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66화
화산華山.
허의 세계 서쪽 지역을 대표하는 삼대세력 중 하나이며, 해당 지역의 정세를 가장 어지럽히는 주범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과격한 행보를 보인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매상검梅常劍 양인현이 장문인이 된 이후.
무슨 생각에선지, 양인현은 주변 영지를 향해 무차별적인 선전포고를 했고 존재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견 야만적인 침략 활동이었으나, 몇몇 영주는 양인현의 행위에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남자, 양인현이 단 한 번도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이허주란 이름이 갖고 있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만약 그가 전장에 옷자락이라도 비췄다면, 대부분의 영지가 무조건 항복을 했을 게 틀림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화산의 전력은 양인현만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는 광활한 서쪽 지역의 삼대세력으로 꼽힐 수 없다.
영주들은 알고 있다.
화산파의 장로라고 불리는 이들이, 실상은 핵심 전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정말로 경계해야 하는 이들은 따로 있음을.
그들은 단 한 명도 화산에 머물고 있지 않다. 웬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평소엔 허의 세계 곳곳을 떠돌며 스스로의 격을 높이는 데에 주력할 뿐이었다.
칠화七華. 혹은 화산의 일곱 잠룡潛龍.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그리 불렀다.
* * *
‘…5년 정도 지났나.’
칠화七華의 서열 2위, 이화二花 사마령司馬玲은 대략적으로 그 정도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체내 시계는 제법 정확한 편이다.
오차가 없지는 않겠지만, 아마 1~2개월 정도겠지.
약 5년.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사마령이 손에 넣은 건 결코 작지 않다.
‘…마음 같아선 몇십 년 더 머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선택이다. 사마령은 이미 정신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엄살이 아니라 진실로 그랬다.
폐기장 전역엔 지적 존재를 광증狂症으로 몰아가는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이 기운은 무척이나 집요하고 끈질긴 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져서 수양이 깊은 사마령의 정신조차 몇 번이고 부서질 뻔했다.
‘두 번은 오고 싶지 않은 장소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발을 들이긴 했지만,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다.
물론 존재력을 높이는 데 이곳보다 효율적인 장소는 달리 없다. 이 세계에 살아가는 지성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실제로 방문하는 이는 많지 않다. 정신 나간 출입 방법은 둘째 치고,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위험부담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앞서 말한 광증의 전조였다.
아마 사마령도 화산파의 비전심법인, 자하신공紫霞神功을 익히지 못했다면 5년은커녕 1년도 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성과는 거뒀다.
사마령은 폐기장에 오기 전보다 최소 두 단계는 더 강해졌다.
그럼에도 개운함은 없었다. 오히려 가슴이 납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겁다.
‘…양인현.’
화산파의 현 장문인이며, 역대 장문인 중에서도 궤를 달리하는 강함을 가진 괴물.
그러나 사마령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만이 아니다.
칠화의 절반 이상이 양인현을 탐탁잖게 여기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칠화란 존재를 만들고, 인정해 준 건 양인현이 아닌 전대 장문인인 당무기다.
그들 모두가 당무기에게 크고 작은 은혜를 입었고, 그중에서도 사마령의 감정은 특히 각별했다.
그녀는 당무기를 아버지로 여겼다.
“…후우.”
무거운 한숨의 이유는 뻔하다.
아직 부족하니까.
이토록 강해졌음에도 양인현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마령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양인현과 자신 사이에 놓인 거리보단, 우선 강해졌다는 사실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게다가 아직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도 시기상조다. 폐기장의 위험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사마령이 서 있는 구역엔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도 나지 않았고, 일반적인 동굴 내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벽면에 문이 있었다.
동굴 벽에 덩그러니 달려 있는 목재 문의 모습은 짙은 위화감이 들게 만들었으나, 이미 정신이 삐걱대는 사마령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문이 출구라는 것.
덥석, 조금 거칠게 문고리를 잡은 다음 열어젖힌다.
