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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29화 (450/857)

외전 229화

드리드먼트.

루시드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검술. 항상 그 검에 보호받기만 했었다.

듬직하고, 안심됐다. 어떤 적이건 루시드가 버티고 있다면 안전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그 칼끝이 이쪽을 향하게 될 때 느껴지는 압박감이 어느 정도인지.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성벽? 혹은 철벽?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단단한 무언가를 향해 의미 없는 주먹질을 하는 느낌이다. 제대로 공격이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난 전투 요원이 아니라고!’

아나스타샤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도 당연했다.

지난 10년간, 이 인공 몸뚱이에다 온갖 개조를 하고, 마도학 도구를 부착시키고, 연금술까지 곁들였다. 애초에 골렘의 몸뚱이를 가진 채 강해질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기도 했다.

결과, 10년 전의 자신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루시드를 상대하는 게 버거웠다. 심지어 여유가 생긴 이리스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도 마찬가지다.

‘처음보단 얼추 손발이 맞게 됐지만…….’

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아나스타샤의 눈가가 가늘게 좁아졌다.

‘이 녀석, 싸울수록 점점 강해지는 것 같은데.’

언데드의 육신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건가?

그리 생각하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지금만 해도 끔찍할 정도로 강한데, 만약 저 육체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그리 생각하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시간을 끌면 더 불리해진다.

빠악!

아나스타샤의 주먹이 정확히 루시드의 복부에 꽂혔다.

제대로 들어갔다.

그 증거로, 여태껏 흠집 하나 없었던 흑갑이 보기 흉하게 우그러졌다.

교전이 일어나고 첫 유효타.

그런데도 공격을 성공시킨 아나스타샤의 얼굴은 얼떨떨했다.

비장의 일격 같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치열한 수 싸움 끝에 공격이 들어간 것도 아니다.

여태까지와 똑같은 공격에, 갑자기 루시드가 공격을 허용했다.

아나스타샤는 오히려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경계 섞인 태도로 루시드를 살펴봤다.

그는 돌연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른 어딘가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일단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리스에게 시선이 뺏긴 것도 아닌 것 같다.

루시드의 고개는 하늘로 향해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늘을 배경으로 전투를 펼치고 있는 두 마법사.

그중에서도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에게 시선이 꽂혀 있다.

* * *

비등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 간에 전투가 펼쳐졌을 때,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치열한 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선 상대방의 의중을 짐작하고, 언제든 신속히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깊은 심계가 불가결하다.

시야가 좁아서도 안 된다. 대마법사는 한 번에 수십 개 이상의 마법을 전개하는 게 가능하다. 앞과 좌우는 물론이고 뒤쪽이나 위, 아래. 심지어는 육체 내부에 전개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바로 연산력이다.

이미 발현된 마법은 되돌릴 수 없다. 마법 규모가 어떻든 소비한 마나는 돌아오지 않고, 짧든 길든 시전에 시간을 투자한 사실도 바뀌지 않는다.

즉 수십 개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했다고 아무 생각 없이 상대에게 죄다 날렸다간, 최대 위력의 절반도 내지 못할 확률이 높다.

스스로 전개한 마법들이라도 충돌은 일어나니까.

불과 물.

바람과 흙.

빛과 어둠.

상충하는 속성의 마법은 결코 동시에 날려선 안 된다. 어느 정도의 거리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반대로 합쳐졌을 때 시너지를 일으키는 마법도 존재한다. 그런 종류의 마법은, 꼭 동시에 시전할 필요는 없다. 출발하는 시간이 다르더라도 도착 시간이 맞물리면 되니까.

생각해야 할 건 이것만이 아니다.

나의 마법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상대가 시전하는 마법이다. 오히려 이쪽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내가 쏘아대는 수십 개의 마법, 상대가 쏘아대는 수십 개의 마법.

같은 경지의 마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결국 상성으로 승부는 갈리게 된다.

그러니 충돌 직전까지 마법의 진로를 끊임없이 수정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해서, 한순간도 생각하는 걸 멈춰선 안 된다.

거기에 이런 수 싸움을 병행하면서도 새로운 마법의 전개도 잊지 않아야 한다.

전쟁과 다를 바가 없다. 1차 충돌에서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고 할지라도 지원군이 없으면 순식간에 양상은 뒤바뀔 테니.

─디아블로와 프레이.

두 대마법사가 쏘아대는 마법포격은, 일견 의미 없는 소모전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두뇌가 하얗게 탈 만큼의 연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7성 마법사 열 명이 모여도 소화하지 못할 수식을 매 순간 짜내고 있다.

싸움은 이미 난전으로 넘어갔다.

