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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50화 (471/857)

외전 250화

재앙은 거대한 관점에서의 숙청이며, 때때로 절대자는 한 우주의 문명을 완전히 파괴하는 임무를 받기도 한다. 썩은 피를 짜내는 것과 같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거나, 혹은 개체의 평균적인 강함이 도를 넘어서면 우주의 수명은 크게 깎인다. 이는 단순히 추측만으로 내세운 이론이 아니다. 실제로 신의 영역을 엿보게 된 지성체들이 멸망시킨 우주란 셀 수도 없을 만큼 존재했다. 다시 말해, 이미 입증된 주장.

그리고 절대자라면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방금 보았던 대륙의 재앙.

그로 인해 우주의 문명은 쇠퇴하고 인구는 크게 절감했다. 다시 말해 문명의 발전 속도에 커다란 차질이 생긴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안타까운 일이겠으나, 해당 행성과 우주의 수명은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결국 한 우주의 멸망을 촉진시킨 건 언제나 지성체의 발전이었으니까.

신은 루카스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하나는 절대자로서 관조의 태도를 유지한 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이는 루카스가 그토록 바랐던 영원한 휴식을 의미했다.

하나 이 영원의 휴식은 필연적으로 루카스가 알고 있는 모든 존재의 죽음과 인간으로서 가졌던 책무를 완전히 내팽개치는 것을 의미했다.

스스로 인간임을 자처한다면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선택해선 안 될 길.

문득 광소가 터져 나온 것도 그 까닭이다. 루카스는 자신의 존재가 너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인간임을 잊지 않고 싶다.

한때 신념과 동일했던 맹세가 어느새 질척하고 어두운 집착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는 괴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루카스는 또 다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이 선택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여태까지와는 다르다.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마다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더 이상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운명을 저주할 수 없다. 그딴 꼴사나운 추태는 보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건 그가 직접 선택한 길이니까.

빌어먹게 암울하고, 처절하며, 험난한 길이 되겠지만, 다름 아닌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니까 누구도 원망해선 안 된다.

처절하게 발버둥 치라고?

그래. 좋다. 그토록 원한다면 보여 주겠다. 벌레의 꿈틀거림이 얼마만큼 사나워질 수 있는지. 그것이 지극히 한정적인 발버둥이 될지라도 상관없다. 촛불과도 같은 찰나성이야말로 필멸자의 숙명이자 아름다움이 아니던가.

루카스는 초점이 또렷하게 잡힌 눈동자로 앞을 직시했다.

그 시선이 신호가 된 것처럼, 캄캄한 공간에선 다시금 희끄무레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도 걷지 않았던 길을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항상 뜬구름 잡는 말로 운을 떼는 건 신이 보여 주는 대표적인 대화법 중 하나였다.

루카스는 반문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루카스 트로우맨, 더 이상 절대자의 외력에 미련을 가지지 마라. 넌 유례없는 속도로 지배자가 되었지만 스스로 깨달았겠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한계에 봉착했다는 느낌은 어렴풋이 받았다.

신의 말처럼, 지배자가 된 시점에서.

[거기서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군림자와의 격차를 좁힐 수는 없었을 테지. 그곳이 너의 종착역이었던 셈이다.]

“위대한 게임에서 승리한다면 군림자가 될 수 있다고 들었다. 그것도 거짓이었나?”

[거짓은 아니지. 하나 명함뿐인 직책에 무슨 의미가 있지? 네가 추구했던 건 이름이 아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권능이었을 텐데.]

“…그래. 그렇기 때문에 좌절했다.”

불합리한 존재.

군림자를 설명하기에 그보다 적합한 표현은 달리 없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존재’다. 그들의 탄생은 기적과 다름없었다.

결국 그들을 올려다보면서 느낀 건, 과거 데미갓에게서 접했던 종種의 격格이었다.

[…게다가 그 방식으로 군림자가 되어도,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신은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다음, 이어서 말했다.

[허의 세계에 그 단서가 있을 것이다.]

“단서?”

[십이허주十二虛主가 되어라. 그 이후에 왕좌로 가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게 되겠지.]

루카스는 신이 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카스 트로우맨. 나는, …이 아니었다.]

“뭐?”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흐릿해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신은 꺼냈던 말을 반복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지금의 네겐 모든 게 힘들겠지. 그러니 주겠다. 가장 처절하게 발버둥 칠 수 있는 힘을.]

루카스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다.

그의 신형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

떠났다.

이제는 모든 게 그에게 달렸다.

신은 홀로 남은 공간에서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툭 내뱉었다.

[이것이 나의 속죄다, 루카스 트로우맨.]

일전에 한 번, 그에게 직접 꺼냈던 말.

그와 동시에 희끄무레한 형상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가 어떤 길을 고를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포장하여, 너를 기만했지. 그에 관해선 사과하겠다.]

대답할 이는 한 명도 없었으나, 신의 중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스러울 거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어지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루카스. 그곳에서 겪은 모든 것들이, 너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신이 씁쓸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디 극복해다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슉.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와 함께,

형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 * *

욱신─

지끈거리는 두통이 육체의 존재를 깨닫게 해주었다. 루카스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감촉을 느꼈다.

“…큭.”

본능적으로 상처 자국부터 더듬는다. 죽기 직전, 양인현에게 베였던 곳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상흔이 존재하지 않았다. 핏자국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고.

루카스는 위화감의 원인을 찾는 데 앞서, 우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까끌까끌한 모래의 감촉은, 조금 익숙하다. …화산의 바깥으로 옮겨진 건가? 흐릿한 시야가 확실해지자 그게 사실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잿빛 사막의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와! 드디어 일어나셨다!”

