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52화
루카스는 십이허주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십이허주 단 하나에게 군림자가 패배했다는 말은, 그로 하여금 진위 여부를 의심케 만들었다.
“…군림자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겠지?”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외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절대자 출신으로선 대단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절대자에게 군림자란 유일신과 다름없는 존재니까. 그나마 그들 대부분과 적대했던 루카스였기 때문에 비교적 담백하게 물을 수 있었다.
[신이 만들어 낸 희대의 명검, 그리고 삼천세계의 가장 강한 억제력이자 폭군暴君들이지.]
미카엘이 시니컬한 어투로 대꾸했다.
루카스가 알고 있는 개념과 조금 틀린 듯했으나, 당장은 그에 관해 잡고 늘어질 때가 아니다.
“그런 군림자가, 십이허주 단 하나에게 패했단 말인가?”
[믿고 안 믿고는 그대의 자유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데 자긍심이 있다. 거짓된 정보는 결코 취급하지 않아.]
미카엘의 목소리에 희미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루카스가 자신의 말을 의심하는 게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누구에게 패배한 거지?”
[하나의 질문으로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군. 원래라면 여기까지 말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미카엘이 말끝을 흐린 다음에 말했다.
[네 번째 짐승이다.]
“…네 번째 짐승?”
[이번엔 내 차례다.]
더 자세히 설명할 생각은 없는지, 미카엘이 차가운 어투로 물어보았다.
[동행하고 있는 이와는 무슨 관계지?]
동행자. 페일을 말하는 거다.
…기억났다.
이것이 미카엘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양인현과 마찬가지다. 영주임과 동시에, 루카스와 같은 우주를 근본으로 둔 미카엘도 페일에게 흥미를 품고 있다.
그러나 루카스로선 그녀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네가 이미 답을 말했어. 그녀와 나는 단순 동행인 관계다.”
[단순 동행인?]
“그래.”
[…흠. 알겠다. 자. 다시 그대의 차례다.]
미카엘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턱짓했다.
그 태도에 조금 놀랐다.
‘선문답을 계속하자는 건가.’
지난번과는 다르다.
그때의 미카엘은 이 질문을 끝으로, 더 이상 루카스에게 흥미를 내비치지 않았는데.
…아무튼 루카스에겐 전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로선 미카엘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최소 백 개는 있었으니까.
“화산華山의 주인인 양인현. 그 남자에 대해 말해 줘.”
[범위가 너무 넓군. 앞서 말했다시피 허용된 용량을 초과한 질문이다.]
다행히 양인현에 관해 모르는 건 아닌 듯하다.
“그럼 네 재량에 맡기지.”
[재량에 맡긴다고?]
“그래. 알고 있는 정보를 추려서 말해다오. 네가 말한, ‘용량’을 넘어서지 않을 만큼만.”
[전적으로 나의 판단에 맡기겠단 거군. 날 어떻게 믿고?]
“널 믿는 게 아니야. 나의 안목을 믿는 거지. 내가 알고 있는 너란 존재는, 이런 시시한 일로 누구를 속일 만한 존재가 아니었거든.”
[…….]
미카엘이 픽 웃었다.
[재밌군. 그런 식의 제안을 받아 본 건 처음이다.]
“…….”
[좋다. 설명해 주겠다. 매상검梅常劍 양인현梁仁賢. 서쪽에 있는 십이허주 중 하나이며, 그들 중에선 가장 신입이다.]
그 말에 루카스가 멈칫했다.
“…십이허주라고? 양인현이?”
[그것도 몰랐나?]
루카스는 크게 놀랐으나, 깊게 생각해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사실도 아니다. 양인현이 가진 불합리한 강함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양인현은 화산의 전前 영주이자 십이허주였던 남자,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전대前代 장문인인 신검神劍 당무기唐武起를 꺾고 지금의 위치를 손에 넣었다. 불과 여섯 밤 이전에.]
“여섯 밤… 6일 전에 말인가?”
그러자 미카엘이 정정했다.
[아. 실례. 여섯 밤이라는 건… 그대의 관념으론 6개월, 약 반년 정도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세계에도 주기적으로 밤이 찾아오거든.]
“…밤이라.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그렇겠지. 잦게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밤이 되면 바깥을 돌아다니지 않기를 권한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밖에 있어야 할 상황이라면 가급적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야 하고.]
“…….”
…선의에서 우러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충고가 맞다.
