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3화
장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헥터와 아실라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 그러나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아실라였다.
그녀 자신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건지.
알고 있다. 알고 있어도… 그래선 안 되는 건가?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방안. 물론 좋다. 하지만 그렇게 합리적으로만 사물을 대하고 판단하는 건 너무 몰인정한 처사가 아닐까. 그게 많은 생명이 걸린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확실하지만 소수의 목숨을 구하는 것보단, 비록 확률은 낮더라도 다수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도박을 감행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적어도 아실라라면 그런 도박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
헥터는 아니겠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난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제 생각엔 워프석을 이용한 탈출이 원활히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군요.”
페르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대는 9성의 마법사입니다. 대규모로 전개될 워프 마법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어요. 그 즉시 막을 만한 여력 또한 충분히 갖추고 있고요.”
아실라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이었으나, 헥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뭐, 그렇겠죠.”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실라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됐다가, 홱 소리를 내며 헥터를 노려봤다.
“…너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글쎄요.”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갖고 놀다니.”
애초에 워프석을 운운한 것 자체가 모두 눈속임이었다. 헥터는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뗐지만, 아실라는 이미 부아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이런 점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아실라는 헥터가 싫었다.
“이리스 님이 쉽게 당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페르안의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 당했다고 할지라도, 디아블로 혼자선 무리였겠죠.”
“아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아실라 님, 디아블로의 현재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까?”
마도 결계 대부분이 망가진 상태지만, 관찰 기능까진 마비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페르안은 그런 기대를 담아서 물어보았고, 다행히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건 가능하지만… 본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 게 있을까.”
“어쩌면 많은 게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알겠어.”
아실라가 그리 말하며 눈을 한차례 깜박였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지잉─
눈동자에서 발출된 빛이 형상을 이루었다.
그 모습에 페르안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마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주술이나 술법 같은 건가? 그것과도 다른 느낌이 들다.
일반적인 사람에겐 불가능한 기예, 마치 인공적인 생명체에게 부착된 기능機能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실라 님, 당신은 혹시…….”
“그 이상은 말하지 마렴.”
아실라가 처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페르안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그녀가 발출한 빛에 집중했다.
형상을 이룬 빛은, 이윽고 어느 장소의 풍경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폐허가 된 도시. 유테르담.
저항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유린하고 있는 언데드가 보였다. 처절한 살육의 현장이다. 자아가 없는 언데드를 상대로, 시민들은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그건 자연재해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
드러난 참상에 페르안은 입술을 짓씹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지금은 분노를 터뜨릴 때가 아니다.
찾아야 한다.
페르안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디아블로만으로는 불가능해.’
스노우를 반죽음으로 몰아넣고, 이리스의 안전마저 위태롭게 만든 무언가.
디아블로 혼자선 불가능하다.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다.
‘어디냐?’
어디에 그런 존재를, 혹은 수단을 감추고 있는 거지?
…디아블로는 스노우와의 일전에서 정예 군단 대부분을 잃었다. 그 증거로 도시를 습격하고 있는 언데드는 자아조차 갖추지 못한 시체 짐승이었다.
이 유테르담은 그에게 있어 적지敵地나 다름없는 곳. 고작 저위 언데드만 믿고 도시 중앙까지 진격하고 있을 리는 없다. 아무리 도시 하나를 짓밟을 자신이 있다고 해도 그는 디아블로다.
누누이 언급한 철두철미한 성정이 있는 한, 이 자리에도 반드시 안전장치를 한둘쯤은 부착하고 왔을 터.
…스스로의 몸을 확실히 지킬 수 있는 수단.
물론 그게 스노우를 빈사상태로 몰아넣은 ‘무언가’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이윽고 페르안의 눈동자가 어느 곳을 향했다.
수많은 저위 언데드 사이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고위 언데드.
검은 갑주의 기사, 데스 나이트.
…그리고.
그 손에 자리 잡고 있는 검.
그 익숙한 형상의 검을 보는 순간, 전신에 전류라도 흐른 것처럼 몸이 떨렸다.
“…헥터 님.”
“뭔가를 알아챘습니까, 페르안?”
“아마도요.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말하세요.”
“당대의 검사 중, 스노우 님과 대적할 만한 존재가 있을까요?”
속세에 인연이 없는 듯 굴고, 대다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파악하고 있지만 페르안은 알고 있었다.
헥터의 정보망이 대륙 각지에 뻗어나가 있음을.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지점들이 단순 가게가 아니라는 것을.
“…글쎄요. 5년 전이라면 제키드의 이름을 꺼냈겠지만.”
이미 그 남자는 스노우와의 결전에서 패배했다. 그것도 제법 격차를 보인 채로.
‘검의 주인’이라는 칭호는 그날 이후부터 스노우의 것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경의를 담아 그녀를 화이트 슈프림이라고 불렀다.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요?”
“예?”
“역사에 기록된 위인, 혹은 영웅들 중에서는 없습니까?”
“페르안, 당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미친 생각이요.”
페르안의 시선은 여전히 데스 나이트에게,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검에게 향해 있었다.
“…시간을 벌어 주십시오. 15분, 아니. 10분이라도 좋습니다.”
“무슨 수가 떠올랐습니까?”
페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 살려 줘요…….”
젊은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 전신은 공포로 인해 쉴 새 없이 떨린다.
[…….]
루시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망설이는 것처럼, 칼끝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 태도에 희망을 보았을까. 여인의 얼굴에 묘한 기대가 피어난 순간이었다.
꽈앙!
허공에서 나타난 거대한 뼈 손바닥이, 그대로 여인의 전신을 후려쳤다.
핏물이 사방을 적셨다. 루시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까만 갑주에 묻은 핏방울은 유난히도 돋보였다.