이런 정신없는 격전에선, 1성 마법이 6성 마법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방심해선 안 된다.

‘말도 안 돼.’

그래. 방심하지 않았다.

…디아블로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자신의 연산력이 누군가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진실이 그랬다.

하지만, 지금 전황이 어떻지?

꽈르릉!

마법 충돌로 빚어진 후폭풍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다시 한 번 전쟁으로 비유하면, 전선을 거의 본거지 앞까지 물린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상대의 심계는 자신보다 최소 한 길은 깊었고, 시야는 반 뼘 이상 넓었으며, 연산력은 아예 비교할 바가 못 됐다.

쿠직!

수 싸움에서 패배한 첫 번째 대가가 찾아왔다.

디아블로의 오른쪽 팔이 박살이 나 버렸다.

하이퍼 볼트. 기껏해야 6성에 불과한 마법에 이만한 타격을 입게 되다니.

‘파이몬의 커튼’은 이미 사라진 상태다. 배리어를 치는 데 할당할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디아블로에겐 더없이 적절한 격언이다. 조금이라도 수세를 고려했다면, 그의 육신은 진작 산산조각이 났을 게 분명했다.

디아블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놈은 모든 면에서 나를 능가하는 마법사였다.

그 때문에 의문은 더욱 커져 갔다.

상대는, 단순히 천재가 아니다.

고속으로 연산하는 능력은 타고날 수 있다.

하지만 수 싸움이나 능구렁이 같은 심계를 기르려면, 필연적으로 긴 세월에서 누적된 경험치가 필요하다.

디아블로는 1,0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아온 마법사는, 지금의 대륙엔 없어야 했다.

그래. ‘지금의 대륙’엔.

[……!]

그 순간 디아블로는 전류가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달칵하고, 퍼즐 조각이 맞물린 듯한 쾌감을 느꼈다.

[크, 크크크…….]

디아블로의 목소리에 음험함이 느껴졌다. 프레이의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크크크. 크하하… 크하하하하!]

낮은 웃음소리는 이윽고 광소가 되었다.

디아블로의 안광이 세차게 타올랐다.

[그런가. 당신이었나, 대마도사─!]

환희에 찬 목소리.

그 순간 프레이.

아니, ‘프레이의 모습’을 가진 루카스의 마법이 멈췄다.

[비로소 돌아왔구나. 이 세계로……!]

“…….”

[크하하……. 그런가. 그 모습은. 네가 과거에 가졌던 ‘잊힌 모습’ 중 하나라는 거군. 그래. ‘상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설마 당신과 이미 접촉했을 줄이야.]

디아블로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루카스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직시했다.

무방비한 모습. 지금 끝장낼까?

‘아니.’

안 된다.

무언가 달라졌다. ‘방금 전의 디아블로’와는 다르다.

단순히 기세만이 아니다.

지금의 디아블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바뀐 것은, 디아블로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 하나뿐.

‘내가 루카스 트로우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직후 여유를 되찾았다.

즉, ‘루카스 트로우맨’이 상대라면 통할 만한 수단을 갖고 있다는 건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생각이었지만, 루카스는 왠지 이 추측에 신뢰가 갔다.

디아블로의 광소가 뚝 끊긴 건 다음 순간이었다.

[이리로 오라, 루시드.]

그 낮은 속삭임을 어떻게 들었는지, 아나스타샤와 교전하던 루시드는 순식간에 디아블로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루카스는 그를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루시드.”

기긱, 긱

고장 난 것처럼, 뚝뚝 끊기는 동작으로 언데드 기사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윽고 시선이 마주한 순간.

루시드의 안광이 세차게 흔들렸다.

[루, 카, 스.]

질척거리는 목소리.

[루카, 루카스… 루카스, 트로우, 맨.]

“…루시드. 너.”

[아아아. 아으아. 아아악. 아, 악.]

루시드가 얼굴을 부여잡은 채 비명을 터뜨렸다.

루카스의 표정이 굳었다. 영혼 자체에 상흔이 생기고 있었다.

[여기까지다.]

디아블로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 주겠다. 당신과 싸울 장소는 이런 곳이 아니니까.]

“헛소리.”

꽈앙!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나스타샤의 착지 때문이었다. 수백 미터의 거리를 한 번의 도약으로 거리를 좁혔으니, 돌조각이 이만큼 튀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도 아랑곳없이 디아블로를 노려봤다.

“우리가 이대로 네놈을 놓아줄 거라 생각하나?”

아나스타샤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내뱉었으나, 디아블로는 즐거운 기색으로 대꾸했다.

[따라올 거라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목숨을 걸 각오는 하고 오도록 해라, 떠돌이 골렘.]

