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5화
“빨리 왔군요.”
페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하녀들에게 둘러싸인 헥터가 서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녀는 충분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어요. 덕분에 대화도 빨랐고요.”
“겸손이 심한데요. 웬만큼 언변이나 임기응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만약 제가 갔다면 이토록 단시간에 설득해 내진 못했을 테니까.”
“…….”
설득이라. 페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이름 붙일 정도로 고상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이스파니아 산맥으로 워프한 직후 다짜고짜 크게 외쳤을 뿐.
“디아블로가 루시드를 언데드로 되살렸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디 힘을 보태 주십시오!”
확실하지 않은 정보였다.
물론 페르안이 목격한 언데드가 데우키드를 소유하고 있고 스노우와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역량을 가졌다는 건 분명했으나, 그를 루시드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러니 도박이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아나스타샤는,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얼음장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감정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은 페르안의 말을 믿기로 결정한 듯했지만, 워프가 발현되기 직전 덧붙였다.
만약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너의 뼈와 살을 분리시켜 놓을 거라고.
“사실 가장 힘든 단계는 디아블로에게 들키지 않고 이 도시를 벗어나는 것이었죠. 만약 그가 눈치챘다면 마법 발현에 간섭을 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긴장이 무색하게도, 페르안은 아무런 방해 없이 유테르담을 떠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애초에 디아블로는 마나의 움직임보다 이리스 님의 권능 발현에 더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헥터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대치하고 있는 아나스타샤와 루시드의 옆, 잡동사니처럼 굴러다니고 있는 아실라를 보았다.
깊은 한숨과 함께, 그가 말했다.
“나의 천사들아, 그녀의 회수를 부탁해도 되겠니?”
“주인님의 명에 따릅니다.”
하녀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처참한 꼴로 분해된 아실라를 회수했다. 페르안은 차마 그 광경을 직접 바라보진 못하고 물었다.
“…살아 있는 겁니까?”
“아실라의 핵은 두뇌에 있습니다. 핵만 온존하다면, 육체 부품은 다시 갈아 끼울 수 있어요. …뭐. 그녀에겐 죽기보다 더 싫은 상황일 테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죠. 아실라는 훌륭히 제 역할을 완수했습니다.”
“…….”
그 목소리를 듣자, 헥터와 아실라의 관계를 단순히 악연으로 치부할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이 일었으나, 지금 물어볼 여유는 없었다.
페르안의 시선이 도시 너머를 향했다.
* * *
아나스타샤는 이 도시에 없었다. 아니. 이 근방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디아블로가 예의 주시하던 몇 존재 중 하나였으니, 확신할 수 있다.
즉, 누군가가 그녀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다.
[실수했군.]
디아블로가 읊조렸다.
[이리스의 권능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워프 정도면 제법 고위의 마법일 텐데 눈치채지 못하다니.]
아직까지 배신하지 않은 마법사. 그러면서도 단시간에 워프로 왕복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을 가졌고, 자신의 존재를 의식할 만큼의 심계가 있는 아크메이지.
현시점에서, 디아블로는 그러한 인물을 하나밖에 알지 못한다.
[페르안 준.]
확실히 일이 귀찮게 됐다. 디아블로는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첫 기습으로 이리스를 죽이지 못한 게 또다시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만약 그녀를 죽였다면, 이 자리에 등장한 아나스타샤까지 덤으로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
디아블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너와 싸울 생각이 없다. 내가 이들에게 바라는 물건은 너와 큰 연관도 없고. 그것만 준다면, 나는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떠날 용의도 있다.]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가 루시드를 저 꼴로 만든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 대화의 여지는 없어졌어.”
그 대답엔 무심코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아나스타샤가 불쾌한 듯 쏘아보자 디아블로가 말했다.
[이거 실례. 시대의 혼돈은 방치한 주제, 4,000년 전 인물이 되살아난 것에 화내는 광경이 자못 익살스러워서. 과연. 역시 과거의 망령이라고 불릴 법해.]
한동안 소리 죽여 웃던 디아블로가 태도를 바꾸었다.
[하나 그보다 더욱 웃긴 건, 네가 검호제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투 골렘 아나스타샤여, 아직까지도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건가. 너는 슈하이저가 아니─]
“닥쳐.”
디아블로는 아나스타샤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건드린 정도가 아닌, 날이 바짝 선 칼로 푹 쑤신 다음 헤집은 것과 다름없었다.
청록색 눈동자에서 분노 섞인 불꽃이 일렁였다.
꽈득, 작은 주먹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꽉 쥐어지더니, 당장이라도 디아블로의 백골을 산산조각 낼 것처럼 성큼성큼 다가선다.
그러나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건물 잔해 사이에서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속에 묻혀 있던 루시드의 갑옷이 다시 드러났다. 칠흑색 갑옷엔 긁힌 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 휘몰아치는 심상치 않은 사기.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굳었다.
‘온다.’
어쩔 수 없이 디아블로에게 향해 있던 주의를 루시드로 돌렸다.
