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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24화 (445/857)

외전 224화

동굴을 나선 직후 마주한 건 잿빛 세계였다.

하늘엔 태양도 없는 뿌연 빛이 내리쬐고 있었고, 지면은 메마른 모래 같은 걸로 뒤덮여 있다.

모래가 아닌 ‘모래 같은 것’이라고 부른 이유는, 첫 번째로 색이 독특했으며─백색에 가까운 하늘색이었다─ 두 번째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따라와라.”

카사진이 다시 한 번 무심하게 말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두 눈으로 직접 보라고 말했다. 그리 권한 만큼 물어봐도 돌아올 대답은 없을 것이다.

루카스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버석거리는 지면의 감촉,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사막 같은 풍경보다 더 익숙하지 않은 건 바로 카사진의 존재였다.

낯설다.

걸치고 있는 넝마나 다름없는 의복. 그것도 고목이나 다를 바 없는 팔다리보다 시선을 끌지는 않았다. 허수아비에 걸레를 걸쳐 놔도 저보다 처량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이 남자가 정말 카사진이란 말인가.

지금 그에게선 과거 육체를 극한까지 갈고닦은 무왕으로서의 듬직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남 걱정할 때가 아닌가.

지금의 루카스를 본 카사진 또한, 더하면 더했지 덜한 심정을 느끼진 않았을 테니까.

구, 오, 오…….

그때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는 카사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직후, 순간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생물이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

저건 뭐지?

달리 비유할 게 생각나지 않는다. 비슷하게 생긴 동물이나 몬스터조차 없다.

놈은 우선 여섯 다리로 걷고 있었고, 등에는 퇴화된 날개 같은 게 힘없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머리가 달려 있는 부분에는 눈이나 귀가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툭 튀어나온 코 두 개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킁, 킁…….

놈의 신체 부위 중 유일하게 바쁜 부분이 코였다. 거대한 한 쌍의 코는 마치 곤충의 더듬이처럼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이쪽의 기척을 느꼈는지 콧구멍을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관점에 따라선 징그럽다고 느낄 수도 있다.

물론 루카스는 놈의 코보단 여섯 개의 발끝에 자리 잡은, 날카로운 발톱을 경계하고 있었다.

“놔둬. 코두리는 무해해.”

“코두리?”

“저놈 이름.”

“촌스러운 이름이군.”

“그러냐.”

카사진은 그리 말한 뒤 평탄한 걸음걸이로 놈의 옆을 지나쳤다.

루카스는 잠시 망설이다 그 뒤를 따랐는데, 카사진 말대로 딱히 공격할 의사는 없어보였다.

이윽고 괴생물, 코두리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카사진이 불쑥 말했다.

“많이 이상하냐?”

“…….”

코두리란 이름.

네가 지었구나.

* * *

이후에도 괴상한 생물들은 줄을 잇고 나타났다.

손과 발이 달린 잠자리.

거대한 혓바닥 같은 몸통과 수십 개의 촉수를 갖고 있는 괴물.

가슴 중간에 얼굴이 달려 있는 거인.

그것들 모두가 다양한 우주를 접한 루카스조차 처음으로 접해 보는 괴생물체들이었다.

카사진은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을 말해 주었다.

저건 잠냥이, 저건 혀다발, 저건 면상거인…….

그러나 수도 없이 나타나는 괴생물들과 달리, 주변 풍경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그들은 뿌연 빛을 쬐며, 하늘색 사막 위를 거닐고 있었다.

얼마나 되는 괴물을 보았을까.

그리고 얼마나 되는 거리를 걸었을까.

작은 산과 비슷한 높이의 모래언덕을 넘은 직후, 카사진이 말했다.

“도착했다. 저 성이 보이냐?”

“…성?”

루카스는 카사진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곳에 성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있었다. 노이즈? 아니. 아지랑이라고 해야 하나. 마치 그 장소만 풍경이 굴곡된 것처럼 비친다. 마치 무언가가 억지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안 보이나 보구만.”

카사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도 부족하다는 건가.”

“뭐가 부족하다는 건데.”

“디아블로 때문은 아닐 테고……. 아. 그렇군. 그녀 때문인가.”

문득 흘러나온 목소리에 루카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디아블로를 알고 있는 거냐?”

“말했잖냐. 난 여기서 다 보고 있었다고. 아무래도 아직도 넌 자격이 부족하나 보다.”

“자격이라니?”

