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79화
핏물 속에서 일어났다.
바로 몸을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었지만, 적응하는 데 아주 약간 시간이 소모되었다. 아무리 회귀할 수 있는 몸뚱이라도 수십 분을 피떡이 될 만큼 두들겨 맞으니 육체와 정신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 같다. 이 또한 쓸 만한 정보다.
상대가 루시드, 혹은 그에 준하는 실력자일 경우 흐름을 넘겼다간 귀찮아질 수 있단 걸 학습했다.
주변은 문자 그대로 피바다였다. 도저히 하나의 몸뚱이에선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의 핏물과 살점, 혹은 내장 조각이 산재해 있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여기서 소규모 전쟁이라도 벌어진 거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어떡할 거지?]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대답하지 않고 무시했다. 하나하나 대꾸했다간 끝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히 앞으로의 일에 관해선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
우선은 직접 보고, 얘기를 좀 더 나눠야 할 인물이 있었다. 때에 따라선… 그래. 다시 전투에 돌입할 수도 있겠지. 물론 그 사실이 루카스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허공을 향해 손을 그었다. 좌악, 공간이 찢겨 나가며 다른 공간으로 진입했다. 그 너머에 있는 이의 얼굴도, 똑똑히 보인다.
“…….”
시귀는 침묵했다.
처음 조우했을 때처럼 여유로운 기색은 아니다. 그렇다고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흉측한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압도감이 느껴졌다.
십이허주.
이들이 가진 그릇의 깊이가 잘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루카스는 그들 또한, 자신을 봤을 때 비슷한 감상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왔군.”
시귀의 목소리엔 서늘함이 묻어났다.
경계의 빛 또한 섞여 있다.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기뻐할 순간은 아니었다. 찌릿, 피부가 위험을 감지하고 곤두선 게 느껴졌다.
“신체를 조작하는 힘을 갖고 있나?”
“…….”
“몸속에 흐르고 있던 혈류가 갑자기 움직임을 바꾸더군. 거기에 혈관이 흐물흐물해지고 뼈는 녹아내렸다.”
시귀가 루카스를 ‘한 번 죽인’ 순간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루카스가 말을 꺼낸 건 시귀가 같은 실험을 한 번 더 반복하려던 순간이었다. 내심을 읽힌 듯한 기분, 당황한 건 아니지만 선수를 뺏긴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시귀는 행하려던 시험을 중지한 채 시선을 보냈다.
루카스는 테이블을 천천히 내려다봤다. 디아블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곳엔 다리를 흔들며,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페일만이 있었다.
아쉬움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스쳤다.
만약 이 자리에 디아블로가 있었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를 죽이기 위해 좀 더 진지한 시도를 했을까? …모르겠다.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루카스는 디아블로를 만악의 근원이라 단정 지을 수 없게 됐다.
“디아블로는 이곳에 없네.”
누굴 찾는지 알고 있다는 듯, 시귀가 말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본다면?”
“아무것도 듣지 못하겠지.”
의외로 강경한 발언이 아닌가. …그럼 이쪽도, 좀 더 강압적으로 나가 볼까.
루카스가 경동맥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시귀가 말했다.
“그런 방식으로 기본 에너지를 지배한 것인가?”
손동작이 멈칫했다. 내심을 읽힌 것, 방금과 흡사한 상황이다. 역할은 바뀌었지만.
“넘겨짚기인가? 따분한 화법인데.”
“미안하지만, 팔과 다리는 없어도 두 눈은 건재하다네.”
시귀가 흐흐 웃으며 두 눈을 확실히 떴다. 흰자위가 있는 곳은 새까맣고, 동공 부분은 붉었다.
“못 믿겠다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볼까. 자네는 혈류의 흐름을 조작해서 에너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잖나.”
“…….”
“머리 좀 썼군. 기본 에너지는 그 자체만으로 움직이기 까다로우니 혈류를 이용한 건가? 과연. 강물에 휩쓸리는 선박처럼, 혈류와 기본 에너지가 같이 움직이는 꼴이야. 물론 허점도 있고, 리스크도 있지만… 자네는 별 탈 없이 실전에 써먹고 있군.”
“보이드라고 불러 주면 좋겠는데.”
루카스의 말에도 시귀는 계속 웃었다.
“그러지. ‘보이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할 게야. 기본적으로는 죽음을 초월하게 됐고, 가공할 만한 파괴력은 부산물처럼 딸려 왔을 테지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건 따로 있다. 앞으로 자네는─”
그때 루카스는 페일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얼굴로 시귀의 얘기를 듣고 있다.
“거기까지 하지.”
루카스가 시귀의 말을 끊었다.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그렇단 건?”
“그래. 인정하겠다. 넌 나의 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어.”
“흐흐. 영광이라고 말해야 하나?”
루카스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대화를 길게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납득 가지 않는 점도 있어.”
“그게 뭔가?”