끼이익─
시야가 까맣게 물들며, 시공간을 넘어서는 부유감이 느껴진다.
들어올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다.
아마도 어긋난 시간을 맞추고 있는 거겠지. 고향 우주의 폐기장에 발을 들인 순간, 그 존재는 독립적인 시간의 선상에 서게 된다. ‘바깥’의 시공간과는 완벽하게 단절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의 경과도 동일하게 흐르지 않는다.
사마령은 저항하지 않고, 부유감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눈을 몇 번 깜박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5518588번 우주 출신, 사마령.]
새까만 방이었다.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왼쪽에서 들렸나.
슬쩍 고개를 돌리자, 해골 한 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흉흉한 안광이 아른거리는 걸 보니 단순한 시체는 아닌 듯하다. 그것보다 방금 목소리도 저 해골이 낸 것 같고.
[5년 2개월 7일, 2시간 11분 31초.]
“…무슨 뜻이지?”
혼잣말에 가까웠는데 용케 들었는지, 해골이 대꾸했다.
[그대가 폐기장에서 소모한 시간이다.]
답지 않게 유창한 말투다.
폐기장 출입구에서 봤던 어눌한 해골과는 다른 느낌, 어쩌면 그 녀석보다 상위 개체일지도 모르겠다.
‘약 5년, 맞네.’
사마령은 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새카만 방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는?”
[대기방.]
“대기방?”
[들어오는 데는 제한이 없지만, 나가는 것은 다르다. 주인님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그건 알아.”
해골이 말한 ‘주인’이 누구인지도 안다.
십이허주 중 하나인 시귀屍鬼.
…그 시귀가 가진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폐기장을 벗어날 수도 없다. 그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사마령이 염두하고 있던 또 하나의 위험부담이 바로 이것이었다. 시귀가 어떤 기준점을 갖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상에 따라, 출신지에 따라, 혹은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천차만별이라고는 들었다.
“내가 궁금한 건, 여기서 기다리는 것과 시귀의 기준점을 충족시키는 게 무슨 상관이 있냐는 거다.”
[효율의 문제다. 일은 한꺼번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주인님의 생각이시지.]
“한꺼번에?”
[정해진 인원이 모이면, 문이 열릴 것이다.]
그때였다.
사마령이 들어왔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
회색빛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관자놀이엔 뿔이 있고 등엔 피막날개가 돋아나 있다. 털이 숭숭 난 하체는 염소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전체적으로 악마의 모습을 가진 남자를 보며, 해골이 입을 열었다.
[제2번 우주 출신, 하스핀.]
“…….”
[12년 8개월, 35분 3초.]
하스핀이라 불린 남자는 감흥 없는 얼굴로 해골을 지나치더니, 검은 방의 구석진 곳에 앉았다.
‘하스핀…….’
사마령이 눈가를 좁혔다.
외관을 보니 [구덩이] 출신인 게 분명하다. 게다가 하스핀이라는 이름도 들은 적이 있다.
말을 걸지는 않는다. 저 남자는 위험인물이니까.
그 대신, 사마령의 시선은 다시금 해골에게 향했다.
“정해진 인원이란 건 몇 명이지?”
[6명이다.]
…앞으로 4명이 더 남았다는 건가.
쯧. 혀를 한 번 차고는, 그녀 역시 구석진 곳으로 가서 엉덩이를 붙였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다음 인물이 등장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벌컥─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건 하스핀보다 훨씬 충격적인 외관의 소유자였다.
거대한 사마귀였다.
커다란 턱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겹눈, 무엇보다 심상치 않은 예기를 내뿜는 앞다리가 돋보였다.
[제59953번 우주 출신, 덕 맨티스.]
“네네. 접니다요.”
경악스럽게도, 맨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구강 구조상 불가능할 텐데, 마치 혓바닥이라도 있는 것처럼 정확한 발음이다.
[3년 11개월 29일, 23시간 35분 1초.]
“흐음. 흠?”