다시 한 번 대답은 없다.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대답 회피, 듣는 이에 따라선 거짓말보다 더 기분이 상할지도 모른다.

그 태도에 부아가 치밀 법도 한데, 루카스는 화를 내는 대신 아주 깊고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사진, 너답지 않아.”

“나답지 않아?”

“줄곧 대답을 회피하고 있잖아. 내가 이곳에 오고 나서 가졌던 의문 중, 넌 어떤 것도 풀어주질 않았어.”

이곳이 어디인지.

왜 그런 꼴이 됐는지.

그리고 네가 살아 있는 건 맞는지.

넌지시 그것에 대해 물었을 때, 카사진은 항상 침묵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직설적으로 따지고 들자 그는 다시 한 번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표정은 조금 다르다.

루카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를 보았어.”

그리고 말하기 시작한다.

카사진이 아닌 카사진에 대해서.

마도무왕이 아닌, 악마왕에 대해서.

“이곳이 아닌 다른 우주에서. …검은 가시의 마왕. 그 군림자의 하수인이 된 채로 인간을 몰살하고 있더군.”

“…….”

“이것만큼은 대답해 주길 바란다. 그건 정말 너였나? 그 악마왕은,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카사진이었나?”

“아니.”

간격을 두지 않고 대답이 돌아왔다.

루카스가 바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의문은 더욱 커져 갔다.

“그건 내가 아니야. 하지만, 카사진이다. 네가 알고 있던 마도무왕은, 그놈이 맞다고.”

“그럼 너는…….”

“난 찌꺼기다, 루카스. 원래라면 네게 말을 걸 자격조차 없는 쓰레기지.”

처음으로 카사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고 했나? 그게 아니야. 대답할 수 없는 거지. 삼천세계의 우주에 관하여 필멸자에게 설파해도 이해하지 못하듯, 너 또한 나의 상황과 이곳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구조야.”

“…내겐 자격이 부족하다는 건가.”

“…….”

카사진의 침묵은 곧 긍정이 되었다.

“…넌 이곳에 두 번이나 왔다. 마치 유랑이라도 하듯 잠시간 머물렀고, 다시 떠났지.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도, 넌 이해하지 못할 거다.”

“…….”

“하지만 나는, 우리는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다, 루카스 트로우맨. 비록 찌꺼기라고 해도, 나는 다시 한 번 네게 걸어 보겠다. 4,000년 전과 같이.”

그 순간 루카스는 일전의 부유감을 다시 느꼈다.

지난번, 그러니까 프레이 블레이크의 존재에 대해 카사진이 넌지시 알려 줬을 때 느낀…….

루카스의 표정에 다급함이 어렸다.

이건 곧 이 세계를 떠나게 될 거란 전조다.

“잠깐만, 카사진. 난 아직─”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루카스는 카사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넌 잘 해낼 거다, 루카스. 다음 열쇠는 상자와, 디아블로다.”

“뭐─”

루카스는 당황한 얼굴 그대로 사라졌다.

“…….”

카사진은 모래언덕 위에 선 채로 너머의 풍경을 내려다봤다. 문득 그가 지친 태도로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람이라도 한차례 불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다.

* * *

아실라는 데우키드가 검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주 거대한, 이를테면 성 같은 크기의 건물을 극도로 압축시킨 뒤 휘두르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저 파괴력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꽈앙!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콰르르, 멋들어지게 뻗어 있던 고층 건물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걸 바라보는 아실라의 속도 같이 무너졌다. 그녀는 정말로 유테르담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

루시드가 동작을 멈췄다. 투구에 둘러싸인 고개가 살짝 기우뚱하는 듯하다.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눈앞에 있는 금발의 여인, 아실라의 전투능력은 거의 전무한 편이다. 디아블로가 표현한 ‘연약한 육체’란 말은 단순한 비하가 아닌 진실이었다.

그런데도 루시드의 데우키드는, 이미 세 번이나 목표물을 빗겨나갔다.

[그렇군.]

상황을 관조하던 디아블로는, 그 이유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공격이 적중하기 직전, 아실라의 입술이 미약하게 달싹이는 걸 보았다.

[아직도 용언을 쓸 수 있는 것인가, 골드 드래곤 아실라여.]

“…….”

역시 대마법사라고 해야 하나.

