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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53화 (474/857)

외전 253화

먹으면 된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친 광경은 화산에서 페일이 보여 줬던 포식이었다.

“안 돼.”

이건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루카스는 반쯤 반사적으로 거절했다.

“어째서요?”

“그렇게까지 강해지고 싶진 않으니까.”

“이해가 안 가네.”

페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답답한 듯이 보이기도 했다.

“이 여자는 아저씨한테 가장 좋은 먹잇감이라고요. 아무런 페널티도 없이 섭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쿡쿡, 손가락으로 여자를 찌르며 말을 잇는다.

“이런 걸로 비난할 사람도 없고요.”

“그런 이유가 아니야.”

“그럼 무슨 이윤데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혀끝을 맴도는 말은 많은데,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지금 루카스에겐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도리 같은 게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도 식인이란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이건 분명 모순이 맞다.

…문득 양인현이 펼친 검법이 떠오른다.

매상검(梅常劍), 제일초식(第一招式), 멸무(滅武).

그를 완벽하게 패배시킨 그 검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 칼날은 모든 개념에 간섭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앱솔루트가 가진 공간 장악력도 효과가 없었다. 아마 종언이 발휘하는 억제력이나 무저갱의 속박마저 베어 낼 가능성이 농후하겠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그 사실이 더없이 낯설다.

상대는 비록 십이허주라고 불리고 있지만 근본적인 출신은 분명 인간이다. 반면 루카스가 처절한 싸움을 각오했던 상대는, 언제나 선천적인 절대자였고.

모든 걸 걸고 맞서 싸워야 할 상대가 인간이라는 것.

루카스는 그 사실에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인가?’

상대가 인간이라서, 내가 필사적이지 않은 건가?

아직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가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십이허주가 되지 않는다면,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았으니까.

“그냥.”

루카스가 말했다.

“그냥 싫어서 안 되겠어.”

페일의 시선이 느껴졌다. 루카스도 고개를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보다 더 큰 이유가 필요한가?”

페일이 히죽 웃었다.

“필요 없죠.”

킥킥. 그녀는 유쾌한 듯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싫은 건 싫은 거니까요.”

루카스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한 반응이다.

반면 루카스는 결단은 내렸으나 고민의 정도는 더욱 깊어졌다.

식인 행위가 이 세계에서 강해질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원칙이라면.

나는 대체 어떤 방식으로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 것인가.

아마도 지금 시점에서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 페일을 바라보며 묻는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으으음.”

페일은 의외로 진지한 태도로 고민해 주었다. 팔짱까지 낀 채로 홀로 끙끙 앓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잠시 후 그녀가 그림이라도 그리는 것처럼 검지를 휘저으며 말했다.

“있긴 있죠. 근데 지금 아저씨 수준으로는 많이 위험할걸요.”

거드름 피우는 말투에 루카스가 대꾸했다.

“그건 상관없는데.”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면서까지 강해질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는 단기간에 강해지는 게 불가능한 걸 알고 있다. 급진적인 성장이란 언제나 리스크와 밀접해 있다.

그러자 페일은 미묘한 얼굴로 루카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라……. 뭐, 직접 보면 맘이 바뀔 수도 있지만 일단은 데려다줄게요.”

“데려다준다고? 어떻게?”

설마 페일도 ‘길’을 볼 수 있는 건가?

“그건 아닌데요, 거기가 좀 특별한 장소라서.”

페일이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이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다. ‘아저씨가 뭘 묻든 간에 더 알 수 있는 건 없을걸요.’란 표정.

루카스도 이제 페일의 웃음에서 그녀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됐다.

“우선 거기까지 그 여자를 달고 다닐 순 없으니까…….”

페일은 돌연 말끝을 흐리더니 눈가를 살짝 빛냈다.

“있잖아요. 괜찮은 처리 방법을 떠올렸는데, 아저씨가 안 먹을 거면 그냥 내가…….”

“안 돼.”

“쓰읍.”

칼 같은 대답에 페일이 입가를 슥 닦았다.