루카스는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인현이 사용하는 검법은 아주 강력하다. 이 세계와는 상성이 좋아서 한계를 넘어선 위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하지.]
“…매상검梅常劍.”
[알고 있군.]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상검의 기원은 허무虛無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가 속한 영지에서 사용한다면 위력은 훨씬 배가 된다더군. 우리 영지에도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검사가 한 명 있지만, 양인현을 상대로는 도무지 승기를 잡을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
[흠. 생각보다 많이 떠들고 말았군. 이제 내가 물어봐도 되겠나? 이번이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
“얼마든지.”
미카엘은 루카스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말해 주었다. 말실수를 했다고는 여기기 힘들고, 아마도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 같은데 그 이유까진 모르겠다.
이윽고 미카엘이 말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음?”
[앞으로 너의 행보 말이다. 어떻게 움직일지 궁금하다.]
설마 자신의 행보에 대해 궁금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루카스는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너의 질문인가.”
[그렇다만. 왜. 대답하지 못할 얘기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우선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찾아볼 생각이다.”
[흐음.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군.]
미카엘은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충격적인 제안을 건넸다.
[당장 아무런 계획이 없다면 이 도시의 주민이 되지는 않겠나.]
“…네 영지의 주민이 되라는 건가?”
[객관적으로도 손해 볼 제안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왜 그런 제안을 건네는 거지?”
[거창한 이유는 없다. 굳이 말하자면 나 자신의 성향 때문이라고 할까. 흥미 있는 존재는 가까이 두고 관찰하고 싶은 성미라서.]
“…….”
방금 전 대화를 통해 루카스에게 흥미를 품게 되었다는 건가.
나쁜 제안은 아니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루카스가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장소를 찾으라면 이 지저도시가 한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미카엘만이 아니다.
어쩌면 슈하이저를 비롯한, 성공적인 재회를 이루지 못했던 지인들이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루카스라는 존재를 잊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루카스는 거절했다.
[…그런가. 아쉽군.]
미카엘은 미련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그 말을 마지마막으로, 미카엘과의 대화는 끝났다.
* * *
성당을 나서자 지난번과 비슷한 얼굴─의욕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로 서 있는 페일이 보였다.
그녀는 루카스의 등장과 동시에 한달음에 다가와선 ‘뭔 얘기 했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라며 요란을 떨었다.
“궁금한 것들에 대해서 물어봤어. 운이 좋게도 영주 또한 내게 흥미가 있는 것 같아서 정보를 교환했지.”
“호오. 호오.”
루카스는 과장스럽게 감탄하는 페일을 바라보며, 살짝 그녀의 속을 떠보기로 했다.
“나뿐만이 아냐. 영주는 너한테도 흥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던데.”
“엥? 나한테요?”
“그래.”
“에이. 그럴 리가.”
“…….”
떠보는 게 너무 얕았나. 페일의 태연자약한 표정엔 미동조차 없다.
루카스는 내친김에 더 질러 보기로 했다.
“너랑 만난 적 있는 것 같던데.”
“어디서요?”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힐 뻔했다.
루카스가 이 세계에 알고 있는 지역은, 그야말로 한 손에 다 들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때 머릿속을 퍼뜩 스쳐 지나간 건 양인현의 목소리였다.
“…서쪽 지역에서 일어난, ‘존재의 전쟁’이라고 했던가.”
“…….”
페일은 고개를 살짝 비틀며 침묵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일순 커튼처럼 얼굴을 가려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뒤이어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목소리.
루카스의 표정이 살짝 굳은 순간,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표정엔 평소처럼 헤실헤실한 웃음기가 보였다.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요! 난 여기 영주 진짜 모르거든요.”
“그런가.”
“네.”
그때쯤 미글링들이 다시 주변에 몰려들었다. 여전히 루카스에 한해서 긴장감 없이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루카스는 이들의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이들의 호의는 ‘루카스 트로우맨’에게 향하는 게 아니다. 아마도 이곳에 있을 또 다른 ‘트로우맨’, 즉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는 트로우맨에게 향하는 것이겠지.
‘…슬슬 슈하이저가 떨어질 때인가.’
지난번보다 얘기는 빨리 끝나서 여유 시간이 좀 남았지만, 끽해 봤자 수십 분 정도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떨어지는 슈하이저와 다시 조우할 것이다.
비록 녀석이 기절한 상태라고 해도 괜히 마주치고 싶지는 않다.
“페일.”
“넵.”
“넌 계속 나를 따라올 건가?”