디아블로 정도 되는 존재의 안목을 세 번 넘게 속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신기하군. 용언이란 혼에 새겨진 권능. 비록 육체가 바뀌었어도 그 권능까진 사라지지 않겠지만……. 지금 너에겐 그 뒷감당을 할 만한 여력이 존재하지 않을 텐데.]

디아블로는 추측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에게선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혹은 루시드의 힘을 맹신하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밖의 이유가 있을까.

아무튼, 당장의 아실라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1초라도 더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만약 디아블로가 마법을 쓰며 개입했다면 루시드의 공격을 3번이나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지났지?’

당장 1초 버티고, 1초 피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보니 시간의 흐름까지 의식하진 못했다.

5분은 지났으면 좋겠는데……. 아니. 잠깐만. 5분이면 여태까지 번 시간을 한 번 더 벌어야 한단 거잖아.

제정신이니, 아실라? 너, 그럴 자신 있어?

‘없지.’

자문자답한 뒤, 슬쩍 입 끝을 올렸다. 체념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래. 수틀리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

꽈앙!

다시 한 번 흙발이 빗발치며 교전이 시작됐다.

그 어지러운 혼란의 도가니에서, 디아블로의 시선은 줄곧 아실라한테 박혀 있었다.

탐구심.

마법사의 강점이자 약점.

지금 그는 아실라를 분석하고 있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말했다시피 탐구심 때문이다.

드래곤.

데미갓에 버금가던 대륙의 절대자. 그러나 명운이 걸린 대전쟁에서 패한 뒤 강인한 육체를 뺏기고 자존심까지 거세당한 비운의 종족.

디아블로도 드래곤에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들이 타고난 선천적인 축복. 마나에 대한 절대적인 감응력과 그 응용법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흥미를 가질 법했으니까.

[과연.]

까득.

새하얀 손가락 뼈가 맞물리며 불쾌한 화음을 냈다.

[그 몸, 골렘의 육체였나.]

난해한 공식을 앞에 두고 끙끙대다 비로소 해답을 도출한 수학자처럼, 디아블로의 목소리엔 만족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인형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겠군. 인격과 기억이 아닌, 영혼과 인공육체의 결합이라……. 그만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남자를, 난 한 사람밖에 알지 못하는데.]

떠보듯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헥터의 작업물일 것이다.

디아블로는 둘의 관계에 대해 옅은 의문이 들었으나, 말 그대로 옅은 의문이다.

가장 신경 쓰였던 궁금증은 해소되었다.

드래곤 하트도 없는 드래곤이 어떻게 용언을 썼는가, 하는.

[되었다.]

디아블로가 선고했다.

[이제 끝내도 좋다.]

철컥─

그 한 마디에 루시드의 기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

아실라가 용언을 쓸 틈도 없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루시드가, 망설임 없이 칼을 내리그었다.

콰자작!

왼쪽 허벅다리부터 오른쪽 어깨까지. 아실라의 몸이 순식간에 반으로 부서졌다. 비명은 없었다. 핏물이 튀기지도 않았다. 다만 흘러내린 건 쇳물 비슷한 색의 액체였다.

[사람과 흡사한 건 겉모습 정도였나.]

내구도가 얼마나 단단한지는 모르겠다. 설사 전신이 강철로 이루어졌대도 루시드의 검술 앞에선 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테니까.

“크으…….”

아실라는 아직 살아 있었다.

머리만 무사하다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는 건 가능하다. 골렘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데우키드가 서서히 이쪽을 겨누는 게 보였다.

그 검이 아실라의 머리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루카스의 고개가 홱 소리를 내며 뒤쪽으로 돌아갔다.

허술하게 늘어뜨려져 있던 데우키드는, 순식간에 가슴 근처까지 팽팽하게 당겨졌다.

까앙!

강렬한 충격에 데우키드, 희대의 명검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루시드는 충격을 버티지 못했다. 그의 신형이 튕겨지듯 날아가 3층짜리 건물에 처박혔다.

[…….]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지, 디아블로의 움직임도 뚝 멈췄다.

그는 불신 어린 눈으로, 루시드를 후려친 인영을 바라보았다.

작고 가녀린 체구. 심지어 맨몸이었다.

그러나 전신에선 무시할 수 없는 압력이 흉악스럽게 뿜어 나오고 있었다.

“들었을 땐 긴가민가했는데, 진짜였나.”

소녀, 아나스타샤는 휘날리는 은색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디아블로를 노려보았다.

“너 이 개자식……. 내 친구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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