,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지금은 말할 수 있지만…….
“우리한테 해는 되지 않을 거야.”
아마도.
이번엔 제대로 뒷말을 삼킬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지금 괜히 사제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줄 필요는 없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만설군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의도는 불분명하지만, 최소한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것 같군요.”
비록 사방이 불길이 휘몰아치는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높게 뻗은 화산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주변 위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조상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뇌옥牢獄.”
* * *
[귀찮게 따라붙는군.]
[그냥 죽이는 게 어때?]
[계집 쪽은 비쩍 말라서 별로겠지만, 남자 쪽은 별미일 거야.]
속삭임 중 유난히 크게 들리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물론 단순히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고, 실제로 그런 건 아니다. 귓가에 혹은 머릿속에 울리는 속삭임의 크기는 모두 동일하다.
그럼에도 이 목소리들이 유난히 또렷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하다. 실제로 루카스와 비슷한 욕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따라오는 두 명의 존재가 거추장스럽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이들을 죽이고 싶었다.
페일은 콧노래를 부르며 뒤를 따라왔다. 불길에 휩싸인 숲, 새까맣게 타버린 대지, 자욱하게 퍼지는 연기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자연스럽단 감상도 들었다. 전에도 그랬다.
폐기장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사이를 누빌 때. 페일에겐… 형용 못할 아름다움이 느껴졌었다.
“아저씨 몸 상태를 조사해 봤어요.”
순간 착각할 뻔했다.
워낙 낮은 목소리라서 페일이 아닌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로 착각한 것이다. 그게 아니란 걸 얼마 안 가 깨달았다. 부정적인 감정만이 휘몰아치는 음습한 목소리와 달리, 페일의 목소리는 촉촉했다.
“조사?”
“저랑 만난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그런데도 사라지는 증상이 전혀 없고요.”
“…….”
그러자 제이콥이 흠칫하는 기색으로 루카스를 보았다.
루카스는 페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더 이상 루카스에게 있어 식사는 기본 요소가 아니다. 이 세계 대부분의 장소에 존재하는 보이드. 그 힘을 언제든 수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요, 아저씨는 더 이상 굶주림이 느껴지지 않겠네요? 부럽다.”
루카스가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페일이 위태로운 미소를 머금은 것과 동시였다.
“난 항상 배가 고파요. 굶주림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쥐새끼의 시체다. 아니, 시체가 아니다. 그랬다면 사라졌을 테니까. 죽기 직전의 동물을 음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런 가공 처리가 되지 않은 건 물론,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페일은 그 털 수북한 쥐를 입에 넣고 씹었다.
우직.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게걸스러운 식사였다. 제이콥이 긴장한 얼굴로 그녀와 몇 발자국 거리를 벌렸다.
페일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죠. 위장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아주 깊고 거대한 구멍이, 맞닿은 건 무엇이라도 빨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 구멍에 언젠간 내 존재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고요. 그래서 전 언제나 불안해요.”
위험하다.
루카스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페일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상상이 가요?”
페일은 계속 주머니를 뒤적이며 쥐새끼를 꺼냈다. 하아, 하아. 거친 숨결을 흘리며 쥐를 씹어 먹는다.
루카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씹어 삼킨 쥐새끼의 숫자가 거의 열 마리를 넘었는데도, 그녀에겐 만복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앙상해지는 것 같다.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페일의 볼이 홀쭉해지고 쥐를 잡은 손목은 뼈에 가죽만 뒤집어씌운 것처럼 앙상했다.
‘엿볼 수 없다.’
보이드의 힘으로도 그녀의 체내를 훔쳐볼 수가 없었다.
…페일이 삼킨 쥐새끼. 그 쥐새끼가 가진 ‘보이드’는 어디로 사라졌지? 정말로 그녀의 위장엔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구멍이 존재한단 말인가?
뚝.
페일의 손동작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라.”
표정이 확 바뀌었다.
“방금 게 마지막이었나? 안 되는데. 그러면…….”
홀로 중얼거리는 페일을 보며 제이콥이 중얼거렸다.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저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뭡니까?”
당연히 루카스도 모른다.
그리고 페일의 중얼거림은 점점 불안정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아직 배고파. 먹을 게, 어딘가에…….”
충혈된 눈동자가 루카스를 향했다.
쿠와아아.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이 사방에 전개되었다. 루카스도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허억…….”
제이콥의 경우엔 훨씬 심각했다. 그는 비라도 맞은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다리까지 후들후들 떨었다.
까득.
루카스가 손가락 관절을 움직였다. …굶주림. 이 여자, 지금 나를 음식으로 보고 있다.
덮친다면 언제든 대응할 수 있게 준비를 마친다.
“저건 안 돼… 후보자만큼은… 하지만… 너무 배가 고픈데…….”
그때였다.
페일의 시선이 돌연 어딘가로 휙 향했다.
“아핫.”
입가에 길쭉한 미소가 피어난 순간, 페일의 신형이 그대로 사라졌다.
동시에 둘을 압박하던 공기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큭…….”
제이콥이 신형을 비틀거렸다. 루카스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
황공한 듯한 목소리다.
루카스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을 보았다. 그건 하늘이었다. 그러고 보니 잿빛 사막에서도 페일은 하늘을 바라봤었다.
안개가 자욱이 퍼진 하늘. 저곳에 뭔가 있는 건가? 루카스로선 관측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발견한 걸까?
[그녀는 위험해.]
[먹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러려면 상당히 고생하게 되겠지…….]
[수지가 맞지 않아. 그녀에 관해선 포기하자고.]
시끄러.