“…네놈.”

디아블로는 대답을 듣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지면에서 튀어나온 새까만 암흑공간이 그를 발끝부터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뒤늦게 합류한 이리스는 그 흑마법의 정체를 간파했다.

‘섀도우 웨이’.

이동 거리도 길고, 발동 속도도 빠른 고위 흑마법.

눈 깜박할 사이에 디아블로와 루시드가 사라졌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당황하지 않고 이리스를 바라봤다.

“너라면 추적할 수 있겠지?”

“…네. 뭐.”

섀도우 웨이가 고난위도 흑마법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공간을 다루는 이리스가 추적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좋아. 지금 바로 추적을 시작하자. 디아블로는 지금 궁지에 몰린 상황이야. 끝장내려면 지금뿐이라고. 절대 놓쳐선 안 돼.”

“추적은 안 돼.”

제지하는 목소리.

아나스타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사나운 눈동자가 루카스를 향했다.

“너는…….”

아나스타샤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참견은 사양하지.”

“쫓아가면 이번에야말로 죽을지 모르는데도?”

의중을 묻는 듯하지만, 묘하게 단언하는 말투에 아나스타샤가 울컥했다.

“내가 그딴 것도 모를 줄 알아? 오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엔 훨씬 더 위험해질 걸 아니까 무리해서라도 끝장내자는 거 아냐.”

“함정일 확률이 있어.”

“아니. 지금 놈에겐 그만한 여유가 없어.”

“단정 짓지 마. 디아블로가 도망치면서 보인 태도를 벌써 잊은 건가? 놈은 우리의 추적에 별다른 압박감을 느끼고 있지 않았어.”

“그런 식으로 허세를 부린 걸지도 모르지.”

“…놈이 얼마나 주도면밀한지는 알고 있지 않나. 불확실한 확률에 자신의 안위를 걸 만큼 어설픈 남자가 아니야. 조금만 냉정해져라.”

아나스타샤가 침묵했다.

루카스의 말에 납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로 증명되었다.

“…냉정해지라고?”

아나스타샤는 고요하지만, 분명히 격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냉정해질 수가 있어? 알고 있나? 그 언데드 기사. 디아블로가 되살려서 조종하던 그 데스 나이트는, 내 친구였어.”

“…….”

“넌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냉정해질 수 있겠지. 몇 발자국 물러서서 사태를 분석할 수 있겠지. 난, 아니야.”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시린 바람이 되어 가슴을 헤집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 말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놈은, 루시드는 살면서 길바닥에 침 한 번 뱉지 않았던 남자였어. 어떤 때에도 청렴하고 결백했지. 자기 팔이 부러지는 것보다 동료의 긁힌 상처에 더 유난 떨던, 그런 놈이었는데…….”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긍정하지 못하고, 다만 침묵한 채 있었다.

“…그런 놈이, 언데드가 됐다고. 지금도 녀석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거야. 난 알아. 누구보다 깨끗했던 녀석이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자아가 남아 있다면, 언데드로 변한 현실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

“그러니 난 루시드를 해방시켜 줘야 해. 한시라도 빨리 그 고통의 사슬을 끊어 줘야 한다고.”

아나스타샤가 루카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모르겠지. 이해할 수도 없겠고. 하지만 나는, 내 친구가 언데드가 된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아나스타샤라면.

아니, 슈하이저라면 반드시 입에 담았을 말이었다.

루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의 자신은 아나스타샤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아나스타샤를 만류하지 않는 이유가, 정말 그녀를 막을 수단이 전무하기 때문인가?

루카스는 자문했다.

어쩌면 이 이상 그녀에게 받을 상처가 두려워서, 그래서 물러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관계없으니까. 너는 모르니까. 이해할 수 없으니까.

아나스타샤의 입장에선 당연한 말들이, 아팠다.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생각보다도 훨씬 힘들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루카스를 무시한 채, 아나스타샤는 이리스에게 무언가 따지고 있었다. 디아블로에게 추적할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이리스의 시선이 루카스에게 향한 순간이었다.

“그만두세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서진 도보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디아블로를 추적하면 이번에야말로 무사하지 못하겠죠.”

좌중에 있는 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모였다.

독특한 복색을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루카스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신의 대리자.

이 우주에 돌아왔을 때부터,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만남을 가졌어야 할 존재.

“…대무녀.”

히투메 이카르의 대무녀는, 나긋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왔다.

“당신들 모두에게 들려줘야 할 얘기가 많습니다. 특히.”

지척까지 다가온 대무녀가, 루카스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루카스 트로우맨, 당신에겐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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