[…아직도 완벽하지 않은가.]
디아블로가 탄성을 내뱉었다.
루시드가 품은 영웅으로서의 성품. 완전히 타락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명령체계는 확실히 잡혔지만, 아직 세세한 부분에선 조정이 필요한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으나, 디아블로의 뛰지 않는 심장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도시에서 얼마나 되는 언데드를 뽑아낼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다.
비록 대다수 마법사의 협력과 루시드란 카드를 얻고, 스노우를 죽였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대륙 전체와 싸우는 건 약간 무모하다.
‘대다수가 전투 능력을 갖추지 않은 민간인인가. 되살려 봤자 쓸모는 없을 터.’
이곳에서 쓸 만한 군세를 얻기는 요원하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사기를 주입한다면 그럭저럭 쓸 만한 병력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디아블로에겐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리스 피스파인더의 능력이라면 원군을 부르는 데도 용이하다. 물론 이반 정도의 강자를 불러오는 게 아니라면 별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아직 디아블로는 만전의 상태가 아니다.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걸 건 승부를 해 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오늘의 목적은 누군가의 살해가 아니다.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군.]
디아블로는 그리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실라가 그곳에 서 있었다.
철컹─
루시드가 검을 뽑으며 나서려고 했지만, 디아블로는 새하얀 손으로 제지했다.
[아실라 골디로스. 데미갓의 장난감이여. 연약한 육체에 틀어박힌 채로 생을 연명해 나가는 건 어떤 기분인가.]
“…….”
[필시, 유쾌하지는 않겠지.]
디아블로의 안광이 업화처럼 타올랐다.
아실라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었니?”
[흠.]
“만약 네가 협상을 원했다면, 나는 응해 줄 수도 있었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어째서?”
[만약 그랬다면, 물건을 손에 넣은 직후 다급히 검은 마녀를 부르진 않았을 테니까.]
아실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랄 필요는 없다. 정보가 새어 나간 게 아닌, 순수하게 추측으로 얻어낸 결론이니까. 물건을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이 도시에 이리스를 불러 놓고 있더군. 신속하고 정확한 대처가 없었다면 맞이할 수 없는 결과였지. 즉, 너는 애초부터 내게 순순히 물건을 넘길 생각이 없었다.]
“…너는 그 물건이 어떤 건지 알고 있는 건가.”
[이 내가 가치도 모르는 물건을 욕심낼 만큼 비합리적인 존재로 비치는가.]
까드득.
뼈로 된 손가락이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한 가지 물을 게 있다.]
역시 목적이 있었나.
아마도 그 때문에 아실라를 아직까지 살려 두고 있는 거겠지.
[상자는 어디서 얻었지?]
“…너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상자를 얻은 직후 바로 그곳에 들이닥쳤다고 들었으니까.”
[대략적으로는 그렇지. 다만 나는 확신이 필요할 뿐. 대답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더 이상 네게 볼일은 없어지겠지만.
뒷말은 삼켰지만, 분위기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실라는 망설였다.
물론 여기서 위치를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다음은? …디아블로와 대치하고 1분도 지나지 않았다. 페르안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최소 9분은 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직접 싸우면 9분은커녕 10초도 버티지 못할 테니 대화로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시치미를 뗄까? 아니면 순순히 말해 줄 수 없다고 말할까?
안 된다.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
디아블로는 아마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다만 확신이 필요할 뿐.
이자는 아실라에게서 확답을 듣지 않더라도 아쉬울 게 없다.
그렇다면…….
“아마칸 사막.”
우선은, 진실을 실토한다.
[…….]
디아블로의 안광이 일렁였다.
그건 순순히 대답한 아실라의 태도가 놀랍기 때문일까.
아니면, 혹시 자신이 예상과는 다른 답변에 약간이나마 당황하고 있는 걸까.
답은, 뒤이어 들린 디아블로의 중얼거림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역시 그랬군.]
그 목소리와 함께, 루시드를 제지했던 앙상한 손이 밑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디아블로가 짧게 말했다.
[이제 되었다.]
* * *
“…….”
와 봤던 곳이다
눈을 떴을 때, 루카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정신이 조금 몽롱하다. 정신 상태와 연결된 문제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공간 자체’가 그의 의식 상태를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마도사란 이름이 울겠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사람의 익숙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남자, 카사진은 지난번과 같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바위에 앉은 채, 어울리지 않게 비쩍 마른 다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기억이 차츰 떠올랐다. 루카스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고, 카사진도 그때 만났었다.
이상하다.
왜 이걸 여태껏 잊고 있었던 거지?
“심심하진 않더군.”
“…뭐?”
“네가 구르는 꼴을 보니까 시간은 잘 갔다고. 대체 뭐냐? 구르고, 구르고, 구르고……. 천하의 루카스 트로우맨이 어쩌다 그 꼴이 된 건지. 아니. 그건 아닌가.”
카사진이 삐죽한 웃음을 지었다.
“넌 예전부터 그런 성향이 좀 있었으니.”
“그런 성향?”
“맘 편히 있을 때보다 개똥밭을 구를 때 더 즐거워 보인다고 할까……. 뭐라더라. 그런 성벽도 있잖아. 피학증이랬나?”
“뭔 헛소리야.”
킬킬킬.
농담이었는지 카사진이 천박하게 웃어댔다.
루카스도 어처구니없이 웃음을 터뜨리다가, 곧 표정을 바꾸었다.
“카사진.”
“왜.”
“…넌, 진짜 카사진인 거냐?”
기분 탓인지, 전보다는 주변이 명확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직 시간은 좀 있을지 모르겠군.”
“뭐?”
“따라와라. 그리고 네 눈으로 직접 봐라.”
카사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