“내 힘은 일견 깨달을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야.”
루카스도 자신의 힘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감안해도 시귀의 간파는 너무 빠른 감이 있다.
“한 번은 아니지. 자네와 난 두 번째 마주한 것이지 않나.”
“말장난은 집어치워라. 난 오래 얘기하는 걸 안 좋아하니까.”
“…….”
시귀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그 말에 대답해 주는 대신, 자네는 이만 내 영지에서 떠나 주지 않겠나?”
“아직 시험이란 게 더 남아 있는 거 아니었나.”
“애초에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이 폐기장을 벗어날 수 있지 않나? 그런 자를 상대로 시험이라니, 어불성설이지.”
그렇군.
시귀는 지금 정중하게 축객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선뜻 대답하지 않고 고민했다. 그의 제안을 받아줄 의무는 없다. 루카스의 목적은 십이허주를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차는 것. 상대가 딱히 양인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래. 가령, 눈앞에 있는 폐기장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시귀는 자신의 존재를 꺼리고 있다……. 그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니라면 굳이 영지에서 나갈 것을 권할 리 없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그 ‘꺼림’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다.
시귀에게 있어서 루카스는, 단순히 귀찮은 정도인가. 아니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적인가.
시귀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와 붉은 눈동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죽여. 싸우라고.]
[저 비루한 몸뚱이 좀 보라지.]
[저놈은 너한테 겁먹었어. 그게 느껴지지 않아?]
몇몇 과격한 ‘루카스’들이 또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닥쳐. 루카스는 낮게 뇌까렸으나, 그 의견을 아예 묵살할 생각은 없었다.
꽈득.
주먹을 말아 쥐었다.
보이드를 가장 정밀하게 다루려면, 시귀가 말한 것처럼 경동맥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야 한다. 맥박을 느끼면 보다 쉽게 혈류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행동을 취할 필요는 없었다.
기습은 가능하다.
물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지금 시귀는 루카스에게 평화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가 먼저 내민 휴전의 손바닥. 그걸 쳐낸다면, 루카스는 아마 죽을 때까지 시귀와는 적대관계가 되겠지.
제안을 받을까. 말까.
공격을 해버릴까. 그만둘까.
찰나가 안 되는 시간, 루카스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었다.
그 갈등을 일시에 무너뜨린 건, 여태껏 침묵하던 제3자였다.
“받아들여요.”
씨익 웃으며 얘기를 꺼낸 건 페일이었다.
의자에 반대 방향으로 앉은 채, 등받이에 턱까지 얹고 빙글빙글 웃고 있다.
“시귀는 안 돼요. 이자는 십이허주 중에서도 가장 귀찮은 존재인걸요.”
“…….”
“지금 아저씨가 싸워 볼 만한 십이허주가 몇몇 있죠. 근데 시귀는 아니에요.”
여전히 장난스런 어조지만 허언이 아니다.
루카스는 그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르게 투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시귀를 바라본다.
“받아들이지.”
“현명한 선택, 고맙네.”
시귀는 루카스의 갈등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웃더니 말했다.
“나의 얘기는 방금 그녀가 말한 것과 이어지네. 아무래도 자네의 목적은 십이허주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들은 것처럼, 우리들의 전력은 비슷한 수준이라네.”
묘한 말이다.
루카스는 시귀의 말에 담긴 위화감을 금방 깨달았다.
“전력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역시, 대화의 맥을 짚을 줄 아는군. 흐흐.”
시귀가 흐릿하게 웃었다.
“십이허주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지. 세력을 형성한 자와, 세력을 형성하지 않은 자. 자네가 조심해야 할 건 후자야.”
이 말은 선뜻 이해 가지 않았다.
자가 아니라 후자라고?
세력을 형성한 이들보다는, 단독으로 행동하는 십이허주가 훨씬 더 노리기 쉬운 먹잇감이 아닌가?
“다시 말하지. 십이허주가 가진 전력戰力은 비슷하네.”
“…전력戰力.”
그제야 루카스는 시귀가 한 말의 속뜻을 깨달았다.
“단독으로 움직이는 십이허주는, 세력을 형성한 십이허주가 가진 모든 전력과 비슷한 힘을 갖고 있다는 건가?”
“정답일세.”
그렇다면 정말 위험한 게 맞다.
화산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있었다. 당연히 양인현에 준하는 고수는 없을 테지만, 웬만한 영지를 꿰찰 만한 역량을 가진 이들은 열 손가락을 가볍게 넘을 것이다.
그런 화산이 가진 전력과 동등한 힘을 가진 십이허주라니.
“나 같은 경우는 이 폐기장 자체가 세력이지. 때마침 자네가 바깥에서 보았던 자들 또한, 모두 등에 업은 세력이 있어. 사마령은 [화산華山] 다이하드는 [퓨쳐릭스] 하스핀은 [디먼시오] 불행히도 죽어 버린 맨티스는 [군락지] 출신이지.”