수십 미터 이상 떨어져 있던 흑갑의 기사는, 순식간에 코앞까지 거리를 좁혔다.
소리가 없고 기척은 옅다. 그러니 의지할 건 안력뿐이다.
움직임은 포착했다. 그러니 대응하는 것도 가능했다.
아나스타샤는 두 팔을 교차시킨 다음, 그곳에 대량의 마나를 덧씌웠다. 그와 동시에 루시드가 데우키드를 내려쳤다.
꽈앙!
금속 마찰음을 넘어선,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나스타샤가 푹 주저앉았다. 무릎이나 허리를 굽힌 건 아니다. 여전히 그녀의 신형은 꼿꼿하다.
다만, 상식을 넘어선 루시드의 괴력이 아나스타샤를 받치고 있던 지반째 내려앉게 만든 것이었다.
‘무슨, 힘이…….’
버티는 게 고작이다. 아나스타샤의 팔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걷어 내거나 반격을 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루시드는 한 손으로 검을 내려찍는 상황이었다.
‘이건 루시드의 전투 방식이 아니야.’
그가 사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검술이었고, 검법이었다. 애검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이와 같은 방식, 제정신인 루시드라면 결코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슬슬 근골이 한계다.
이 이상 버텼다간 전신이 토마토처럼 짓뭉개질 것이다.
‘…나도, 10년을 허송으로 보낸 건 아니야.’
아나스타샤가 이를 악문 순간이었다. 그녀의 등에서 두 개의 촉수가 솟구쳤다. 사실 촉수보단 금속으로 만든 꼬리에 가까운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콱!
촉수는 끝자락에 달린 아가리로 데우키드의 검면을 콱 물더니, 가공할 만한 힘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비로소 루시드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끌어당겼고, 그대로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아나스타샤는 품에서 푸른색 보석을 하나 꺼내더니, 혓바닥을 쏙 내민 다음 이빨로 물었다.
으드득.
단단한 강도를 가진 보석이었으나, 골렘인 아나스타샤의 치아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보석을 과자처럼 짓씹은 다음 삼켰다.
서서히 눈동자에 얼음색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아아아─!]
입으로 얼음폭풍을 쏘아냈다.
쏟아져 나온 폭풍은 일대를 찢어발기며 상대에게 진격했다. 저 갑주의 방어력, 만만치 않단 건 알고 있지만 이거라면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그리 기대한 순간이다.
가만히 얼음폭풍을 내다보던 루시드가, 돌연 데우키드를 지면을 향해 내리꽂았다.
푸화악!
그와 동시에 지면에서 검은색 아지랑이가 피어나왔다. 마치 살아 있는 안개 같다. 아지랑이는 꺼림칙한 움직임을 보이며 저들끼리 뭉치더니, 반원의 형상이 되어 루시드를 감쌌다.
콰가가각!
마침내 접근한 얼음폭풍이 원을 세차게 할퀴었다. 그러나 폭우가 바위를 두드리는 것처럼, 소리만 요란할 뿐 뚫어내지는 못했다.
‘최고급 아쿠아마린으로 만든 얼음폭풍인데.’
역시 루시드의 견고한 방어력을 뚫기엔 부족하다는 것인─
아나스타샤는 생각을 멈추고 뒤로 몸을 날렸다. 하늘에서 뼈로 만든 창이 화살처럼 쏟아지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푸푸푹!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 뼈의 창이 우수수 박혔다. 직후 지면이 보라색으로 물들더니 그대로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역시 이 뼈의 창 또한 단순 물리력만 지닌 게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산성을 함유하고 있어, 조금만 피하는 게 늦었다면, 그녀의 육신 또한 양초처럼 녹아내렸을 것이다.
핏─
이어지는 공격, 검붉은 빛.
그걸 직시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루시드의 육탄 공격, 무수한 뼈의 창보다 이 한 줄기 검붉은 광선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비틀어 피했지만, 광선이 볼을 스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전신이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렸다. 아나스타샤는 곧바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디아블로… 9성의 경지를 완전히 이루었다는 것이냐?’
앱솔루트 라인.
마나 에너지로 움직이는 아나스타샤의 육체에, 그보다 상위의 힘인 앱솔루트가 침투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그녀의 전신을 순환하고 있던 마나들이, 동시에 그 움직임을 멈췄다. 전신에 혈액이 안 통하게 된 것과 같다. 물론 인체에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수십 초 내에 죽겠지만, 다행히 골렘인 아나스타샤에게 그런 걱정은 없다.
‘아니. 다행은 무슨!’
루시드 앞에선 수십 초가 아니라 1초의 빈틈도 죽음으로 이어진다.
꽈앙!
녀석이 폭발적인 기세로 달려오는 게 보인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도보에 금이 쩍쩍 생겨난다.
이윽고 눈 깜박할 사이 지척까지 접근한 루시드가 데우키드를 앞으로 쭉 뻗었다. 단순한 찌르기지만 내재된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만약 마나를 두를 수 있어도 방어보단 회피를 택해야 할 만한 찌르기.