맨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사마령에게 불쑥 다가왔다. 사마령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 준비했다.
“거기 예쁜 아가씨, 저 해골 친구가 뭐라고 말한 겁니까?”
맨티스의 출신지가 어딘지 대략적으로 짐작이 가서, 간단히 대꾸해 줬다.
“꺼져.”
“오우.”
맨티슨는 딱히 기분 나빠 하지도 않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번엔 하스핀에게 다가갔다.
“멋진 신사분, 제가 좀 물어볼 게 있는데─”
“폐기장에서 보낸 시간을 말한 거다.”
하스핀은 맨티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대답했다.
맨티스가 턱을 끄덕였다.
“아하. 그랬군요.”
“…….”
“어, 근데 당신 혹시 [구덩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섬멸사도가 아니신지……?”
하스핀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사마령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문 쪽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이후에도, 계속 ‘문’은 열렸다.
다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머리가 반쯤 벗겨진 노인이었다. 새하얀 백의를 몸에 걸치고, 양손엔 이상한 기계장치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안경 너머의 뒤집어진 눈동자가 결코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제92158번 우주 출신, 다이하드 록시르.]
[1년 7개월 19일, 10시간 51분 9초.]
“킬킬. 1년이라. 좋군.”
다이하드는 낄낄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마령은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전신이 핥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킬킬킬…….”
다이하드는 반쯤 풀린 눈동자로 그녀를 보며 웃더니,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제정신인 놈들은 없어 보이는군.’
아마 저들 또한 자신을 비슷한 시선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다음 인물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모습을 드러냈다.
[제39339번 우주 출신, 제이콥 빅크래시.]
[103년 11개월, 19시간 12초.]
“……!”
사마령의 몸이 움찔거렸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폐기장에서의 100년, 웬만큼 강대한 정신력으로도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필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 분명할 터.
검은 방 안의 인물들은 꿰뚫을 듯 날카로운 시선을 문으로 보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훤칠한 체격과 넉살 좋은 인상을 가진 남성.
사마령은 그의 차림새와 독특한 기도를 확인하자, 조금 납득할 수 있었다.
‘마법사.’
게다가 로브엔 겹쳐진 행성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저건 마성魔星 출신 마법사를 의미했다.
100년의 세월을 보낸 건 거짓이 아닐 것이다.
마법사란 작자들의 정신수양이 무척 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심지어 제이콥은 마성 출신이었다. 아마 정신적으로 자연을 굽어보는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
마법사, 제이콥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픽 웃었다. 좋던 인상이 단숨에 망가지며, 비열한 느낌이 들었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100년.’
사마령은 제이콥이 보낸 시간에 좀 더 주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바깥이라면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는 ‘밀도 있는 가능성들’을 손에 넣었다. 강해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고, 실제로 자신의 그릇이 몇 배는 넓어진 감각을 느꼈다.
고작 5년의 시간만으로도 그 정도 성과를 얻었다.
그리고 제이콥은, 그녀의 20배에 달하는 시간을 폐기장에서 보냈다. 아마 이 방에 있는 누구보다도 ‘많은 가능성’을 보았고, 얻어냈겠지.
사마령은 제이콥만이 아닌 모든 이를 하나씩 섬세하게 관찰했다. 어쩌면 이들과 싸워야 할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쉽게 볼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에 대한 관찰, 그리고 최소한의 대책을 모두 세웠을 때 문득 깨달았다.
방에 있는 이들이 아직까지 5명이라는 것을.
마지막 한 명이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제이콥까지는 연이어 등장한 느낌이었는데─
[─제2731361번 우주 출신.]
사마령의 상념을 끊어내듯, 해골의 목소리가 울렸다.
[루카스 트로우맨.]
“…….”
그 순간 고개를 숙인 채 명상에 잠겨 있던 제이콥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한 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보였다.
사마령이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해골이 말했다.
[4,000년 17일, 1시간 11분 3초.]
“…….”
“…….”
장내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은 순간,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