둘만 있을 때 회피했던 의문을 아예 직설적으로 꺼냈다.
페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같이 있고 싶어서요.”
“…….”
설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라 멈칫하고 말았다.
페일은 소동물 같은 동글동글한 눈으로 물었다.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만.”
“헤헤. 그럼 같이 있어도 되죠? 아자.”
“…….”
주먹을 꽉 쥐며 기뻐하는 옆모습.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느낌을 지울 수 없으나, 사실 페일과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끝이 났다. 이건 루카스가 그녀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이상 깊게 파고들려면 그녀와 척을 질 각오까지 해야 한다. 어설픈 태도로 파고드는 건 벌집을 자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다.
“우선 여기를 떠나자.”
“떠나서, 어디로 가려구요?”
“글쎄.”
그건 오히려 루카스가 묻고 싶은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대체 어떡해야 강해질 수 있는지, 그 방법조차 찾을 수 없으니까.
막막함이 가슴을 휩쓸었다.
‘…우선 정처 없이 떠도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그 전에,
한 군데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 * *
루카스는 지저도시를 나선 뒤 잿빛 사막을 거닐었다. 생각 없이, 목적 없이 거니는 게 아니다. 지금 그에겐 분명히 당도해야 할 장소가 있었다.
무수하게 겹친 공간과 복잡하게 얽힌 좌표값. 그 사이로 나아가야 할 길은, 아주 희미한 기척을 풍기며 숨어 있었다.
비좁은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그 한 줄기 끈이야말로 루카스의 이정표였다.
페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뒤따라왔다. 그녀치고는 조용하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추측이지만, 루카스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직후부터 조용해진 것 같다.
이윽고 발걸음을 멈췄을 때 페일이 말했다.
“아저씨는 길을 볼 줄 아는군요.”
지난번에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
지금처럼 웃음기 싹 뺀 진지한 어조, 물론 그러한 태도는 눈 깜박할 사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루카스는 페일에게서 시선을 떼고, 눈앞에 있는 푹 파인 지면을 내려다봤다.
그곳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여인이 보인다.
…익숙한 기척.
지난번 생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어 버린 여자다. 결국 깨어난 모습을 보지도 못했고, 대화 한 마디조차 나누지 못했던 여자.
루카스는 저번처럼 페일을 대충 설득해 육포를 얻어낸 다음 여자에게 먹였고, 상처가 호전되는 낌새가 드러나자 곧장 그녀를 등에 업었다.
조금 있으면 곽도산과 네 명의 검사가 이 자리에 도착한다. 그때까지 여길 벗어나지 않는다면 다짜고짜 루카스에게 검을 휘두르겠지.
‘위협적이진 않지만.’
그냥 기다렸다가 모두 죽이고 떠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양인현과 대놓고 척을 지게 된다.
흔적을 아예 남기지 않을 자신도 없고, 혹 스스로는 그렇게 여겨도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증거를 남길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루카스는 허의 세계에 관해선 알고 있는 지식이 거의 전무하니까.
즉 가장 상책은, 곽도산과 충돌하지 않은 채 여인만 회수하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지저도시.
우선 그곳에 이 여자를 맡긴 다음 강해질 방법에 대해 찾아보자.
그리 생각하면서도 루카스는 스스로의 행동에 위화감을 느꼈다.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위해 이렇게 귀찮은 일을 하는 저의가 뭘까. 지금의 루카스는 딱히 선행에 집착하지 않고, 도리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근본 우주 출신이란 사실에 동질감이라도 느낀 건가. 아니면 지난번 생에서,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라도 든 걸까.
“아저씨는 목적이 뭐예요?”
문득 들린 목소리 때문에 상념에서 깬다.
슬슬 두개골이 지끈거리는 시점이었다.
길을 찾아서 나아가는 건 두뇌에 막대한 부담을 준다. 적어도 지금의 루카스는 이곳부터 지저도시까지 한 번에 왕복하는 게 불가능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곽도산이 따라오는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조금만 쉬도록 할까.’
루카스는 근처에 여자를 내려 뒀다.
그때까지도 페일은 멀뚱멀뚱한 시선을 보내며,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해져야 해.”
담담하게 최우선 목표를 밝혔다.
페일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일렁였다.
“얼마나요?”
“십이허주를 쓰러뜨릴 만큼.”
이번엔 눈가가 좁혀졌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는 십이허주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
“그렇구나. 그럼 간단하네요.”
“간단해?”
페일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를 먹으면 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