* * *

약간의 휴식을 마친 후 루카스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왕복이라고 해서 오가는 데 동일한 시간이 소모되는 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나설 때보다 돌아가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이 소모되고 있다.

그건 시시각각 변화하는 공간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이 흐름을 보다 완벽히 파악할 수만 있다면, 단순히 ‘길을 보는 것’만이 아닌 지름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몇 발자국만 움직인 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파도에 휩쓸리는 난파선처럼.

…지금으로선 머나먼 이야기다.

루카스는 좌푯값을 계산하며 화산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양인현, 혹은 그가 사용한 검법이 아니다.

뇌옥에 갇혀 있던 남자, 이종학.

‘…그건 내가 알고 있던 이종학이었을까?’

여유가 생긴 지금 뒤늦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둘은 분명 서로를 알고 있는 듯 행동했으나 그 ‘둘이 알고 있는 서로’란 실은 전혀 다른 인물일지도 모른다.

즉, 뇌옥에 갇혀 있던 이종학은 무수한 평행 세계에 존재했던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진 이종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종학 또한 루카스와 만났을지 모르고. 거기서 루카스가 알고 있는 것과 흡사한 기억, 그리고 인연을 쌓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건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 결론이 나올 고민은 아닌 것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종학을 앞에 두고 서로의 기억을 대조하며 분석하는 것이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종학은 화산에 갇혀 있으니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종학과도 깊은 얘기를 나눠야 할 것이다.

그때 등에서 꾸물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크으…….”

뒤이어 터져 나오는 신음성.

물론 페일이 아니다.

루카스가 업고 있던 여자, 사막의 중간에 쓰러져 있던 여자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이다.

“눈을 떴나?”

“우와! 드디어 일어났네.”

“…여, 긴.”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힘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육포를 삼킨다고 모든 면에서 컨디션을 되찾는 건 아닌 것 같다.

루카스는 우선 발걸음을 멈춘 채 살짝 뒤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속이 울렁거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려 줘.”

그 말대로 해주었다.

여자는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힘겹게 모래 위에 섰다. 불안정한 느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여자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루카스와 페일을 바라보았다.

“화산의 인물들로 보이지는 않는데… 당신들은 누구지?”

딱딱한 말투에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배은망덕하다. 특히 육포 하나를 희생(?)한 페일의 아랫입술은 노골적으로 툭 튀어나왔다.

“버릇없네. 괜히 살려 줬나.”

“…….”

“그냥 먹어 버릴까 보다.”

“그만둬.”

루카스는 페일을 제지한 다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막 한가운데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더군. 피투성이가 된 채로. 여기 있는 페일이 준 육포로 살려 낼 수 있었다.”

그러자 여자의 표정이 미묘해지더니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목숨의 빚을 졌군요. 실례했습니다.”

“참 빨리도 깨닫는다! 흥흥!”

페일이 연이어 콧방귀를 뀌며 투덜댔다.

“…그런데 왜 절 구해 준 겁니까?”

여자의 눈동자엔 아직까지 경계의 빛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왠지 모르게, 루카스는 그녀의 내심이 훤히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구명을 받았어도 의도가 분명치 않은 이들을 선뜻 신뢰하는 건 힘든 일이지. 같은 상황이었다면 루카스도 똑같은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당신은 지저도시 인물로 보이는데.”

“예.”

“그곳의 영주인 미카엘과 안면이 있다.”

“…….”

“못 믿겠다면 여기서부턴 혼자 가도 상관없어.”

미글링들처럼 그녀 또한 자신이 속한 영지로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루카스의 말에 여자는 갈등하는 듯하다가 결심을 굳혔는지 더욱 정중히 말했다.

“지금 제 몸 상태는 온전치 못합니다.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신세를 져도 되겠습니까?”

“우린 도시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어.”

혹 정신을 차린 슈하이저와 부딪힐 수도 있으니까.

루카스는 속사정까진 밝히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근처까지라면 데려다주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채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녀는 군말 없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왔다. 자존심이 높아 보이는 여자니까 다시 업어 주겠단 제안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문득 좀 더 빨리 물어봤어야 할 게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되지?”