루카스가 목소리들을 향해 경고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증상은 광기에 전염된 시체술사들과도 흡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릇이 작은 시체술사들은 정신과 육체에 달라붙은 원념 덩어리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듣게 된다. 인간의 정신을 쉴 새 없이 갉아먹는 악령의 속삭임, 그걸 듣게 된 시체술사들은 두 가지 결말을 맞는다.
미치거나 혹은 죽거나.
“괜찮으십니까?”
제이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루카스는 고개를 살짝 터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 정말 필요한 말 이외엔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의注意를 광증을 억누르는 데 써야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제이콥의 말엔 루카스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뭐?”
루카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제이콥은 흔들리지만 어떤 의지를 담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기장에서 수많은 시체를 포식하셨겠죠.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비슷한 증상을 겪었으니까.”
아예 거짓말은 아니다.
제이콥은 자신의 증상을 정확히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에겐 자신의 상태를 간파할 만한 안목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증상에 빗대어 추측한 거면 몰라도.
“마성으로 가셔야 됩니다. 그럼 존부尊父께서 해결해 주실 겁니다.”
“존부? 십이허주인 비기닝 위저드를 얘기하는 건가?”
“예.”
“…….”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그건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 아닙니다. 뚜렷한 치유법이 존재하는, 질병 같은…….”
“큭큭…….”
루카스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해결법? 질병? 이 증상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그 존부라는 놈이? 하하, 아하핫!”
루카스는 실로 오랜만에 진심 섞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반면 제이콥의 표정은 암석처럼 굳었다. 유쾌한 듯 터져 나온 웃음소리였지만, 실제로는 끈적끈적하며 형용하지 못할 광기가 실려 있었다.
“아주 좋아. 실소가 폭소가 될 수도 있군. 시시한 농담이지만 제법 재밌었다.”
“농담 같은 게 아닙니…….”
“조용히 해.”
욱.
루카스가 검지를 입술에 댄 순간, 제이콥은 목소리를 끝맺지 못한 채 입을 닫고 말았다.
천천히 그에게로 접근한다. 새까만 눈동자가 제이콥의 전신을 들여다보았다.
“이봐, 마법사. 지금 내 상황을 얼추 맞춘 걸로 나의 모든 걸 이해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그리 가벼워 보이나?”
“결코 그렇지 않습…….”
“아니, 넌 그런 거야.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왜냐면 아주 털끝만큼이라도 이해했으면 그딴 말은 내뱉지 못했을 테니까. 날 봐라. 내 눈동자를 한번 보라고.”
제이콥의 몸이 떨렸다.
“지금의 내가 제정신인 것처럼 보이나? 대화가 가능하니 멀쩡한 것처럼 여겨지나? 내가 억누르고 있는 것 중 아주 일부만 튀어나와도 그리고 그 조각의 편린만 겪게 되도, 넌 감히 서 있을 수조차 없을 거다.”
“아, 윽, 으으…….”
“당분간 내 눈에 보이지 마라.”
제이콥이 털썩 주저앉았다.
루카스는 그를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머릿속 목소리들이 또 시끄럽게 굴어 댔다. 왜 당장 먹지 않느냐는 불만이 주를 이뤘다.
울컥울컥, 짜증과 불만이 쌓이는 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는 건 모조리 부수고 싶은 파괴욕이 차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 머리통을 부수고 싶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속 시원한 일이었다.
‘…다음에 눈에 띄면 죽여야겠어.’
루카스는 제이콥에 대한 처우를 결정했다. 비기닝 위저드, 마성에 대한 단서. 물론 매력적이지만 그것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 진심으로 저 남자의 존재가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경고를 어기고 쫓아온다면, 놈의 전신을 찢어발긴다. 핏물이 흩날릴 거다. 비록 사방에 치솟은 불길을 꺼뜨리진 못하겠지만, 루카스의 갈증을 채우기엔 충분하겠지.
그래.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피가 입 안까지 튀는 것뿐, 그건 식사가 아니다. 살아 있는 존재의 핏물은… 얼마나 달콤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존재 자체가 거슬리던 제이콥이 다시 나타나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라고 여기게 됐다.
* * *
뇌옥의 입구는 크게 손상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이곳도 ‘적’의 손길에서 안전하진 못했던 것 같다. 입구 주변엔 분명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뇌옥 내부, 다시 말해 지하 동굴까지 붕괴된 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루카스가 찾고 있는 이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먹으면 되겠군.]
[시체가 남아 있다면 말이지.]
음습한 욕망이 군침을 흘렸다. 루카스는 그걸 잠시간 억누르며 뇌옥 안으로 입장했다. 일찍이 뇌옥을 둘러싸고 있던 진법은 이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술법을 지탱하는 장치들이 모두 박살 났다는 걸 의미했다.
지하 계단은 깔끔했고, 핏자국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이곳에 널브러져 있던 자들의 시체가 보이는 듯했다.
그 사이를 걷는다. 시체만이 보이는 게 아니라 혈향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육체는 사라졌으나, 그들 내부에 존재했던 보이드가 입자처럼 사방을 아른거리고 있다.
입자는 마치 과거의 영상을 재생시키는 것처럼 이곳에 벌어졌던 일을 보여 주었다.
뇌옥을 지키던 수호자들.
만만찮은 고수들이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마 스스로의 죽음조차 깨닫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알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어떤 방법으로 죽었는지는 물론, 한 명인지 다수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루카스는 뇌옥의 가장 깊은 지하에 이르렀다. 그곳은 훨씬 더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양 옆으로 쭉 뻗어 있는 철창들은 모두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마치 작은 태풍이 휩쓸고 간 듯한 흔적이다.
그러나 루카스는 이 난장판이 된 장소에서 한 명의 생존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루카스가 찾던 남자.
그가 양인현과 만나기 앞서 이 뇌옥부터 찾아온 이유.
이종학이 피 웅덩이에 고인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