그 칼끝이 목젖에 닿기 직전, 아나스탸사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암전했다.
팟.
그리고 어둠이 걷혔을 때, 그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다.
“아……?”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방심했군요, 아나스타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나스타샤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리스.”
뒤편엔 어느새 이리스가 서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권능을 사용해 아나스타샤를 순간이동시킨 것이다.
…이 여자에게 구제받다니.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아서 감사하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다, 고개를 홱 돌리며 루시드를 마주봤다.
“…저 녀석, 누구인지는 알고 있어?”
“검호제 루시드죠.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었던, 가장 고결하고 듬직한 방패.”
“지금은 우리 목숨을 위협하는 검이 되었지만 말이야.”
그 말에 이리스가 픽 하고 웃었다.
“감회가 남다른데요. 조금 아쉽기도 하고.”
여전히 긴장한 듯한 얼굴이니 진짜로 웃긴 건 아닐 테고. 긴장을 풀기 위해서인가.
아나스타샤도 우선 되물어 줬다.
“뭐가 아쉬운데?”
“옛 추억을 떠들기엔 한 명이 부족하잖아요?”
“흥. 모르지. 그 짐승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그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틀렸소.]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는, 말 그대로 죽은 이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리스와 아나스타샤는 문자 그대로 소스라치듯 놀라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루시드?”
“너, 의식이 있었─”
[당신들 모두 한 가지 잘못 알고 있소.]
루시드는 그들의 말을 끊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알고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린가요.”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은, 카사진만이 아니야.]
“카사진만이, 아니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 아니 것보다 너, 자아가 있는데도 그딴 언데드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거냐?”
[…….]
루시드는 다시 한 번 검을 바로잡았다. 마치 그들의 태도가 대답이 되었다는 것처럼.
…이 이상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건가.
예전부터 그런 남자였다.
완고하고, 고결하며, 누구보다 강직한 신념의 소유자.
이리스와 아나스타샤가 동시에 입술을 깨물었다.
* * *
…따뜻하다.
정신을 차린 루카스가 처음으로 느낀 감촉이었다.
카사진의 얼굴과, 마지막 기억. 두 가지 일이 겹쳐져 머릿속이 엉망이다.
루카스는 천천히 그 실타래를 풀었다.
‘…온기.’
푹신하고 따뜻하다. 움직이고 싶지 않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
그래선 안 된다. 루카스는 눈을 뜨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자신을 덮고 있는 이불, 비슷한 무언가가 꿈틀하는 게 느껴졌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루카스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불이 아니라, 거대한 불사조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닉스.”
[…….]
불사조, 닉스가 루카스를 올려다봤다.
…불사조란 종족이 내뿜는 불꽃은 신비롭다.
적대하는 이에겐 문자 그대로 겁화지만, 자신이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려는 이에겐 화롯불보다 따뜻하다. 뿐만 아니라, 상처를 재생하고 치유해 주는 효과까지 있다.
등을 제대로 베였음에도 그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아마도 닉스 덕분이겠지.
“고맙다.”
다시 한 번, 닉스가 깃털을 움찔 떨었다. 그녀는 마주 보고 있던 시선을 피했다.
이제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현기증이 났다.
비록 상처는 치유됐어도 흘린 피는 보충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부상자가 맞았다.
최근 들어 멀쩡했던 날이 더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가지 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인간이 된 닉스가, 복잡한 눈으로 루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많이 다쳤어.”
“알고 있어.”
“가 봤자 도움은 되지 않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여기 있는 게 더 안전해.”
“맞아.”
루카스는 한 번도 닉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닉스는 그럴수록, 이 남자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이번에 가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
루카스는 닉스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닉스는 주먹을 꽉 쥔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허억. 허억…….”
얼마 안 걸었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현기증과 함께 구역질까지 느껴졌다. 여기서 토했다간 아예 탈진할 것 같아서 억지로 참았다.
문득 이게 무슨 짓거리인가 싶었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 때가 있었나. 체감상 데미갓과 한창 싸울 때나 ‘프레이 블레이크’ 시절, 그리고 여러 우주를 구하러 다닐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은데.
“흐.”
웃음 비슷한 게 새어 나왔다.
카사진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어쩌면, 난 진짜 피학증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어.
툭.
몇 발자국 더 걷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흙이라도 먹었는지 입맛이 텁텁하다.
왠지 웨스트로드 아카데미서 겪은 폭우 내린 밤이 떠올랐다.
그때도 넘어졌지. 다 포기하고 싶었고.
‘…지금은 훨씬 상황이 낫지.’
루카스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일어섰다.
그때 시야 끝자락에 무언가 들어왔다.
검은색 상자다.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매끈한 상자. 원래 저기 있지는 않았는데……. 내 품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데, 방금 넘어지면서 저리로 굴러간 건가?
그리 생각하니 더 의아스럽다. 루카스는 저런 걸 가진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잠시 후, 그런 생각은 뒷전으로 사라져 버렸다.
“…….”
상자를 관찰한 루카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