“…….”
“그리고 제이콥. 그는 마성魔星 출신인데, 크크. 자네가 반드시 피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곳의 주인이겠지.”
“이유는?”
“비기닝 위저드는 자네의 상위호환격 존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세.”
아마도 이것이, 루카스가 가진 의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자신의 권능을 시귀가 일견에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
간단하다. 비슷한 힘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효과와 방향성은 달라. 하지만 적어도 자네가, 그 보이드란 힘의 완전한 선구자는 아니란 거지.”
“…….”
“내 대답은 이걸로 끝이네. 약속은 지킬 거라고 믿지. 그럼 난 이만.”
시귀는 그 말을 남기고 휙 사라졌다. 무언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듯한 태도다.
새까만 방 안에 남은 건 루카스와 페일뿐이었다.
“아까는 말하는 순간을 놓쳤는데요.”
페일이 슬쩍 입을 열었다.
“아저씨 진짜 강해졌네요.”
“…….”
“역시 내가 인재는 잘 알아본다니까. 어때요? 제 말대로 먹으니까 금방이었죠?”
헛소리에 대답할 여력은 없었다. 루카스는 무시하며 몸을 돌렸고, 주변을 천천히 관찰했다.
시귀, 그리고 디아블로가 있었던 장소.
무언가 건질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
“어라라.”
페일은 고개를 기우뚱하더니 쪼르르 쫓아왔다.
“안 본 사이 많이 쌀쌀맞아지셨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넌, 대체 뭐냐?”
루카스는 여전히 시선조자 주지 않은 채 물었다.
“벌써 잊었어요? 난 페일이에요.”
“이름 따위를 물은 게 아니야. 그딴 게 진짜 이름인지도 모르지만.”
“앗. 그딴 거라니. 맘 아파라.”
말해 줄 생각은 없단 거군.
그럼 루카스도 더 이상 말을 섞을 이유는 없었다.
루카스는 공간을 잘랐다.
“어? 같이 가요!”
페일이 쪼르르 쫓아왔다.
* * *
루카스가 공간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흠칫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그들 입장에선 돌연 새까만 공간이 쭉 열리더니, 그곳에서 루카스가 걸어 나온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헤헤. 이 통로 재밌네요.”
주변을 둘러본다.
흑기사, 루시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디아블로와 같이 떠난 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찾는 이는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에 축 늘어진 채로 있는 사마령의 모습. 아마도 기절한 듯하다. 루카스에겐 호조다. 그녀에게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길을 막았다.
다이하드다.
“뭐지.”
“…음. 일단 임시적 동맹 관계를 체결했거든. 그녀랑.”
사마령을 말하는 건가.
“그래서?”
“입장상 자네가 그녀를 해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단 거지.”
“해할 생각 없어. 그러니 꺼져라. 경고는 한 번뿐이다.”
루카스는 본론만 입에 담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대화를 오래 이어가기 힘든 탓도 있었다.
그러나 다이하드는 비킬 생각이 없다는 듯 웃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그 말을 어떻게 신뢰하겠나?”
“…….”
그냥 죽일까. 다이하드를 직시하며 그리 생각했다.
어차피 죽인다고 별로 탈이 될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래. 그러자. 여기서 죽이자. 그리고… 그 시체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루카스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던 순간이다.
“그녀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하스핀이다.
“그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나?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나쁠 건 없지.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나.”
하스핀의 목소리는 건조했으나, 차분했다. 그리고 루카스에게 지극히 온건적이었다. 까칠한 이쪽의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협조심을 드러낸 게 그 증거다.
“네놈들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그리고 넌 내게 순순히 도움만 줄 생각도 아니잖나.”
하스핀은 루카스에게 바라는 게 있다. 그 또한 도움을 빌미로 그 건을 다시 입에 담으려고 했던 모양인지, 미약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만날 생각은 없다는 건가. 나의 주인과.”
세디.
하스핀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었다.
그녀를 생각할 때면, 머릿속의 속삭임보다 심장의 고동이 더 크게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좋지 않은 전조다. 아마도 만난다면… 이보다 훨씬 큰 동요를 겪겠지. 그건 루카스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역겨운 제안은 집어치워라. 고트(Goat).”
뜻밖에도, 루카스가 생각하던 걸 그대로 말한 건 다른 인물이었다.
목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왔다.
그곳에 존재하는 오만한 얼굴, 제이콥이다.
“그분은 나와 함께 가야 한다.”
“…그분?”
제이콥은 대답하지 않고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루카스를 바라본다. 왠지 모르게 그 시선이 뜨겁다. 초롱초롱 빛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가 됐든, 여태껏 그가 보인 태도와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어울리지도 않았고.
“루카스 님.”
님?
“저와 함께 마성魔星으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
제이콥의 이해가 가지 않는 태세변환에,
루카스는 두통이 더욱 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