“…르샤라고 합니다. 그쪽은요?”

“난 페일이에요.”

여자, 르샤는 페일을 무시한 채 루카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루카스는 그 시선에 묘한 느낌을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루카스.”

* * *

하늘의 색채가 세 번 정도 더 바뀌었을 때 루카스 일행은 발걸음을 멈췄다.

“뭔가 소란스러운데요?”

페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고요한 잿빛 사막에 어울리지 않는, 격동적인 기색이 느껴진다.

그리고.

까앙, 깡─

아련하게 금속의 마찰음이 들린다. 뒤이어 무언가의 폭발음과 고함 소리… 이윽고 바람이 불지 않는 사막에 폭풍의 낌새가 느껴졌다.

집단이 싸우는 소리.

“…설마.”

르샤가 굳은 얼굴로 치고 나가듯 달렸다. 그리고 전방에 있는 작은 모래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저곳을 오르면 소란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루카스와 페일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먼저 뛰쳐나간 르샤보다 빨리 언덕 끝에 당도할 수 있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광활한 사막을 전장으로 두 개의 세력이 치열하게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한쪽은… 화산의 검사들이다. 안면 있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 특유의 차림새와 매화검법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른 한쪽은 미글링들. 다만 그들만 있는 게 아니다. 난쟁이 사이엔 인간으로 보이는 자들이 섞여 있었고.

화악!

하늘엔 찬란한 광채를 뿜어 대며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존재들이 있었다.

마치 성전에 나올 법한 천사(天使)와 흡사한 생김새다.

“이야~ 존재의 전쟁이네.”

페일은 좋은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손으로 망원경을 만드는 시늉을 했다.

“이거 완전 심봤어요. 아저씨, 쟤네 완전 비등비등한 것 같은데 여기서 구경하다가 중간에 싹 쓸어버리죠!”

“난 어느 한쪽을 편들 생각 없어.”

언젠가 화산과는 싸워야겠지만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면 굳이 곽도산 일행과 충돌을 피한 이유가 없어진다.

“…이건.”

뒤이어 도착한 르샤의 안색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전장을 내려다보다가 성큼 발을 내디뎠다.

“갈 생각인가?”

“예.”

“지금 상태로는 도움이 안 될 텐데.”

“압니다. 그래도 가야 해요. 저곳엔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

그 대답에 가슴에 묘한 술렁임이 느껴졌다.

그러나 르샤는 얼마 걷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로브 너머의 근육이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몸뚱이를 억지로 움직이는 대가로 전신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있을 것이다.

“제길, 아직 마나가…….”

르샤가 중얼거린 순간 전장의 지면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땀에 전 채 숨을 헐떡이는 백발의 남자, 슈하이저다.

컨디션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표정만 봐도 무리하고 있는 게 보였다.

화산의 검사들이 슈하이저와의 거리를 좁혔다. 검기를 맺은 칼날은 흉포한 짐승의 이빨처럼 슈하이저의 몸을 할퀴었다.

‘…멍청이가.’

정면 대결은 네 분야가 아니잖아.

루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이런 광경을 못 봤다면 좋았을 것이다.

로드. 아니 미카엘은 어디 있는 거지? 녀석이 전면에 나섰다면 전투 양상이 이토록 일방적이진 않을 텐데.

루카스는 전장 곳곳을 세심히 둘러봤으나 미카엘로 보이는 존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슈하이저의 팔이 잘려 나갔다. 불과 십여 초도 버티지 못한 셈이 됐지만, 녀석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서늘한 칼날이 무방비가 된 그의 목까지 치달았고.

츠즛.

─그보다 빨리 쏘아져 나간 검붉은 빛이 검을 박살 냈다.

“……!”

슈하이저의 시선이 언덕 너머로, 루카스에게로 향했다.

“한쪽 편들 생각 없다면서요?”

페일의 이죽거림에 대꾸할 여유도 없다.

루카스는 무시한 채 후드를 써서 얼굴을 가린 뒤 모래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때문에.

“앱솔루트? 설마…….”

르샤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미처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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