비슷하게, 조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푸른 머리 여인의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고개를 기우뚱하는, 특유의 묘한 자세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네가 나를 돌봐준 건가?”

“넵!”

“고맙다. 또 신세를 져 버렸군.”

“……?”

잠시 갸웃거리던 페일이 곧 방실방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헤헷! 별말씀을요.”

루카스는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자신의 육체는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양인현의 검에는 허점이 없었고, 루카스를 향하던 기세는 더없이 뚜렷했다. 당시 진심으로 죽음을 바랐던 루카스는 그 검격에 대응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면, 페일은 ‘확실히 죽은 루카스 트로우맨’을 목격했을 수도 있다.

즉 그녀 입장에선 방금까지만 해도 시체가 분명했던 존재가 되살아난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로 인해 발생한 경악이나 당황, 두려움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에, 그녀의 내심이 짐작 갔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긴 했지만.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종학은?”

“네? 누구요?”

“이종학 말이다. 뇌옥에 갇혀 있던 남자. 내가 구출했던…….”

“으음~?”

페일은 여전히 영문 모를 얼굴로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그걸 보니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양인현이 약속을 어긴 건가?

아니. 약속을 어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이종학의 생존에 관해선 확답하지 않았다. 선처하겠다. 분명 그렇게 말했으니까.

“설마 죽은 건가?”

“몰라요. 종이학인지 뭔지, 그게 누군진 몰라도 여긴 아저씨밖에 없었어요.”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잘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페일과의 대화가 줄곧 엇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페일, 너 지금 무슨 이상한 소리를…….”

그러자 페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짝 놀란 듯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 루카스는 그 속에 아른거리는 희미한 날카로움을 보았다.

그 순간.

“앗!”

페일이 경호성을 터뜨리며 루카스의 뒤를 가리켰다.

“아저씨! 위험해요!”

거대한 음영이 졌다. 물론 이곳엔 구름 같은 게 없다.

고개를 위로 쳐들자,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괴물의 아가리가 보였다.

“……!”

루카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라바 블래스트를 사용했다. 푸화악, 폭발하는 용암은 순식간에 괴물의 전신을 삼켰다.

괴물의 전신이 촛농처럼 녹아내린다. 놈은 끔찍한 고통에 발광하며 몸부림쳤으나, 얼마 안 가 움직임이 뚝 멎고 말았다.

“우와아!”

페일이 짝짝 박수를 치며 놀랐으나, 당장 거기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루카스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우선, 양인현과의 일전에서 모조리 쏟아부은 마나가 완전히 회복되어 있다는 것. 기절하고 있던 사이에, 페일이 육포라도 먹인 건가? 모르겠다. 아무튼 이건 그나마 댈 수 있는 이유가 몇 가지 있으니 제쳐두고.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이 괴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괴물의 생김새.

루카스는 전신이 녹아내린 채 간헐적으로 꿈틀대는 괴물의 사체를 내려다봤다.

…역시 잘못 보지 않았다.

이 괴물의 생김새, 눈에 익다.

흡사 악어와 같은 생김새. 수십 미터는 될 법한 크기. 입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입과 삐죽삐죽한 이빨. 그리고 그 이빨들이 가진 제각각의 색깔.

확실하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조우한 괴물이다.

‘같은 종족인가?’

물론 그렇겠지만… 루카스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때 멀찍이서 감탄하던 페일이 쪼르르 달려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대단해! 어떻게 한 거예요?”

“마법을 사용했어. 마나룸이 차 있는데, 네가 육포를 먹인 건가?”

“네? 아뇨. 전 먹을 거 남한테 잘 안 줘요.”

그녀는 루카스가 더 떠들기도 전에 다시 물었다.

“근데요!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어요?”

“이름?”

“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슨 말이냐니, 방금 제 이름을 말했잖아요! 말해 준 적도 없는데!”

그 순간 스멀스멀 느껴지던 위화감이 확 구체화됐다.

“…페일.”

“넵.”

“내가 죽고 난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죽었다뇨?”

“양인현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죽었잖아. 그 이후에…….”

루카스는 마지막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페일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더니, 막바지쯤엔 아예 미친놈을 쳐다보는 눈빛이 됐다.

“어.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아저씨 머리 괜찮아요?”

페일이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으려 들었다. 루카스가 그 손길을 피하자, 약간 뚱한 얼굴로 쏘아본다.

루카스는 복잡한 얼굴로 페일을 바라보다가, 계속 입안을 맴돌던 질문을 던졌다.

“너와 나는, 혹시 초면인가?”

그러자 페일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

“으음. 이거 큰일이네. 친구 후보를 찾은 줄 알았더니, 머리를 크게 다친 아저씨였어.”

페일이 혼자 중얼거리더니, 루카스가 죽인 괴물의 사체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으로 쿡쿡 찌르며 ‘이거, 저도 좀 먹어도 돼요?’라고 묻는다.

대답하지 않았다.

굳은 듯 서 있는 루카스의 머릿속엔, 신이 남긴 마지막 목소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 지금의 네겐 모든 게 힘들겠지. 그러니 부여하겠다. 가장 처절하게 발버둥 칠 수 있는 힘을.

…가장 처절하게 반복할 수 있는 힘.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보았던 괴물, 완전히 회복되어 있는 마나룸, 그리고 자신과 초면이라고 대답한 페일.

조각이 맞춰지며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돌아온 거다.’

루카스 트로우맨은,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허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시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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